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17〉 태백산 부석사 무량수전

가람경영에 화엄경 십지론 반영
자연과 교리 일체화한 거시적 안목
이중섭의 황소, 추사체 힘 느껴져
천정부재에 산조 고저장단 운률

부석사 무량수전 내부. 아미타부처께서 열주 너머의 깊이에 독존으로 계시고, 천정은 가구부재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지형과 교리체계 수용한 건축

부석사 가람은 하나의 완결된 통일성의 유기체에 가깝다. 지형과 건축, 불교교리, 신화적 서사의 맥락들이 긴밀하게 이어지고 통합되어 있다. 마치 극중 플롯의 상황에 맞게 잘 짜여진 무대장치 같다. 부석사 가람경영에서 무엇보다 탁월한 요소는 입지선정이다. 수준 높은 안목으로 지형해석을 풀어내고, 그 위에 화엄의 교리와 극락정토 구품세계를 대담하게 구현했다. 국토의 등뼈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몸을 비틀어 서남으로 아스라이 내달리는 소백산의 연봉들,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 등 첩첩산산 봉우리들을 무한히 확장된 마당의 뜨락으로 담대히 경영한 기막힌 점지다. 그것은 화엄학의 교리가 수준 높은 건축적 안목과 결합하여 적극적으로 지형해석되고 교리적 건축체계로 재해석된 결과이다.

부석사 가람경영에 구현된 불교교리는 〈60화엄경〉의 7처 8회 34품에 따른 ‘십지론(十地論)’, 혹은 〈관무량수경〉에 바탕을 둔 구품화생 극락정토사상으로 해석한다. 화엄경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이고, 무량수경 등 정토신앙은 아미타여래, 곧 무량수불의 극락정토세계다. 연화장 세계는 범종루 축선이 아스라이 이어져 소백산맥의 비로봉, 연화봉으로 향하고, 아미타여래 극락정토는 안양루 축선이 광대무변으로 뻗어나가 도솔봉에 상응해서 지형체계와 교리체계가 거시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 통찰지의 안목에 의해 소백산맥 산봉우리들의 중첩과 연속, 광대한 서사적 파노라마가 장대한 스케일로 무량수전의 텅빈 마당이 되었다. 참으로 놀랍고도 대담한 발상이다.

석단과 계단의 중첩, 반복

경사진 산지지형을 기승전결로 경영해나간 건축장치들의 조영과 배치들도 대단히 창조적이며 탁월하다. 석단과 계단의 중첩, 반복, 굴절 등을 통해 수직, 수평, 사선이동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긴장과 호흡을 조이고 푸는 율동이 아주 리드미컬하고, 시의적절하다. 계단을 오르게 하고 평지에서 숨을 돌리게 한다. 사람의 호흡과 걸음의 다리쉼을 고려한 휴머니즘의 맥락이 읽혀진다. 게다가 틈틈이 건축 프레임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공간을 열고 좁혀둔다. 프레임 너머 공간에 대한 심리적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해서 자연스러운 동선으로 유도하는 대목은 극적인 연출에 가깝다. 사람의 감정과 심리를 고양시키며 맺고 푸는 방식이 가야금 산조가락처럼 리듬을 갖추고 있어 탄복이 거듭된다.

그러다 문득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길은 온데 간데 없고 첩첩이 이어진 소백산맥의 능선들이 광대하게 펼쳐져 환희지를 연출한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길이 한껏 고양되고 종교적 신심은 한껏 부풀러진다. 예배자의 걸음을 가파른 경사길을 끌어 올리고, 추동하는 지형해석 및 응용능력이 감탄할만 하다. 자연, 종교, 건축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전지적 가람경영능력은 무량수전에서 폭발한다. 자연과 교리를 일체화한 거시적 안목에서 건축가구의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미학적 완결성을 두루 구현하고 있다. 무량수전의 뜨락은 모든 공간해석의 귀납적 귀결점으로 운영된다.

간결한 벽체에 비례의 조화로움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고려중기 건물이다. 묵직하고 두터운 중후함에서 깊은 신뢰를 갖게 한다. 일찍이 최순우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을 자문자답하면서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인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는 아름다운 문장을 헌사했다.

무량수전은 뼈대의 건축이다. 가구식 결구의 역학적 구성을 그대로 노출해서 목조건축의 구조적 아름다움이 진솔하게 드러난다. 고전주의적 가식없는 직선의 뼈대에서 윤리적인 아름다움이 빛난다. 나무의 결에는 시간의 펄이 두터이 퇴적되어 있다. 빛 바랜 황톳빛 벽체 색감은 더없이 소박하고 정겹다. 36.5도의 따스한 체온과 살아 있는 유기체의 생명이 느껴진다. 뼈대의 선에는 힘과 에너지가 흐르고, 간결한 평면의 벽체에선 비례의 조화로움이 녹아들며 고향 흙담장의 온유한 서정이 고요히 흐른다.

배흘림기둥과 창호.
배흘림, 귀솟음, 안쏠림, 안허리곡

화엄학파들은 부석사 무량수전에 화엄십찰의 종찰다운 위상으로 당대의 전통 목조건축 조영법식을 집대성하다시피 하였다. 벽체의 기둥에는 엔타르시스 기법의 배흘림 기둥이 유려하고, 네 모서리 기둥을 조금씩 높여나간 귀솟음이 날렵하며, 안쪽으로 기둥을 기울인 안쏠림 기법으로 하중에 의해 기둥이 바깥으로 퍼지는 듯한 시선의 왜곡을 교정했다. 또한 벽체평면을 안으로 약간 휘게 하는 안허리곡으로 우아한 곡선의 율동미를 살렸다. 그같은 기술들은 힘을 안전하게 다루는 경험론적 통찰지이며, 구조의 안정성과 미학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한 고급장치들이 아닐 수 없다.

무량수전은 관계의 짜임이 결집된 전통목조건축이다. 전통 목조건축의 짜임은 대동의 역학적 구조다. 내부공간은 목조건축의 물리적 구조체계와 유기적인 시스템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천정의 양식도 목재들이 그대로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기둥과 대들보, 도리, 서까래, 대공 등 내부는 다듬어진 나무들의 숲이자 연대이다. 수직과 수평, 사선이 중첩하는 중중무진의 세계다. 직선의 뼈대들이 간결하고 정연한 집합을 이루며 전기적 회로장치처럼 힘을 분산시키고 하중을 실어 나른다. 특히 내부에 일렬로 이어지는 고주(高柱)의 행렬은 고딕성당의 내부처럼 열주의 수직행렬이 공간의 엄숙함과 깊이를 자아낸다.

단지 고딕의 열주들이 이차곡선이라면 무량수전의 내부기둥은 일차직선이다. 그 기둥은 본질적으로 신성이 흐르는 생명의 나무이면서 보배나무이고 우주목이다. 왜냐하면 내부공간은 아미타여래를 친견하는 극락정토인 까닭이다. 열주들은 동시에 아미타부처께서 계신 곳으로 강한 방향성을 암시한다. 열주의 긴 흐름이 이어지는 동서방향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세로 기둥의 프레임 속에 강한 집중성과 거룩함의 깊이, 그리고 장엄함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종보, 서까래 노출된 연등천정

천정구조는 지붕의 보와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된 수평과 수직, 사선의 중첩구조다. 칸딘스키는 〈점,선,면〉에서 수평선은 차고 무한한 움직임의 가능성 중에서 가장 간결한 형태이고, 수직선은 따뜻하고 무한한 움직임의 가능성 중에서, 사선의 대각선은 차고 따뜻하며 무한한 움직임의 가능성 중에서 가장 간결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가장 간결한 선 형태가 결집되어 건축의 역학적 기능은 물론이고, 단순함의 미감과 윤리적인 검박함을 두루 선사하니 물리지 않는 눈길이 가고 또 간다. 천정부재의 길이, 굵기, 무게감에 다채로운 변화와 강약의 엑센트를 준 것이 인상적이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것이 엮이고 결구되는 모양에서 산조가락처럼 고저장단의 운률이 느껴지고, 악보에서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티시모에 이르는 강약의 흐름도 읽혀진다. 뼈대 그 자체가 하나의 콤포지션을 이루어 거대한 설치예술을 대하는 것 같은 기막힌 선들의 향연이다.

소조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
어찌보면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의 사냥그림에서 몇 개의 율동적인 선으로 산천의 명산을 표현한 조형원리도 연상되고, 이중섭의 1953~1954년 사이의 일련의 황소 그림에서 나타나는 골격의 힘도 떠오르는가 하면, 김정희선생의 말년 득의작 추사체 글씨체도 겹쳐진다. 우물천정이 채색화의 평면회화라면, 연등천정은 절제된 선의 획에 운용의 묘법을 풀어낸 서예에 비유될 것이다. 질서정연하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역학의 선들이 일반적인 천정의 평면을 훌륭히 대신하고 있는데, 그 역시 빙켈만이 말한 고전주의적 ‘고귀한 단순’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에펠탑이나 철골 구조물에서 평면이 사라진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 단순한 뼈대의 흐름에 다포를 치밀하게 짜올린 중중무진의 亞자형 닫집을 경영했다. 고주의 열(列)과 닫집에 의해 공간의 모듈은 보다 분명히 구획되었고, 거룩함의 위계는 보다 강화 되었다. 우리의 시선은 아미타부처님께 머문다. 아미타부처께선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 계신다.

〈원융국사비문〉에 이르기를 아미타불은 일승불로서 열반에 드는 일이 없고, 생멸의 윤회도 없기 때문에 협시불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거룩한 상호와 찬란한 광배에 넘치는 대체될 수 없는 숭고한 아우라가 참배객을 압도한다. 에너르기 0인 적멸의 공간에 고요한 빛이 계신다. 하루만이라도 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극락의 연꽃에 태어날 것이다. 일본 지온인 소장 〈관경16관변상도〉에서 말한다. ‘수행이 적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하지 말라. 만 개의 횃불도 지푸라기 불에서 나오는 법이니.

무량수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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