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다르마칼리지 초청강연회_김성철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

▲ 김성철 교수는 … 서울대학교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강사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티벳장경연구소장,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계간지 〈불교평론〉 편집위원장을 역임했고 한국불교학회, 불교학연구회, 인도철학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도불교의 중관학을 전공했지만 불교논리학, 티베트불교, 반야삼론학 등으로 연구의 범위를 넓혀왔으며 최근에는 진화론, 뇌과학, 윤리학, 심리학, 사회학 등 인접학문과 불교를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연·성선택에 의해 우리 몸 존재
두 원리는 우리 마음 속 번뇌와 닿아
번뇌를 끊어 열반 체득 하려면
짐승과 반대로 살아야 고통 벗어나

최근 들어 생명체의 형태는 물론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까지 진화생물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 역시 과학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면서 기존의 세계관을 수정하든지, 과학과 대립하면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님에 의해 발견된 진리로 현대과학과 방법론을 같이 한다. 김성철 교수(동국대 경주)는 11월 5일 동국대 중강당에서 불교와 자연과학의 흥미로운 만남에 대해 강연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접근하는 동시에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그의 강연을 들어본다.

불교와 진화생물학의 만남
불교를 바르고 정확하게 알고자 할 때 가장 유용한 학문은 생물학입니다. 그중에서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를 갈파한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생물학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통해 태어났지만 먹고 먹히면서 살아가다가 늙고 병들어 죽어야만 하는 모든 생명체의 고통(苦)을 관찰하신 후, 그런 고통의 원인(集)을 발견하셨으며, 그런 고통에서 벗어난 경지(滅)를 체득하셨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道)를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네가지 성 스러운 진리’란 뜻에서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 세계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괴로움’이라는 고성제,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우리 마음 속 번뇌에 있다’는 집성제, ‘그런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경지인 열반’을 의미하는 멸성제,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에 이르는 수행 방법인 팔정도’의 도성제의 네 가지 진리를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찰스 다윈이 갈파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와 목격담은 이러한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와 집성제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됩니다.

모든 생명체는 두 가지 고통에 시달립니다. 하나는 굶주림의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살해의 공포입니다. 참새든, 늑대든, 물고기든, 나비든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합니다. 굶주림의 고통입니다. 맹수의 제왕 사자도 늙고 병들면 먹이를 구하지 못해 몇날 며칠을 굶습니다. 지쳐 쓰러지면 독수리 떼가 하늘에서 맴돌고 허기진 하이에나들이 모여들어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 몸은 쪼이고 뜯깁니다.
야생에서는 나보다 강한 놈이 항상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내 몸이 그의 먹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약자일수록 사방을 기민하게 살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살해의 공포’입니다. 약한 놈은 고기가 되고, 강한 놈은 먹습니다. 최강의 포식자도 늙고 병들면 결국 먹히고 맙니다. 냉혹한 약육강식의 법칙입니다. 배고픔의 고통과 살해의 공포, 고성제의 괴로움입니다. 허기를 채우려는 욕망과 먹이를 구하기 위한 투쟁, 집성제의 번뇌들입니다. 생명의 참모습으로 찰스 다윈이 생생하게 목격한 고(苦)와 집(集)의 진리입니다.

몸, 그리고 번뇌
다윈 진화론의 장점은 실증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화 현상을 해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영국의 맨체스터 지방에 살던 흰 후추나방이 산업혁명 이후 검은 후추나방으로 진화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흰 나방이 많았으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장의 검은 연기로 인해 맨체스터 지방의 나무와 벽들이 검게 그을게 되자 눈에 잘 띄는 흰 나방은 대부분 포식자인 새들에게 잡아먹히고 검은 나방만 살아남아서 맨체스터 지방에 널리 퍼집니다.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일이며 겉보기에는 흰 나방들이 새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그 몸을 검은 색으로 변화시킨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선택을 통해서 솎아진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연선택 이론과 함께 다윈의 진화론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은 성선택(Sexual Selection) 이론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유는 나의 부모를 포함한 모든 조상들이 사춘기 이후까지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섹스와 임신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춘기 이후까지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성적으로 성숙해 2세를 낳을 능력을 갖출 때까지 ‘자연선택’에서 도태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섹스와 임신에 성공했다’는 것은, 사춘기 이후에 인간 종 내에서 벌어지는 ‘성선택’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물로서 살아갈 때, 짐승으로 살아갈 때, 몸으로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관이 있습니다. 얼굴의 중앙에 뚫린 ‘입 구멍’과 사타구니에 붙은 ‘성기’입니다. 수천, 수만, 수천만이 넘을 나의 조상들 모두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는데 성공해 사춘기 이후까지 굶어 죽지 않았고, 배우자를 만나 섹스를 통해 2세를 낳는 데 성공했기에, 그 후손인 나의 몸이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눈, 귀, 혀, 코의 감각 기관과 팔다리와 손발은 우리 몸의 주인이 아닙니다. 모두 몸의 중앙에 있는 입과 성기를 위한 보조기관일 뿐입니다.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입과 성기를 위해 종사하는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의 지휘부일 뿐입니다.
입은 식욕의 원천이고, 성기는 성욕의 뿌리입니다. 탐욕, 분노, 우치(愚癡)라는 삼독의 번뇌 가운데 동물적인 탐욕을 충족시키는 기관입니다.
나의 몸이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는, 식욕→입→자연선택으로 이어지고 성욕→성기→성선택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두 가지 길에서 나의 조상들이 모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의 조상들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강력한 식욕과 음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연선택과 성선택이라는 진화의 두 원리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 번뇌에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몸의 길’일 뿐입니다. 고, 집, 멸, 도의 사성제 가운데 ‘집(集)의 번뇌’를 갖고 ‘고(苦) 속에서’ 살아가는 고달픈 삶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멸성제의 목표와 도성제의 수행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넘어섭니다. 번뇌를 끊어서 열반을 체득하는 것. ‘입과 성기가 달린 비극적인 고기 몸’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짐승과 반대로 사는 길입니다.

윤리와 도덕에 대한 진화론의 풀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하면 대개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숙어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화의 원리에 그렇게 냉혹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포함해 생명체 중에는 다른 개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꿀벌에서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것은 여왕벌 한 마리와 몇몇 수벌들뿐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2세를 남기지 않는 암컷 일벌들입니다. 개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다란 암캐미 한 마리와 날개 달린 수개미 몇 마리를 제외한 다른 개미들은 생식에 참여하지 않는 일개미들입니다.

일벌이나 일개미의 자기희생은 자연선택이나 성선택의 적자생존 이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기에, 다윈 역시 이들의 희생적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개체의 희생으로 인해 그 친족들이 보전되고 번성할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함으로써 난제를 해결했습니다. 후대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를 친족선택(Kin Selection)이라고 불렀으며, 유전자와 연관시켜서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대표적인 인물이 이집트계 영국인 해밀턴(1936~2000)이었습니다.

친족의 경우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가 높습니다. ‘친족 간 친밀성의 정도’는 ‘유전적 유사성’에 비례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개체(Individual)의 희생으로 인해 동족이 번성한다고 해도, 자기희생을 하는 개체의 수가 너무 많으면 그 집단은 멸종합니다. 모두 앞장서서 자기희생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외부의 위협이 있을 때 아무도 자기희생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집단 역시 멸종할 것입니다. 외부의 위협을 피해서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동족군이 와해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동족 집단이 번성하려면 희생을 통한 개체의 손실보다 동족의 이득이 커야하며 동족 내에서 각 개체들의 유전적 유사성이 높아야 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행동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개체인 나를 위한 이기적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한 이타적 자기희생으로 궁극적으로는 동족의 유전자를 보전해줍니다. 인간 사회의 악은 거의 모두 전자에서 비롯되고 선은 대부분 후자에 속합니다. 탐욕,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들은 모두 개체인 나만을 보전하기 위한 감성들입니다. 반면에 많이 베풀고, 해치지 않고, 빼앗지 않으며, 속이지 않는 등의 선행은 남을 배려하는 행동들입니다. 선이나 악은 진화 과정에서 친족선택의 원리에 의해 수만 년간 솎아지면서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가치들입니다. 진화생물학적으로 풀어본 윤리와 도덕, 그리고 양심의 기원입니다.

나에게 보인 나, 남에게 비친 나
‘나’는 단일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두 가지 모습이 언제나 함께합니다. 하나는 ‘나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직접 나의 몸을 바라볼 때에는 내 손이 보이고, 내 다리가 보이고, 내 몸통이 보이지만, 내 얼굴은 보이지 않고 내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두 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깥에서 본 자동차의 모습, 그리고 자동차 안에서 본 모습이다. 전자의 관점을 객관이라 부르고 후자의 관점을 주관이라 부릅니다. 객관의 자동차는 무수하지만 주관의 자동차는 오직 하나입니다. 겉모습만 보이는 무수한 자동차 중에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화려한 것도 있고 초라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은 단 한 대뿐이기에 그 우열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생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겉모습과 행동은 각양각색이어서 서로 비교가 가능합니다. 몸이 큰 놈이 있고 작은 놈이 있으며, 행동이 느린 놈이 있고 빠른 놈이 있으며, 힘이 센 놈이 있고 약한 놈이 있습니다. 기는 놈을 제치고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습니다. 객관의 세계에서는 비교가 가능하기에 우열이 있고, 강약이 있고, 미추(美醜)가 있고, 대소(大小)가 있습니다. 객관세계의 모든 것은 이렇게 연기합니다. 진화 생물학에서 규명해 온 갖가지 형태들입니다. 마치 밖에서 본 자동차와 같이 무수히 많은 종류의 생명체가 있고 그 모습과 행동역시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주관은 하나입니다. 나에게 보이는 자동차의 외형은 여럿이지만 그 내부가 보이는 것은 내가 탄 자동차 하나뿐이듯 주관은 오직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를 오온으로 구분합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인데 단순하게 번역하면 순서대로 ‘형상, 느낌, 생각, 의지, 마음’입니다. 이는 자동차 내부에서 자동차를 보듯이 내가 나의 심신을 살펴봐서 발견한 구성요소들입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12처(處) 분류도 그렇고 이에 6식(識)을 추가한 18계(界)의 분류도 그렇습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입니다.

객관에서는 비교가 가능하기에 우열이 있습니다. 남이 생각하는 나, 남에게 비친 나는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주관은 오직 하나입니다. 객관화된 허구의 나를 지우고 주관에 충실할 때 열등감도 있을 수 없고 우월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감각과 행동 하나하나가 비교가 불가능한 절대우위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강자와 약자, 화려함과 초라함, 우월과 열등이라는 상대성을 초월해 누구나 우주의 중심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보셨던 방식이고 부처님께서 살아가셨던 방식입니다. 진화를 초월한 삶입니다. 우리모두 따라야할 절대적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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