마음씨 타령 ⑤

동이 있기 때문에 정이 성립

생 역시 사가 있기에 존재

사는 듯, 있는 듯, 없는 듯.

모든 것이 이러하니

좋지 않아요?

 

이 자리 주인공인데

주인공이 결정한 대로

그대로 되는 거예요. 

 

돌말이 뛰어가. 돌장승이 말을 해. 실로 우리가 이 자리, 가고 오는 것이 없어요. 가도 가는 것이 아니고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도리를 알아야 이걸 압니다. 납득이 갑니다. 만약 가는 것을 가는 걸로 보고 오는 것을 오는 걸로만 봐. 가고 오는 데 치우쳐 버려. 그러하면 이것이 납득이 안 갑니다. 왜 그러냐면 가도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죽는 걸 간다고 비유합시다. 내가 죽었어요. 이거는 없어졌어요. 없어졌다 합시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없어지는 거 아니거든요. 그러니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가도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났다 합시다. 나도 난 것이 아니거든요. 파도가 생겨도 물을 여읜 것이 아니거든요. 원래 그 자리는 휘영청한 자리 의젓한 자리, 그 자리거든요. 그대론데 나긴 뭘 나. 나는 듯한 거예요. 가는 듯한 거예요. 전부 듯이에요. 우리가 사는 듯 나는 듯 남자인 듯 여자인 듯 늙은 듯 젊은 듯한 거뿐이에요. 왜 듯인고? 늙음이란 정법이 없습니다. 정법이라면 한 번 딱 늙으면 영원히 늙어야 되는데 그것도 변해. 변해. 젊은 것도 듯한 거예요. 영원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젊은 것이 차차차차 늙어. 전부 듯 놀음입니다.

그렇다면 가는 것이 가는 것이 아니고 오는 것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죠. 돌말이 가만있는데 가만있는 것이 가만있는 거예요? 가만있는 것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결론이 나는 거예요. 또 가도 가지 않는다는 그런 결론이 나는 거예요. 이거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거 본바탕 그걸 알면 이까짓 말 참 쉬워요. 아주 쉬운 말이에요. 조금만 들으면 아 그렇구나 그 의미로구나. 우리는 말에 얽매이지 말고 그 말뜻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팔만대장경에 얽매이지 말고 팔만대장경의 뜻을 알아야 되요. 그렇다면 돌말이란 것도 하나의 보리상이에요. 그러나 이 자리는 보리상이니 뭣이니 말할 것도 없고 뛴다 안 뛴다 이걸 갖다 우리가 얘기하는데 뛰면 참말로 뛰는 건가요. 돌말, 이것도 역시 하나의 환상으로서 나타난 거라 말이죠. 안 뛰는 건 참말로 안 뛰는 건가요? 뛰는 건 뛰는 것이 아니고 이름뿐인 뛰는 것이고 안 뛰는 건 안 뛰는 것이 아니고 이름뿐인 안 뛰는 거라 말이죠.

그러하면 돌말이 뛴다고 한 사람이 얘길 했단 말이죠. 그러면 그 말이 맞아. 뛴다 해도 좋아. 안 뛴다 해도 좋아. 이런 결론이 나는 겁니다. 물론 이런 설법을 통해선 말로 잘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돌말이 뛴다. 지화자 좋을씨고 돌말이 뛴다. 이걸 갖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꽃이 피어. 그거 참말로 핀 건가요? 참말로 핀 것이라면 영원히 있어야 되게? 곧 떨어져. 그 참말로 꽃이 떨어지는 건가요? 나중에 또 피어. 꽃이 피는 건 피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건 떨어진 것 이 아니라. 이런 결과가 나는 겁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돌말이 뛴다. 뛰긴 뭘 뛰어. 그러나 또 어찌 안 뛰냐 말이여. 왜 그러냐면 뛴 것은 뛴 것이 아니고 안 뛴 것은 안 뛴 것이 아니니까 여기서 우리가 말을 딱 끄집어서 하자면 뛴다고 해도 말이 돼. 안 뛴다고 해도 말이 돼. 이런 결론이 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누리의 진리는 모습으로 봐서 차별현상으로 봐서 동, 움직일 동자, 동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절대로 동을 위한 동 아닙니다. 동, 정이 둘 있는데 이건 고요한 것, 이건 움직이는 것 이랬는데, 여러분, 동이란 말이 어디서 성립이 됩니까? 이 정자가 있기 때문에, 고요한 것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이 없으면은 절대로 동이란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럼 정, 이건 고요함을 뜻하는 건데 동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정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동이 없는데 정이란 말은 절대로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러하니 이 누리의 진리는 동도 아니고 정도 아닙니다. 비동비정입니다. 어째서 그러나? 동 가운데 정이 있어. 정 가운데 동이 있어. 그러하니 우리가 움직거려. 그러나 다 움직거리는 것은 아니거든. 그 가운데는 정이 있거든. 정이 없으면 움직이질 못해. 또 정은 동이 있어. 동이 있기 때문에 정이라 할 수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비동은 비정이라.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는데 이렇다면은 생사, 생은 사가 있기 때문에 생이란 말을 하고 사는 생이 있기 때문에 사란 말을 하는 거나 꼭 마찬가지에요. 그러하니 뛰는 것은 안 뛰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안 뛰는 것이 있기 때문에 뛴다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은 동 중에 정이 있듯이 뛰는 가운데는 안 뛴단 말이 포함되어 있다고 이래 봐도 좋아요. 안 뛴다는 것은 뛴다는 말귀가 포함되어 있다고 봐도 좋은 거예요. 그러하면 뛰고 안 뛰는 건 둘이 아니다. 동과 정은 둘이 아니다 이런 결론이 나는 거예요. 그러하니 여러분이 누리의 진리를 정확하게 파악을 하면 아 그렇구나 이렇게 말할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이 긍정이 갑니다.

처음에 이런 도리를 모르고 그만 말마디 거기에만 딱 들어앉아 버리면 참 있을 수 없단 말이지 이래 생각합니다. 그러하니 지화자자 좋을씨고 돌말이 뛰네. 돌말도 뛰어. 뛰는 듯해도 좋아. 모든 것이 사는 듯, 있는 듯, 없는 듯. 이러하니까 뛰는 듯 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이 자리 주인공인데 주인공이 결정한 대로 그대로 되는 거예요. 이거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어요. 우선 오늘 저녁에 이 정도로 하고, 다음 문제가 나오니까. 그러니 돌말이 뛴다 돌계집이 노래를 한다. 나무달이 무공적이, 구멍없는 피리를 분다. 줄 없는 거문고 소리를 듣는다. 이 말 전부 아까 돌말이 뛴다와 이 소식하고 같은 얘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는 그 누리의 지도리를 딱 파악한 뒤에는 이거 마음대로 쓴다 이겁니다. 마음대로 써버리는 겁니다. 그까짓 거 걸거침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써도 그 말한 그대로라요. 하 군, 알겠나, 우청, 알아듣겠지? 그러니까 벌써 뛴다 안 뛴다 상대성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뛰는 것은 뛰는 것이 아니고 안 뛰는 것은 안 뛰는 것이 아니라는 이런 도리,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이런 누리의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이 이 말이 소화가 돼. 그 전에는 소화가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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