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회향게(回向偈)

향을 피우고 꽃을 꺾어 장식하면

도량이 맑고 거룩해져

우리 몸의 법당도 한층 더

신성하게 된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행원례(行願禮)란 우리의 일상생활을 토대로 하여 그 위에 수행(修行)의 스케줄을 짜 본 것이다. 이 수행생활의 일과를 짜는데 있어 어디에다 주안점을 두었느냐 하면 우리는 다들 집을 지니고 살고 있으며, 또 수행하는 사람들은 법당을 중심으로 도량에서 생활하는데, 집이라거나 법당이라는 것이 이를테면 자기의 몸이며, 다시 말하여 자기의 몸이 우리에게는 가장 가깝고 큰 법당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바로 자기 몸에 담겨 있는 부처가 가장 알찬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몸의 법당이거나 그 법당 안의 부처이거나, 우리 다솔사(多率寺) 수덕전(手德殿)에 모셔 놓은 부처님이거나, 또 제가끔의 우리들 가정 생활하는 집이거나 다 한결같이 우리에게는 신성하고 경건한 터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신성한대로 지켜 나가려면 날마다 깨끗이 소제를 해야 한다.

거미줄을 걷어 내고 마당엔 잡초 하나 없이 뽑아 버리고, 먼지를 털고, 닦고 하여 환하게 만들고 또 집안에 물건 하나라도 놓을 곳에 놓이고, 걸릴 곳에 걸리고, 또한 자기의 몸에 지닐 것은 제 자리에 붙어 있어야 된다. 그래서 혹 옷고름이 풀렸거나, 차림새가 단정치 못하고, 또는 여자의 치마끈이 느슨히 풀어졌거나 한다면 이런 것은 그 집, 속이 소홀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집을, 몸의 법당을 알뜰히 청소하고 물을 뿌린 다음에는 우리는 이것이 더 맑게 보이기 위해 향을 피운다. 향을 피우고 꽃을 꺾어다가 장식하고 그러면 이 도량이 맑고 거룩해져 우리의 몸의 법당도 한층 더 신성하게 된다. 사람이 사는 데는 내왕이 있게 마련이며, 이제는 어떠한 거룩한 어른이라도 맞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모셔 올 수 있고 우리들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조상들은 늘 우리의 몸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들을 역시 모셔야 한다. 우리의 집으로 어떤 성인이 오건 찾아온 때에는 그분들께 성의껏 대접하고 이분들과 사람 살아나가는 일을 수희(隨喜)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이를테면 행원례라는 것인데 우리는 큰 비원을 세워 행동을 통해 이를 나날이 이룩해 나간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려운 일도 있겠지마는 우리는 차라리 가장 가깝고 또 가장 쉬운 일을 먼저 택해서 한다. 일이 어려워서는 되지 않고 곤란한 것은 되도록 이를 피하고, 평탄한 길에서 아주 쉬운 얘기를 가장 거룩하게 실행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염불 생활을 한다. 염불이란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일인가.

그리고 수행(修行)하는 사람은 모든 행동을 삼가고 몸을 닦아야 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계행(戒行)이라고 한다. 계행은 보통 오계(五戒)나 십계(十戒)로 일컫는다. 이는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제가끔 부여된 계통에 따라 조목이 세워진다.

몸으로 범하는 것은 첫째 살생(殺生)하는 것, 또 손이나 발로 도둑질 하는 것, 그리고 또 음탕한 짓을 일삼는 것 등이 있다. 입으로는 거짓부렁하고, 비단 말 하고, 두 혀를 놀리고, 험상궂은 악구(惡口)하고 그러는 것이 대개 네 가지 계율에 든다.

또한 뜻으로는 탐욕을 부리거나 버럭 버럭 성을 내거나 얼빠진 생각을 내어 남을 불신하거나, 의심하거나, 아만심을 가지거나, 이렇듯 탐진치(貪瞋癡)에 빠진다. 뜻으로 셋, 입으로 넷, 몸으로 셋을 합쳐서 열 가지의 계율, 즉 십계라고 한다. 다시 말하여 살(殺), 도(盜), 음(?), 망(妄), 주(酒), 기어(綺語), 망어(妄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탐(貪), 진(瞋), 치(癡), 등이다.

그밖에 범망경(梵網經) 같은 데서는 마흔 여덟 가지의 계율 즉 사십팔계(四十八戒)를 설정한 것이 있다. 요즘 비구(比丘)의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와 또 오백계라고도 하지만 실상은 삼십 팔계인데 그런 것도 있다. 이렇듯 계율(戒律)의 조문이 많은 수에 이르러 엄격하게 계(戒)와 율(律)을 분간하게 되어 있다. 계는 선악(善惡)의 윤리성에서 추출되는 우리의 행동의 규제이며, 율은 비나야(Vinaya)라는 것으로 원래 인도에서 그 사회의 풍속, 관습 등에 맞도록 단체적 행동에 규칙을 세워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는 기후가 더우므로 습기를 피해 가사(袈裟), 보자기 같은 것을 둘러써야 되는 것이지만 우리 한국 같은 겨울에 추운 지방에서는 이런 보자기나 가사만으로는 못 견디는 것이다.

핫옷에는 그 위에 핫두루마기를 업어야 되고 시베리아나 만주 등지는 이를 것도 없고, 함경북도만 해도 모피(毛皮)등속을 옷에 대고 배자도 해 입고 그런다. 최근 태국의 유명한 승려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지만, 맨발에다 옷은 가사 하나만으로 다른 것 입지도 않아 계율 지키느라고 벌벌 떨다가 돌아갔는데 이러다가는 병이 나기 쉬운 것이다. 그 분들은 그런 것을 계율이라고 아는 모양이나 우리가 만일 이것을 지키려다가는 큰 사고에 봉착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방의 풍토에 맞는 규칙을 정해 놓은 비나야, 즉 육과 인간 본래의 윤리성을 설명한 규제인 계와는 우리가 완전히 분리하여 각기 별도로 연구할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철저히 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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