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백양사 上

▲ 백양사 쌍계루
깊은 역사와 빼어난 경치

“산은 장성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이름을 백암(白巖)이라 하였으니 암석이 모두 흰 색깔이라서 그렇게 이름 하였다 한다. 석벽은 깎아지른 듯 험하고 산봉우리는 중첩하여 그 맑고 기이하며 웅장한 모습이 실로 이 지역의 명승지가 될 만하므로 신라 때의 어떤 이승(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白巖寺)라 하였다.”

 

삼봉 정도전(1337~1398)이 지은 〈백암산정토사교류기〉의 일부다. 오늘날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연원이 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절경 속의 명찰이란 백양사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듯, 백양사는 그 역사와 입지적 여건이 빼어나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왔고 가작(佳作)들을 님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백양사는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쌍계루라는 2층 누각이 주변 경치와 어울려 기묘한 풍광을 자아낸다. 그래서 백양사 관련 옛 시들의 대부분이 바로 쌍계루를 읊고 있다.

“사찰의 사면을 에워싼 산들이 모두 높고 가파르기만 해서,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에도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람을 쐴 곳이 없었기 때문에,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다 터를 정하고 누각을 세우게 되었는데, 왼쪽 시냇물 위에 걸터앉아서 오른쪽 시냇물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노라면, 누각의 그림자와 물빛이 위아래에서 서로 비춰 주는 등 실로 보기 드문 승경(勝景)을 이루고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기문 〈장성현백암사쌍계루기〉의 일부다. 이 기문에 따르면 쌍계루라는 누각의 이름은 이색이 지었다. 그리고 쌍계루 자리에 누각을 처음 지은 사람은 각엄존자(覺儼尊者 1270~1355)라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각엄존자는 고려 충정왕과 공민왕의 왕사를 지낸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스님인데 승보사찰 송광사의 16국사 중 13세 국사다. 각엄존자는 1355년에 노구를 이끌고 백암사로 와서 입적했는데 그로인해 절이 상당히 확장됐다. 그 때 지어진 것이 오늘의 쌍계루 원형인 셈이다.

 

구시금견백암승(求詩今見白巖僧)

파필침음괴미능(把筆沈吟愧未能)

청수기루명시중(淸?起樓名始重)

목옹작기가환증(牧翁作記價還增)

연광표묘모산자(烟光??暮山紫)

월영배회추수징(月影徘徊秋水澄)

구향인간번열뇌(久向人間煩熱惱)

불의하일공군등(拂衣何日共君登)

 

지금 시를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만나니

붓 잡고 생각에 잠겨도

능히 읊지 못해 부끄럽네.

청수 스님이 누각을 세우니

이름이 더욱 중후하고

목은 선생이 기문을 지으니

그 가치 도리어 빛나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흘러 돌아가니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서 시달렸거니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 보겠는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0337~ 1392)의 이 시는 오늘날까지 쌍계루 시의 ‘원조’로 전해지고 있다.《포은선생문집》제2권에 실린 〈장성백암사쌍계기제(長城白?寺雙溪寄題)〉라는 작품이다. 쌍계루 기문을 쓴 이색의 제자인 정몽주는 이 시에 누각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청수 스님의 중수와 목은 선생이 기문을 지은 것으로 누각이 번듯하게 서 있음을 칭송하고 저녁 풍경을 읊음으로 쌍계루의 가치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쌍계루 아래 정몽주의 시를 소개한 안내판에는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서 시달렸거니/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 더불어 올라 보겠는가”라는 대목을 두고 고려 말의 혼란한 시대상을 가슴 아파하며 관직을 버리고 임금과 더불어 쌍계루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여 두었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테러를 당해 죽은 정몽주이고 보면 이런 해석도 억지는 아니겠지만, 시의 흐름을 볼 때 ‘군(君)’은 임금이라기보다는 친한 벗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물론 여기서의 친한 벗이란 시를 부탁하는 백암사의 스님일 확률이 높다. 세상사에 시달리던 정몽주는 관복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되어 스님과 함께 쌍계루에 올라 노닐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언젠가 꼭 가고 싶은 절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도암(道庵)이라는 백암사 스님과 교분이 두터웠다. 경기도 양주에 별업을 두고 잇던 서거정은 그곳 출신의 승려인 도암과 50여 년이나 친분을 맺었다. 서거정은 도암 스님이 양주 흥천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백암사로 돌아갈 때 절구 5수를 써주었다. 그 중 첫 번째 시를 보자.

 

남국명람시백암(南國名藍是白庵)

루대다소간청람(樓臺多少間晴嵐)

하시혜말심사거(何時鞋襪尋師去)

명월쌍계공연담(明月雙溪共軟談)

 

남국에 가장 이름난 절이 바로 백암사라

수많은 누대 사이엔 남기가 어우러졌는데

언제나 짚신 버선 차림으로 스님을 찾아

밝은 달밤 쌍계에서 종용히 담론해볼꼬.

 

서거정 《사가시집》제45권에 〈송도암상인환백암사〉라는 재목으로 수록된 작품이다. ‘언제나 짚신 버선 차림으로 스님을 찾아 밝은 달밤 쌍계에서 종용히 담론해볼꼬’라는 대목은 곧바로 정몽주의 시를 연상시킨다. ‘짚신 버선 차림’이란 다름 아닌 관료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벗어난 자유로운 몸을 말한다. 서거정은 지금 도암 스님에게 “나도 얼른 퇴직하고 스님 계신 절에 가서 달밤에 그 유명한 쌍계루에 올라 밤새 이야기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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