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보문사 下

▲ 신라 선덕왕 4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보문사 석굴법당
김창협과 흡연 스님의 인연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학문적 성취가 높았던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강화 보문사와 아주 기이한 인연을 맺었다. 그의 문집 〈농암집(農巖集)〉 제6권에는 ‘보문암’이라는 제목의 시 3수가 전한다. 그 중 한 수의 제목 자리에는 긴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는데 흡연(翕然) 스님과 보문사에 얽힌 인연이야기다.

 

“지난 기미년(1679, 숙종5)에 나는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 기슭에 있었다. 하루는 백씨(伯氏)와 함께 소를 타고 보문암을 찾았는데, 마침 흡연(翕然)이라는 이름의 승이 승도 10여 명과 함께 정진회(精進會)를 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밤새도록 들리던 선송(禪誦) 소리가 마음에 들어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다. 지금 백씨를 따라 강도(江都)에 왔다가 우연히 해상(海上)의 보문암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백씨와 함께 배를 타고 찾아와 보니 흡연 대사도 마침 이곳에 있었다. 20년 만에 예기치 못한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난 데다 암자의 이름도 보문암이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대사는 보관하였던 〈전등록(傳燈錄)〉을 꺼내어 표지에 쓴 글자를 가리키며 “공의 필적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우리는 이것을 훗날 다시 만나게 될 증표로 삼았는데, 이제 과연 증험이 된 것이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보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한참 생각한 끝에 번쩍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스스로 생각건대, 나는 본디 세상에 나갈 뜻이 없고 대사는 매인 곳이 없이 인연 닿는 대로 떠도는 형편이니, 훗날 또 어디에서 해후하게 될지 모르겠다. 오늘처럼 다시 해후할 수 있을까? 감탄하던 끝에 시 한 수를 지어 간직하고 가라고 승에게 주는 바이니, 훗날 또 증험이 될지 보아야겠다.”

 

스님과 선비의 만남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읽는 이에게 신선한 맛을 준다. 이 글에 나오는 영평은 지금의 포천이다. 김창협이 청풍(지금의 제천) 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었다. 그 충격에 벼슬을 내려놓고 포천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포천은 안동 김씨 가문의 세거지였다. 그 때 형님과 백운산 보문암에서 정진회를 주도하는 흡연 스님을 만났고 그 수행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교유를 했던 것이다.

그런 인연이 20년이 지나서 강화도 보문사에서 우연히 다시 이어졌으니, 시 한 수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의 제목 자리에 그 놀라운 인연 이야기를 다 적어 두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놀라운 인연을 체험하고 쓴 김창협의 시를 보자.

 

매억기우과흡공(每憶騎牛過翕公)

야문선송백운중(夜聞禪誦白雲中)

홀경절해상봉재(忽驚絶海相逢再)

갱괴정려구호동(更怪精廬舊號同)

패섭제첨여작일(貝葉題籤如昨日)

양지재수기춘풍(楊枝在手幾春風)

잔생미복중내차(殘生未卜重來此)

병석타시당복동(甁錫他時?復東)

 

소를 타고 흡공 찾아 보문암에 갔던 기억

백운산에 독경 소리 한밤중에 울렸지.

놀라워라 먼 바다서 다시 그를 만난 지금

괴이할사 정사 또한 옛 암자와 이름 같네.

불경의 표지 글씨 예전 모습 그대론데

손에 든 버들가지 춘풍 몇 번 거쳤는가.

죽기 전에 내 다시 여기 올 수 있을까.

흡공이 이 다음에 동쪽 행여 찾아올까?

 

시를 쓰게 된 배경의 인연 이야기를 그대로 시로 그려냈다. 앞의 이야기를 읽고 시를 읽으면 그 감동이 언어의 절제를 통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경련의 ‘손에 든 버들가지 춘풍 몇 번 거쳤는가’라는 표현은 두보(杜甫)의 ‘별찬상인((別贊上人)’이라는 시에 나오는 이야기를 빌려 온 것이다. 두보의 시에 “버들가지 새벽에 손에 있더니, 가을비에 콩알이 하마 익었네(楊柳晨在手 豆子雨已熟)”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찬이라는 상인(스님)과 헤어진 뒤 여러 해가 지났음을 표현한 것이다. 김창협도 흡연 스님과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동쪽 행여 찾아올까’라는 구절은 보문사가 서쪽 바다 섬에 있으므로 육지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초탈의 세계를 그리는 마음

김창협은 흡연 스님과의 기이한 인연 이야기를 담은 시 외에 두 수의 시를 〈농암집〉 제6권에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 두 번째 시를 보자.

 

고도중명절사린(孤島重溟絶四?)

갱련암굴정무진(更憐巖窟淨無塵)

공명미허서편복(空明未許棲??)

개착혼의유귀신(開鑿渾疑有鬼神)

낭리간산시오배(浪裏看山是鼇背)

야심청범지교인(夜深聽梵只鮫人)

이내전각환구애(爾來轉覺?區隘)

원차승상노차신(願借繩牀老此身)

 

사방 이웃 하나 없는 먼 바다 외딴섬에

티끌 없이 깨끗한 바위굴이 더욱 좋네.

텅 비고 환하여서 박쥐조차 살 수 없고

바위를 파낸 솜씨 귀신의 조화로세.

바다에서 산을 보면 자라 등 모습이요

깊은 밤 범종소리 물고기만 듣는다네.

요즘 들어 인간 속세 좁게만 느껴지니

노년 보낼 허름한 침상 하나 빌렸으면.

 

부친이 정치적인 이유로 사사를 당한 후, 김창협은 벼슬을 내려놓았는데 후에 아버지가 신원 되어 여러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관직은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김창협이 보문사를 찾았을 때는 지금의 마애관음좌상이 없었다. 그러나 석굴법당은 오랜 역사를 지닌 채 전해 와 ‘바위를 파낸 솜씨 귀신의 조화로세’라고 감탄 한 것이다. 신기한 인연을 경험한 보문사에서 기묘한 석굴법당에 대한 감동까지 그의 마음은 몹시 넓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초탈의 세계를 동경하며, 속 좁은 세상일 떨치고 보문사에 침상이나 하나 빌어 살고 싶은 심경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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