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회향게(回向偈)

연꽃은 높은 산이나

산 봉오리에 피는 것은 아니다.

진흙 구덩이 속 연꽃은

더럽고 지저분한 요소에

하나도 물들지 않고

꽃잎에 향기를 피워 자랑한다.

 

인간은 오탁악세에서

성도 내고 탐심도 부리며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짓는다.

이러한 가운데서 연꽃처럼

옳은 사람 노릇하는 이야말로

참다운 사람이다.

현실을 도피한다면

연화세계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흔히들 계율을 일괄하여 혼동해 버리고 율도 또한 계인 것처럼 착각하는 수가 많다.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에서 비구(比丘)와 대처(帶妻)로 분열되어 싸우는 것도 그 연원을 깊이 따지고 들면 이 율장(律藏)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계와 율을 얘기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것을 부처님이 설사 말씀하였다손 치더라도 이를 지키느냐 어쩌느냐에 대해서는 상당히 고려해 볼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로서 곤란한 점이 많다. 이것은 난행도(難行道)이다. 물론 하기 어려운 일을 해 나가는 것이 퍽이나 존귀하고 거룩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상 우리가 그런 곤란한 일을 꼭 해야 되느냐는 데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다. 자칫하면 짐짓 계율을 지키는 척하고 실상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자성(自性)을 속이는 그런 가장이 있고, 위선·가식·거짓부렁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은 더 이를 나위도 없고, 계에 있어 선행(善行)을 닦는다든지 거짓말을 안 한다든지 살생을 하지 않는다든지 하지만, 우리가 엄밀한 의미로 이를 고찰해 볼 때 그런 계를 지킨다는 것이 실지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깨닫는다.

생물로서의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에는 산 것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사람 생각으로는 동물을 죽이면 살생이고 식물에 대해서는 이것이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따라서 계를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이 발달하여 동물과 식물도 다 한가지로 생명체인 이상 생물학에서 통틀어 연구하게 되었으며 또 깊이 들어가면 동물과 식물의 한계가 모호한데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쌀이나 보리 같은 식물은 이를 먹어도 살생이 아니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 말이 되었다.

식물일지라도 엄연히 그 자체의 생명이 있는 것인데, 이것을 빼앗는다면 틀림없이 동물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심지어 물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微生物) 같은 것이 꽉 들어 있는데 그렇다면 물 마시는 것조차 벌써 살생이 된다. 물론 이런 것이 모두 다 살생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루라도 살생을 하지 않고는 못 살아간다. 중생은 이렇듯 죄악의 업장(業障)이라는 것이 깊고, 도무지 헤어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계가 아니라 죄악의 자각과 우리 스스로가 못나고 어리석은 중생이라는데 대한 심각한 반성인 것이다.

계율이란 제아무리 지키려고 애쓴다고 해도 되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조목마다 다 지켰다손 치더라도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이 엉성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계율은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다는 소린가? 그것은 오직 염불을 하는데서만 청정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쉽사리 나무아미타불로서 완전히 계율이 이루어진다.

일본의 친란상인(親鸞上人)이라는 이는 아무리 애써도 계를 지킬 수 없었다. 그는 인물이 잘 생기고 퍽 풍모가 있는 사람이어서 여성들이 자꾸만 따르니 이들을 물리칠 수 없어 인정을 쓰다 보니 연애를 자꾸 거듭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 죄를 참회하는데는 염불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렇듯 인간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고백하였다는 점으로 많은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에 관련되어 재미나는 얘기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원효대사(元曉大師)라는 소설을 지어냈는데, 여기 나오는 원효대사는 친란과 방물한 데가 있다. 원효대사는 결코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데, 일본 사람의 사상을 그대로 집어넣어 딴 사람을 만들어 왜곡된 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원효대사는, 인간으로서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 어느 모로 보나 완전무결한 사람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부처님의 정신이다, 그러니까 사람 노릇을 빈틈없이 하는 것이 부처님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효대사의 말씀에 무리지지리(無理之至理)하고 있다. 아무 이치도 없는 무리한 것 가운데 지극한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 불연지대연(不然之大然),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것이 차라리 커다란 긍정으로서 참된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 사회는 오탁악세(五濁惡世)요 진흙 구덩이와 같다.

진흙 구덩이 속에 연꽃이 핀다. 연꽃은 높은 산이나, 산 봉오리에 피는 것은 아니다. 진흙 구덩이의 연꽃은 더럽고 지저분한 그런 요소에 하나도 물들지 않고 꽃잎에 향기를 피워 자랑할 수 있고 그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말도 있다. 연꽃과 같은 오묘한 진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 오탁악세에서 성도 내고 탐심도 부리며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짓고 이런 일 안 하고는 안 되게 되어 있다.

손톱 속에 흙도 넣고 손으로 빗자루도 들고, 더러운 것, 정한 것, 가리지 않고 만져야 된다. 이러한 가운데서 연꽃처럼 옳은 사람 노릇하는 이야말로 참다운 사람이다. 이를테면 오탁악세를 떠나 현실 도피를 한다면, 연화(蓮花)세계는 생각할 수 없다. 이를테면 모순과 부조리한 현실의 진흙 속에서 진리의 오묘한 꽃은 창조되는 것이다. 이점이 원효대사의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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