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말하는 토끼 따라 굴을 넘어가니
그곳에는 ‘이상한 나라’가 펼쳐져
인지 넘어선 異세계는 禪과 닮아

앨리스의 여정은 고정관념 버리기
일체 자유로워야 깨달음에 이르러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강둑에 앉아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점차 몹시 지루해졌다. 그래서 앨리스는 데이지 꽃다발이나 만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는 데이지 꽃을 뽑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분홍 빛 눈의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가까이 뛰어왔다. 그게 딱히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토끼가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고 서두르자, 그제서야 이전에는 조끼를 걸치거나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는 토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호기심에 불타올라서 토끼를 쫓아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토끼가 울타리 바로 밑의 큰 토끼굴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본 앨리스는 어떻게 빠져 나올 건지는 생각조차 않은 채 굴로 뛰어들었다.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中

우리는 살아가면서 전혀 예기치못한 순간에 삶에 큰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앨리스가 굴 속으로 떨어진 것처럼 한 순간에 빠른 속도로 일어난다. 대개의 경우 이런 큰 변화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강조한 부분처럼 몇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우선 ‘지루함’을 느껴야 한다. 나날의 삶에 신선함과 활력이 사라져 그저 만사가 시들하다. 이것만 성공하면 삶이 빛날 줄 알았는데 삶은 여전히 시든 배추처럼 늘어져 있는 그런 상태여야 한다.

둘째, 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마음, 삶에는 무언가 더 큰 의미가 있으리라는 기대 말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어느 날 딱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셋째 아무런 ‘생각 없이 뛰어들어야’ 한다. 지금이 그때인가? 이렇게 하면 나에게 이득이 될까 등등의 계산을 하고 분별하고 비교해선 안된다. 그러다간 다 놓쳐버린다.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올인하며 뛰어들어야 한다. 앨리스가 토끼굴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앨리스는 아직은 성격이 말랑말랑한 7살 소녀이고 호기심으로 충만해있으니 이런 요건을 제대로 갖추었다 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보다 나이가 많은 성인들은 자의라기보다는 거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서 그런 굴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 팀버튼 감독이 디즈니와 함께 제작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의 스틸컷.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읽히고 리메이크되는 고전이다. 미국의 도엔 선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선으로 풀어낸 〈원더랜드〉 를 쓰기도 했다.
굴의 메타포
‘굴’의 메타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하다. 굴은 우리가 맨 정신일 때 그렇게도 피하려고 했던 어둠의 세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혼돈의 세계이다. 앞뒤도 없고 상하도 없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가치관과 세계관이 전혀 들어맞지 않고 박살나는 순간이다. 평소에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깔끔한 성격이라면 이 굴속에서의 당혹감과 실패감이 매우 크다. 굴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군신화에 보면 웅녀는 굴속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을 계속 먹고 나서 환골탈태하여 여인이 되고 단군을 낳을 수 있었다. 불교에서도 많은 훌륭한 수행자들이 굴에서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거듭났다. 원효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도중 토굴 속 버려진 해골에 쌓인 물을 마시고 난 후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 발길을 신라로 돌린다.

밀라레빠(위대한 수행자로 추앙받는 티베트 불교의 성자)는 복수를 위해 흑마술을 배웠다. 이 기간이 바로 밀라레빠가 어둠의 굴속에 갖혀버린 때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 후에 밀라레빠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열심히 수행하여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수행자가 된다. 그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히말라야의 석굴에서 면포 1장만 걸치고 수행을 하곤 했다.

앨리스 역시 굴속으로 떨어진 후 너무나 이상하고, 너무나 이해할 수 없고, 너무나 앞뒤가 바뀐 상황들을 계속 겪으며 조금씩 자신이 가졌던 고정관념을 떨구어 나간다.

고정관념을 버리는 여정
수없이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앨리스는 이곳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당면문제를 해결하려 애쓸 뿐이다. 그렇게 자신이 누구라는 비교적 탄탄하고 정리되고 고상한 자아관념을 가지고 있던 앨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몸(작은 자아)이 되기도 하고 다음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거인(큰 자아)이 되어보기도 하며 자아관념의 무용성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징그럽다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애벌레가 ‘너는 누구냐?’고 물어보았을 때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애벌레: 너는 누구야? (Who are YOU?)
앨리스: 대화의 시작으로 별로 고무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그저 지금은 적어도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는 제가 누군지 알았었거든요. 하지만 그 이후 저는 여러 번 변했어요.

이렇게 이성을 되찾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분별하려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돌아간 시점이 우리가 만물을 새로운 시점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그리 되었을 때 다음의 대화처럼 기준점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게 된다.

애벌레: (버섯의) 한쪽을 먹으면 네가 커지고, 다른 쪽을 먹으면 네가 작아진단다.
앨리스는 생각한다. 무엇의 한쪽이지? 무엇의 다른 쪽이라는 거지?
앨리스는 한쪽과 다른 쪽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버섯을 본다. 그런데 버섯은 (보름달처럼) 둥글었다.

제52칙 ‘애벌레의 조언’
둥근 원형의 물체에서 어떻게 이쪽과 저쪽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기준점을 설정할 수가 없는 역설적 상황이다. 처음부터 기준점도 없고 이쪽저쪽의 구분이 불가능한 상황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구분과 분별과 편 가르기를 해왔을까?

미국 뉴욕주에 소재한 선산승원의 루리 선사는 이 대사를 이용하여 그의 52번째 공안 ‘애벌레의 조언’을 만들었다. 그가 이 공안의 가르침을 압축한 시는 다음과 같다.

Rather than free the body,
free the mind.
When the mind is at peace,
the body is at peace.
When body and mind are both set free,
The Way is clear and undisguised.
몸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라
마음이 평화로우면 몸이 평화롭다.
몸과 마음이 모두 자유로울 때
도는 분명히 절로 보이게 되리라.

아마도 3조 승찬 스님이 말했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가 바로 이런 경지를 일컫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바로 경이의 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선으로 풀어낸 〈원더랜드〉 저자 도엔 선사는 여기서 묻는다. “우리는 당면 문제에 대한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선선히 인정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경이와 불확실의 상태에 살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 알기를 원하고, 그리고 상황에 맞게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이어 선사는 조언한다. “내가 원더랜드라고 부를 저쪽 언덕으로 갔을 때 우리는 ‘한마음(One Mind)’을 체험한다. 한마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을 지워버릴 때 체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떨어져나가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저쪽 언덕인 ‘원더랜드’에 서서 한마음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쪽 언덕이 즉 이 세상이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경이의 나라임을 알게 된다. 피안 즉 저쪽 언덕이란 공간적으로 우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피안 즉 ‘원더랜드’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앨리스는 운 좋게도 토끼굴에 떨어지는 행운을 만나 그 사실을 체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굴속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불운이 아니라 행운이며, 최악의 상황은 최대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비이원성의 체험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역설이 자주 나온다.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여래는 세계를 세계가 아니라고 설하나니 그 이름이 세계라

두 번째 문장을 틱낫한 스님 스타일로 풀면 이렇게 된다. “세계는 세계가 아닌 모든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틱낫한 스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꽃은 꽃이 아닌 모든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꽃 속에는 하늘과 바람과 햇빛과 정원사가 있다. 꽃 속에는 이미 퇴비가 있다”고 말하며 불이(不異)의 가르침을 쉽게 펴고 있다.

도엔 선사는 선 수행을 이원성의 섬을 떠나기 위해 밧줄을 풀고 출항하는 것에 비유했다. 공안, 좌선, 스승의 지도와 주장자가 날아드는 것은 모두 이원성을 떠나 한마음을 체험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리 할 때 온 세상이 그리고 삶의 매 순간이 음악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음악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음악을 꺼버리고는 그 음악에 대해 생각한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 아닌가!

▲ 진우기/ 지엘통번역센터 원장
춤을 생각지 말고 춤을 추라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장미꽃이 퇴비와 다르지 않음을 진실로 이해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을 추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곳곳에 다음과 같은 ‘바닷가재 카드리유’가 여러 번 등장한다. 조금씩 수사구를 바꾸어 등장하지만 결국 요점은 ‘함께 춤을 추어요’인 것이다.

자, 오늘 하루도 11월의 바람과 춤추고, 정시에 오지않는 지하철과 춤을 추고, 내 작업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 상사와 함께 춤을 추어 보자.

출래 말래, 출래 말래, 춤을 출래?
출래 말래, 출래 말래, 춤추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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