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불교 유적 순례기- ③ 난주 병령사 석굴

실크로드 길목에 있던 난주
5~11세기 불교 유적의 중심
병령사 석굴이 가장 유명해

서진부터 靑까지 불사 이뤄져
183개 석굴에 776체 불상 모셔
산 정상 있는 169굴에 오르니
수많은 불보살이… 이곳이 불국토

 

병령사 석굴의 백미인 169굴의 모습. 굽타양식의 소조불입상이 가장 도드라져 보인다. 지금은 특굴로 지정돼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고 특별관람료를 내야 만나볼 수 있다.

중국 감숙성 난주는 기원전 1세기부터 천산북로를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통로였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당시 지배층은 만리장성을 옥문관까지 확대시켰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구법승과 상인들은 반드시 난주에 들려야 했다. 일종의 교통 요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한나라 멸망한 후 난주는 부족국가의 수도가 됐고, 다른 문화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감숙성 일대는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불교 연구의 중심이다. 500년에 걸친 불교의 변천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주를 대표하는 불교 유적은 바로 병령사 석굴이다. 병령사 석굴은 감숙성 용정현에서 약 40km 떨어진 소맥적산에 위치하며 현재 석굴로 가기 위해서는 보트로 약 30~40분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1961년 유가협 댐이 건설됐기 때문인데 중국 정부는 댐을 만들 때 석굴이 수몰되지 않도록 그 높이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소위 ‘모터보트’를 타고 병령사로 이어지는 뱃길은 소위 절경이다. 마치 불보살과 신선이 공존하는 이상향에 이르는 길목 같다. 기암괴석과 산 사이로 흐르는 물을 보고 있을 라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물론 배멀미가 있는 사람들은 지옥일 수 있겠다.
 

169굴에 있는 삼존불상. 이들은 모두 서진시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선착장에 내려서도 10여분 이상을 들어가야 병령사(炳靈寺) 석굴을 만날 수 있다. 원래 당나라 시대에는 용흥사(龍興寺)로 북송대에는 영암사(靈巖寺)로 불리었다. 병령사 석굴은 원원이 깊다. 처음 조성시기는 서진(西秦, 385~431)였고, 청대(靑代, 1662~1911)까지도 불사가 이어졌다. 15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동안 이어진 불심(佛心)의 흔적들이 불보살상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또한 다양한 시대의 불교 미술을 만날 수 있는 노천 박물관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병령사 석굴은 상사(上寺), 하사(下寺) 그리고 동구(洞溝) 세 곳에 분포돼 있다. 이중 석굴은 하사 대사구의 암벽 면에 집중돼 있으며, 총 184개의 석굴과 감상(龕像)이 있다. 석굴과 감에는 총776체의 불보살상이 봉안돼 있다.

벽령사 석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제171굴로, 그 높이가 27m에 이르는 대불을 만날 수 있다. 가까이에서는 대불의 면모를 제대로 볼 수 없고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로 가서야 대불의 위용을 만날 수 있다. 제171굴 대불은 731년 개착을 시작해 803년 완공됐다. 상반신은 석주를 이용해 만들고 하반신은 니소(泥塑)한 것이다. 본래 대불에는 7층 누각으로 보호각이 설치돼 있었으나 청나라 말기 전화(戰火)로 소실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71굴 대불의 특이점은 일반적으로 조성되는 가부좌 형태가 아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이서 마치 사천의 낙산대불(樂山大佛)과 흡사한 형상이다. 흥미롭게도 낙산대불 역시 713년에 개착을 시작해 병령사 대불과 같은 해인 803년에 완공됐다.

유근자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동국대 겸임교수)는 “병령사 대불은 비교적 원형이 남아 있는 낙산대불과 달리 제작 당시 세부적 조각이나 채색을 상당부분 상실해 양자의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면서 “대만 양식과 개착 연대의 유사성에서 양 대불간의 관계를 관계를 추적할 여지는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병령사 석굴이 위치한 소맥적산의 지질구조는 사암(砂巖)으로 돼 있어 석굴의 개착은 용이하나 풍화에 약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유가협에 댐이 건설되면서 형성된 습기까지 더해져 훼손은 더욱 빨라졌다.
 

높이가 27m에 이르는 171굴의 대불. 건너편 다리에 가야 위용을 확인할 수 있다.

벽령사 석굴이 만들어진 서진시대에 조성된 석굴은 169굴이다. 하지만 현재 169굴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특굴’이다. 다만 상당 금액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169굴이 공개되지만,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다. 문화재 훼손과 사친촬영을 감시하기 위해 공안이 관람 내내 따라붙는다. 순례단 중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 前 포교원장 혜총 스님과 재가 스태프 등 7명이 169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69굴로 가는 길은 그리 녹녹치 않다. 169굴 자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절벽산 위에 있기도 하거니와 조성된 나무 계단들이 매우 가파르다. 일정 구간은 천수 맥적산 석굴보다 난이도가 있었다. 약간의 고소 공포증이 있는 필자에게는 두 석굴 모두 아찔한 고행의 길이었다.

하지만 가파른 나무 계단 끝에는 장엄한 불국토가 펼쳐졌다. 벽령사 석굴의 백미(白眉)로 169굴을 꼽는지 단박에 알 수 있게 했다. 천연동굴을 이용한 이 석굴은 넓이 26.75m, 길이, 8.56m, 높이 15m이다. 이곳에 크고 작은 불상과 조성 연대를 알 수 있게 하는 기록까지 남아있다.

30여 체의 불보상이 있는 169굴은 ‘병령사’라는 이름의 연원을 알 수 있게 한다. ‘병령’은 티베트어로 ‘십만불(十萬佛)’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천불산’, ‘만불동’을 의미한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병령사 소조불입상’이다. 입상 바로 옆에는 조성 기록이 먹글씨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불상이 서진의 문소왕 걸복치반의 말년인 424년에 조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 석굴 불상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연대가 확실한 자료다. ‘병령사 소조불입상’의 양식도 제법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후덕한 느낌의 불상이 아니라 조금은 마른 듯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유근자 연구원은 “자세와 의복 및 용모에서 굽타 양식에 근원을 둔 것을 알 수 있다”면서도 “그것이 서북 인도와 비단길의 오아시스 지역들을 거치면서 변질되고 다시 중국화 되면서 굽타 양식 원형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조불입상 아래의 벽화 중 일부.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묘사했다.

명문제기에 따르면 벽화 속 불상은 무량수불이 제일 많다. 석가모니불은 모두 불좌상으로 표현돼 있다. 유마경변(維摩經變)도 많이 보이는데 유마힐지상(維摩詰之像) 등의 표기도 있다. 특히 벽화 소재 중 아육왕시왕인연(阿育王施王因緣) 같은 인연이야기가 출현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 하다. 제기에 ‘아육왕본위소아 이토시불시(阿育王本爲小兒 以土施佛時)’라 적혀 있는데, 이것은 중국 내지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인연이야기다. 사경으로 〈불설미증유경(佛說未曾有經)〉 53행이 있는데 석굴 사경 중 가장 시기가 이르다.

다시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돌아나서 길. 자꾸 169굴을 돌아보게 된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 이라는 혜능 스님의 일화가 생각났다. 종국에는 움직이는 마음조차도 없어야 한다. 처연한 불상을 보고도 그 상에 집착함은 미혹하다는 증거다. 돌아가는 배 안으로 들이치는 황소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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