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18〉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

연화문에 아미타불 종자인 ‘흐리’字
연꽃묶음 정물화처럼 현대적 우아미
쌍학문, 문관관복의 흉배문을 연상
수달, 기둥타고 물고기 물고 내려와

천정에 두루 나타나는 문양을 결집했다. 연화, 모란, 선학, 범자문양이 저마다 아름답다. 연화는 꽃다발 묶음이라 독특하다. 내소사, 미황사, 대원사 등에서 비슷한 문양이 나타난다.

아미타후불탱중 대표적인 명작
박물관마다 저마다의 대표적 명품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적인 명품은 다빈치의 〈모나리자〉이고, 우피치미술관의 명품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며,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의 명품은 〈반가사유상〉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나라 사찰의 여러 아미타후불탱중 대표적인 명작을 들라면 단연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후불벽에 걸려있는 아미타후불탱이 손꼽힐 것이다. 성보문화재연구원이 20여년에 걸쳐 전국사찰의 불화조사를 완료하여 〈한국의 불화〉 40권을 펴낸 후, 그 후속작업의 일환으로 2007년에 발행한 〈한국의 불화 명품선집〉에서도 아미타후불탱의 대표명작으로 천은사 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을 수록하고 있다. 산은 지리산이요, 고려 13세기 ‘남방제일선원’은 천은사이고, 천은사의 명품은 아미타후불탱이다. 극락보전에 희유의 명작이 보장되어 있으니 천정장엄도 그에 걸맞게 두루 구색을 갖추었다.

〈천은사 법당 상량문〉 목판기록에 따르면 극락보전은 1774년 혜암선사가 남원부사의 도움을 받아 2년여에 걸쳐 중건한 18세기 건물이다. 아미타후불탱은 극락보전 중건을 완료한 무렵인 1776년에 금어 신암스님 등 13명의 화승이 그려 봉안하였다. 후불탱의 최상단은 범자 아홉자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팔대보살과 사천왕, 아라한이 둘러서있고, 하단에는 사리불이 법을 구하고 있는 도상이다. 불보살과 사천왕상에 방제를 마련해서 존명을 낱낱이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팔대보살은 밀교경전인 〈8대보살만다라경〉 등에서 근거하는 바, 천정에 8엽연화문을 장엄하고, 우물반자에 밀교적 범자종자불(梵字種字佛)을 새긴 것은 내부장엄의 일관된 상응으로 보여진다. 중앙천정에 8엽연화문의 한 가운데에 아미타불의 범자종자인 ‘흐리’字가 나타나는 까닭이다. 그것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팔대보살이 둘러서있는 팔대보살도를 고도로 압축시킨 기호상징일 터이다.

극락보전 천정장엄과 닫집.
불전­불상­후불탱­범자체계 연구절실
사찰장엄에서 범자장엄이 나타나고 있는 나라는 티벳과 우리나라뿐이고, 직지사 대웅전이나 무위사 극락보전, 미황사 대웅보전, 봉정사 대웅전 등의 천정에서 천정전면, 혹은 중심부에 집중적으로 범자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주 중대한 상징체계일 것인데 고대범자에 대한 연구가 미약해서 상징전모를 알기에는 역부족이다. 불전-불상-후불탱-천정장엄 범자체계가 전란 등으로 혼란한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긴밀한 체계로 서로 상응하며 배치되어졌을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이를테면 무위사 극락보전 천정에서 흐리字와 육자대명왕진언이 나타나는 바, 그 범자종자불은 아미타불과 협시불인 관음보살에 각각 상응해서 불전-불상-후불벽화-천정장엄이 일관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소사, 미황사, 대원사 천정과 닮아
천은사 극락보전 천정은 문양의 섬세함과 뛰어난 구도처리, 탁월한 색감처리로 하나하나가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전체적 장엄문양은 서남해안지역의 내소사 대웅보전과 미황사 대웅보전, 대원사 극락전 등의 천정장엄과 닮은 데가 있다. 주요 문양이 연화문과 모란문, 선학(쌍학), 범자문으로 그 모티브가 동일하다. 극락보전 천정(天井)은 연꽃, 모란, 쌍학, 범자의 깊은 우물이다. 천은사 극락보전 천정에서는 연꽃 조형이 특히 관상학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연꽃은 연잎줄기와 함께 묶음 다발로 표현해서 이채롭다. 이같은 연꽃 묶음 양식의 표현은 통도사 응진전 빗반자에 벽화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드문 사례다. 연꽃 묶음은 정물화처럼 매우 우아하며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묻어난다. 흰색의 초빛을 입히고 붉은 색으로 바림한 꽃잎이 옹기종기 모여 너울대는 듯 해서 어둠 너머의 촛불을 연상시킨다. 동여 맨 묶음에서 어딘가에 꽃을 올리는 마음의 의지가 엿보인다. 일종의 꽃다발이다. 그것은 부처님 전에 세세생생 마르지 않는 꽃을 헌화하는 꽃공양의 표징이다. 꽃묶음에서 마음의 순결함과 기쁨의 신심이 흐른다.

모란꽃은 씨방부분의 묘사가 눈길을 끈다. 모란이 활짝 피어 씨방부분이 노출되었는데 그 세부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쏟은 흔적이 엿보인다. 꽃 봉오리는 세 송이로 단순하지만, 크고 작음의 입체적 대소와 개화상태가 저마다 다른 시간적 차별성이 동시에 조화롭게 표현되었다. 꽃잎은 해안가의 코흐곡선처럼 율동적인 곡선으로 사실감있게 훌륭하게 처리했고, 붉은 꽃잎의 그라데이션이 곡선의 율동과 함께 부드러움을 이끈다. 검은 바탕에 초록의 잎, 붉은 꽃잎이 색채의 선연함으로 부각되지만 실상은 다정하고 맑운 기운이 앞서 감지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중도의 색채운영 능력 덕분이다. 모란의 채색기법은 내소사, 미황사 대웅전에서 보이는 기법과 아주 유사하다. 특히 미황사 대웅보전 천정장엄과는 우물반자에 내접하는 몽글몽글한 원형의 소란반자 틀까지도 흡사해서 시선을 끈다. 은해사 괘불과 산청 율곡사 괘불에서는 이같은 모란의 꽃다지들이 우화의 상서를 이루기도 하고, 진주 청곡사 괘불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의습에 세심하게 베풀어져 나타나기도 한다.

아미타후불탱의 대표적인 명작 천은사 아미타후불탱 부분.
쌍학의 날개짓 태극구도의 美
천정장엄에 나타나는 선학(仙鶴)의 아름다운 율동에도 눈길이 오래 머문다. 선학은 단학과 쌍학의 형식이 동시에 나타난다. 날개를 편 선학의 형상은 초승달 모양 판박이로 우아하다. 흔히들 불로초라 부르는 영적인 꽃가지를 입에 물고 신령한 기운이 불꽃처럼 뻗치는 보주를 취하고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연상케 하는 보주가 원의 중심처럼 조형구도의 중심을 이룬다. 쌍학의 우아한 날개짓과 어울려 태극 구도의 조화로움이 빼어나다. 작고 단순한 조형세계임에도 부드러우며 완벽한 원융의 아름다움이 우러나온다. 조형은 쌍학의 날개가 만드는 타원의 장축이 비스듬하게 뻗은 사선을 중심으로 대칭적이다. 사선의 중심축은 벌써 대칭의 엄격함을 일정하게 와해시킨다.

서양의 엄격한 유클리드적 대칭이 아니라, 비대칭적 요소로 약간 흐트러진, 따라서 숨 돌리고 긴장을 풀 수 있는 비유클리드적 특이성을 몸에 익은 자연스러움으로 구사했다. 지구본의 축처럼 살짝 기운 중심축이 수직이나 수평의 경직감을 완화시키고 운동의 자생력을 불어넣고 있다. 게다가 몇 되지 않는 선으로 대상을 훌륭하게 소묘한 능력과 더 이상 조금도 손 댈 수 없는 구도 운용능력, 생명력이 흐르는 색채 조합능력까지 두루 탄복할만 하다. 쌍학문양은 당상관 이상 문관의 관복에 장식하던 흉배문양과도 영락없다. 당대의 인문적 소양은 조선사회의 정치, 문화, 종교를 넘나들며 재해석되고 응용 되었을 것이다.

사방포벽 위 장여에 장엄된 범자와 법당기둥을 타고 내려오는 수달형상.
범자, 지물의 삼매야형 대신한 종자불
케네스 클라크는 〈명작이란 무엇인가?〉에서 명작은 두가지 특질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하나의 생각을 형성하는 기억과 감정의 일치이고, 둘째는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를 표현하되 과거의 전통양식을 재탄생시키는 힘을 지니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보면 한국의 전통사찰은 하나하나가 명작이다. 특히 절집천정은 적어도 이삼백년 동안 적은 빛의 세계에서 시선의 중심에서 벗어나 고요히 전승해온 은밀하고 위대한 명작이다. 동시에 성스러운 뜻이 함장된 적멸의 공간이다.

숱한 불보살과 아라한, 진리의 말씀을 대지의 초목처럼 심어 두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인간의 언어를 기호(sign)로 파악하고, 기호를 기표(記標)와 기의(記意)의 결합체라 설명했다.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은 기호의 외형이고, 기의(시니피에: signifie)는 기호 내부에 담긴 의미이다. 예를 들어 卍자는 ‘만’의 기표이지만, 기의는 석가모니불의 법계다. 숭고하고 위대한 명작인 사찰천정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성스러운 조형기호는 범자다. 사찰천정은 대체로 범자종자불의 밭이자, 거대한 만다라다. 종자자를 천정에 장엄한 것은 꽃을 피우려 대지에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칸칸이 불보살의 세계이고, 진리 법의 당처다. 불보살께서 갖추시는 지물, 수결 등의 삼매야형의 표현 대신 문자기호를 장엄한 것이다.

천은사 극락보전은 후불탱 상단과 천정, 내4출목의 장여 등 곳곳이 범자세계다. 사방 벽면공포 칸칸의 장여에는 신령의 기운이 초록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검은 바탕의 원이 나오고, 그 안에 문자불, 혹은 진언을 베풀었다. 질서정연한 사방 공포벽면의 범자조형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천정 곳곳은 8엽 주화문 한가운데 범자가 심어진 종자불의 심인처다. ‘옴’은 비로자나불을, ‘아흐’는 불공성취여래의 종자불이고, ‘흐리’는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바, 결국 천정은 그 자체가 거룩한 불보살의 법계다. 그 엄숙함의 자리에 수달처럼 생긴 짐승이 법당 기둥을 타고 물고기를 문 채 내려오고 있다. 그 반대편 기둥에는 용처럼 몸에 신령의 기운이 흐르는 서수가 동태를 두루 살피고 있다. 긴장을 풀고 맺는 방식에 걸림이 없다. 현대적인 건축기법인 ‘비대칭의 대칭’이 태연하다. 기호상징 너머엔 자비의 감로가 충만하고, 천은사의 옛이름이 그제서야 감로사임을 알겠다. 천은사 일주문 편액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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