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 김시습의 〈금오신화〉

정치에 실망한 매월당 김시습
산에 칩거하며 ‘금오신화’ 집필
儒·佛 만남의 세계관 보여줘
日 에도시대 유행한 ‘한류 원조’
“시대 맞게 새롭게 창작되길 기대”

▲ 매월당 김시습(1435 ~ 1493)의 진영. 그는 31세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창작했다.
시대와 불화했던 천재 김시습
‘시대와 불화’란 천재의 숙명인가, 이 땅의 모순인가. 단군 이래 수많은 천재들이 있었지만, 천재들은 대개 불행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인정하기보다 이를 무시하거나 매도하기에 골몰하고, 집단은 학연, 지연, 당파에 얽매여 적으로 공격하고, 위정자들은 이를 키워주기보다 불온한 것으로 간주하여 탄압하고, 시대는 너무나 앞선 재주와 능력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흘러갔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처럼 불행한 천재도 없다. 그의 가문 자체가 비극을 안고 있었다. 그는 신라의 왕족 김주원(周元)의 후손이다. 김주원은 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알천의 물이 넘쳐 건너지 못하자 이 틈을 노려 상대등 김경신이 원성왕에 올라 김주원과 그 후손을 탄압한다.

그 후 원성왕계가 소성왕, 헌덕왕, 흥덕왕, 애장왕, 민애왕, 신무왕, 헌안왕, 희강왕 등 8대에 걸쳐 왕위를 장악한 반면, 주원계는 단 한명도 왕위를 되찾지 못한 채, 그 아래서 벼슬살이를 하거나 원성왕계와 맞서다가 죽음을 당한다. 그 와중에 그 후손인 김흔은 신라 5교 9산 가운데 성주산파를 개창한다. 설잠(雪岑) 김시습의 반골, 방외인(方外人)으로서 숙명과 불교와 인연은 가문의 유전자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지하듯, 세종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인정하고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비단을 하사하며 5세라는 별호를 주었다. 그는 이미 5세 때에 왕도 놀랄 정도의 한시를 짓고 〈중용〉과 〈대학〉을 배웠으며, 13세에 〈맹자〉·〈시경〉·〈서경〉을 배우고 이해했다. 하지만, 21세 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자 보던 책들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하였다.

그 후 그는 전국을 돌며 수많은 시를 남겼다. 31세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창작하였다.

최초의 한국 소설, 금오신화
〈수이전〉 과  〈태평한화(太平閑話)〉를 효시로 삼자는 주장도 있지만,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어느 정도 소설의 꼴을 갖춘 것은 〈금오신화〉이니, 이를 한국 최초의 소설로 규정해도 크게 이의가 없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 다섯 편의 서사가 수록돼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에도시대에 유통되며 조선간본(朝鮮刊本, 1549년)에서 오스카(大塚本, 188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판본으로 발행되었으며, 일본의 소설 〈도키보오코(伽婢子)〉나 〈죠루리모노가타리(淨琉璃物語)〉에도 번안이 되거나 영향을 미쳤다. 최남선이 오스카본을 일본에서 다시 가져와서 〈계명(啓明)〉 19호에 게재하면서 알려졌다. 명나라 구우(瞿佑, 1341-1427)의 〈전등신화〉의 형식을 모방하였지만, 내용은 독창적이다.

필자는 전등신화에서 서사의 대강을 시사 받은 후 자신의 선조인 김흔과 관련이 있는 조신(調信)의 설화, 우리나라의 수많은 인귀교환(人鬼交歡) 설화, 당대의 정치현실과 사건, 자신의 삶과 처지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재질서하여 시간을 넘나들며 조선의 공간에 형상화하여 창작하였으리라 추정한다.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자 말라고 하였다. 이의 영향으로 〈전등신화〉는 금서로 지목되었고, 한국에서는 이런 분류의 책들을 석실에 숨겨야 했다. 반면에 일본과 베트남에서는 괴력난신보다 작품의 교훈성에 초점을 맞추어 허용하였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유행하여 일본판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온 인생유전의 근인이다.

‘심유천불(心儒踐佛)’이나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할 정도로 김시습의 사상에 유교와 불교가 융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정도(正道)인 유교 안에서 사도(邪道)인 불교를 포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신귀설(神鬼說)’, ‘태극설(太極說)’, ‘천형(天形)’ 등의 글에서 불교와 도교의 신비론을 비판하면서 적극적인 현실론을 폈다. 〈금오신화〉 또한 패도정치를 종식시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그의 이상과 유교적 합리주의가 강하게 반영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고전을 불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업의 원리를 보다 ‘만복사저포기’
우선 〈만복사저포기〉를 보자. 양생(梁生)은 일찍 부모를 잃고 결혼도 못한 채 만복사 동쪽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는데, 고독한 심사를 읊는 시를 읊자, 공중에서 “그대가 참으로 아름다운 짝을 얻고 싶다면 어찌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걱정하느냐?”라는 말이 들린다. 이에 그는 나무로 된 주사위인 저포를 가지고 불전에 나아가 “제가 오늘 부처님을 모시고 저포놀이를 하여 볼까 합니다. 만약 제가 지면 법연(法筵)을 차려서 부처님께 갚아 드리겠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지시면 아름다운 여인을 얻어서 제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저포를 던져 이긴다.

그 후 어여쁜 아가씨가 불전으로 와서 배필을 얻게 해달라고 축원한다. 그 처녀는 왜구의 침략으로 부모와 친척을 모두 잃었음은 물론, 자신도 절개를 지키려다 죽은 여성이다. 다음 날 개녕동에 있는 처녀의 집에 가서 3일을 함께 지내고 이별한다. 그 이튿날 처녀의 부모를 만나 보련사에서 장례를 치른다.

장례를 치른 뒤에도 양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밭과 집을 모두 팔아 사흘 저녁이나 잇따라 천도재를 올렸더니, 여인이 공중에서 “저는 당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도 이제 다시 정업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십시오”라고 말한다. 양생은 그 뒤에 장가를 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었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몽 설화와 내용이 유사한 점이 많다. 세달사의 승려 조신은 당시 태수였던 김흔의 딸인 김랑과 인연을 맺어달라고 관음전 앞에서 빌어 김랑과 부부가 된다. 그 후 아이까지 낳으며 행복하게 살다가 말년에 가난하게 되어 굶주려 죽은 아이를 묻은 후 서로 이별하며 피눈물을 흘리다 보니, 꿈이었다.

두 이야기가 공통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행은 무상한 것이며, 사람의 삶은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업의 원리에 따라 구성된다는 것. 〈금오신화〉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팔정도에 따라 정업을 짓고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 깨우쳐야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른다는.

선업이 맺은 인연 ‘이생규장전’ 
송도에 사는 이생(李生)은 최 씨 처녀를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져 밤마다 그 집의 담을 넘어 처녀와 몰래 사랑을 나누었다. 이생의 부모가 뒤늦게 이를 알고 이생을 울주로 보내버려 서로 애를 태우다가 상사병에 걸린 최씨 처녀의 노력 끝에 양가 부모의 허락을 얻어 혼인하고 이생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여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피난을 가다가 최 씨는 겁탈하려는 도적에 항거하다 죽고 이생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최 씨의 집에서 이생과 최 씨는 재회하여 수 년 동안 오직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그 뒤 환생의 기한이 차서 최 씨는 사라지고, 이생은 처녀의 뼈를 찾아 묻어준 이후 병을 얻어서 죽는다.

줄거리만 보면 불교와 연관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다시 헤어짐을 슬퍼하는 이생에게 최씨는 말한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다면서,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잠시라도 시름을 풀게 해주었었지요. 그러나 제가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죽은 후에도 다시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생에서도 아무런 죄를 지지 않은 채 선업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두 사람이 맺어진 것도, 최씨가 죽은 후에 다시 재회한 것도, 최씨가 아예 저승세계로 떠났다 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선업에 따라 맺어진 인연이다. 그러니, 이생은 이승에서의 재회를 확신하며 최씨의 뼈를 찾아 묻어준 후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을 세간, 비현실을 출세간으로 보면, 이 작품을 세간에서 고통을 끊고 행복을 누리다가 최 씨가 죽자 /
출세간에서 다시 그런 삶을 살다가, 이어서 출출세간으로 나아가서 영원한 열반의 삶을 누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포기와 실존의 변증법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는 역설이 가능하다.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다시 출출세간으로 이행하게 하는 동력은 바로 사랑의 보살행이다. 이런 해석은 〈금오신화〉에 실린 다른 소설에서도 가능하다.

불교의 유교적 수용 ‘남염부주지’
‘남염부주지’는 박생(朴生)이라는 선비가 염부주(炎浮洲)에 가서 염왕과 담론을 벌이는 내용이다. 염왕은 그의 지혜에 탄복하여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위문(禪位文)을 썼는데, 그 후 꿈에서 깬 박생은 얼마 뒤 병이 든 뒤 죽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려던 날 저녁에 이웃집 사람의 꿈에 어떤 신인이 나타나서 “네 이웃집 아무개가 장차 염라대왕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알레고리로 읽으면, 세조의 패도정치와 김시습이 방외인으로 사는 삶은 박생이 박생이 뛰어나고 올곧은 선비임에도 연이은 낙방으로 앙앙불락(怏怏不樂)한 삶을 사는 현실과 통한다. 여기서 염왕은 천리를 따르는 지도자이며, 염부주는 왕도정치의 이상이 구현되는 곳이다.

전체 내용은 패도정치를 종식하고 왕도정치의 구현하자는 것이고, 담론 내내 유교적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귀신, 천국과 지옥, 특히 기복적 불교를 비판한다. 박생의 질문에 염왕은 “부처님은 청정(淸淨)하다는 뜻이고, 임금은 존엄하다는 칭호입니다. 어찌 청정한 신이 인간 세상의 공양을 받고, 존엄한 임금이 죄인의 뇌물을 받으며, 저승의 귀신이 인간 세사이의 형벌을 용서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이어 박생이 윤회에 대해 묻자, “정령이 흩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윤회가 있을 듯하지만, 오래 되면 흩어져 소멸되지요”라고 답한다. 유학관에 따르면 귀신과 윤회설을 부정해야 한다. 불교를 따르면 열반에 이르지 않는 자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김시습은 이 대립을 정령의 흩어짐과 아님으로 해결한다. 곧, 정령이 흩어지기 전에는 윤회를 되풀이하지만, 정령이 흩어지면 혼과 백, 육체가 모두 사라졌으므로 윤회가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 이도흠 한양대 교수
이처럼 〈금오신화〉는 유교의 합리주의의 틀 안에서 불교를 원융(圓融)한 15세기의 판타지 소설이다. 츠베탕 토도로프는 판타지를 ‘망설임’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하였다. 현실과 비현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망설이며, 자아가 어떻게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고 있는가를 해석하면서 유교와 불교 사이를 오고 가다 보면 많은 깨달음이 따르리라.

최근에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 붐을 타고 극 중에 주인공인 천송이(전지현 분)가 〈구운몽〉을 읽고 있는 장면을 계기로 중국에서 이 소설이 인기라 한다. 일본의 에도시대에 많은 대중을 사로잡았던 〈금오신화〉가 다시 동아시아에서 사랑을 받기를. 현실성이 부족하고 자아와 세계의 대결 양상이 치열하지 못한 점 등 한계를 보완한 새로운 작품들이 디지털 시대에 맞게 새롭게, 다양한 방식으로 창작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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