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 말고 내몸체 항아리 속에서 마음이 벗어나야

▲ 그림 최주현

‘이건 불법이 아니라
삿된 마음이고 망상이기 때문에 끊어야지.’ 한다면
자기 마음 깨닫기는 영영 그른 겁니다.
사람이 참사람이 되려면
이런 데도 엎드러져 보고 저런 데도 업드러져보고
이런 데도 들어가 보고 저런데도 들어가 봐야 합니다.
 

어느 게 참 불법인지 모르겠습니다

문) 요즘은 종교도 너무 다양해지고 불교 내에서도 너무 많은 종파들이 있어서 어느 것이 참 불법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인들보다 더 흉악한 행을 하는 종교인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답) 아무리 사람이 죽고 또 나고, 떴다 가라앉았다 떴다 가라앉았다 하지마는 이 진리만은 절대로 변동을 시킬 수 없고 그대로 여여하고 그대로 부동하죠. 그러니 우리 자체가 그렇게 살림살이에 하나도 빼놓을 게 없는데도 뭐가 불법이고 뭐가 불법이 아닌 게 있겠습니까? 얕다고 불법이 아니고 또 높다고 불법이고, 더럽다고 불법이 아니고 깨끗하다고 불법이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역대의 조사들도 그렇지마는 우리 인간이 잘 파악해 본다면 ‘하나도 버릴 게 없기 때문에 하나도 쓸 게 없다.’ 하는 건 너무 많기 때문에, 짊어지고 다니는 그 사량적인 마음이 아니라 공한, 자기조차도 공한 이치를, 공심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공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저 사람이 나쁘고 내가 좋고 이러는데, 내가 만약에 공심을 안다면 아. 저렇게 나쁜 마음 쓰는 것도 바로, 내가 본 것이 인연이고 들은 것도 인연이에요. 고 순간 만남에 의해서. 그러니까 그 인연에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넓히려면 넓히고 좁히려면 좁히고. 둘로 보고 싸움을 하려면 싸움을 하고, 하나로 보고 공으로 돌린다면 그렇게 지혜가 넓을 수 없는 겁니다. 우주를 덮고도 남지요. 그러나 각각 보고 싸워진다면 그거는 이 허공에 바늘구멍 안 들어간다고 그러죠.

이 기묘하고 불가사의한, 광대무변한 이 법. 우리 이 우주 전체를 이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런 광대무변한 실상. 이 우주 전체의 실상이 될 수 있는 ‘나’가 되려면은 그것을 둘로 보고 싸우고 마음으로 증오하고 이렇게 해서는 될 수가 없고, 또 ‘이런 거는 불법이고 이런 거는 불법이 아니다.’ 하고 마음이 둘로 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내가 만약에 ‘아, 내가 바람 좀 쐬고 싶다.’ 그러면 산에 올라갈 수도 있는 거고, 내가 ‘아, 졸리니까 자겠다.’ 그럼 잘 수도 있는 거고, ‘아, 내가 오늘 이렇게 일이 바쁘니까 일을 해야지.’ 하면 일을 하는 거고,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 아주 여여하게 그대로…. 한다 안 한다, 이거는 아니다 기다, 이런 게 없이. 남이 그르다 옳다 하더라도 여여하게 넘길 수 있으면서 서서히 그냥 물이 흐를 수 있다면, 그대로 얼마나 다양한 법이겠느냐.

그러니 그 주인공 안에서 얼마나…. 안도 바깥도 없는 것이 주인공이거든요. 그러면은 그 안에서 수없이 전부, 일체 신이 나예요. 내 안에 들었으니까. ‘나’라는 데도 없기 때문에 주인공이거든요. 그러니 그 안에 다 들어 있는데 어디로 찾으러 다니느냐 이겁니다. “그러면 바깥의 거는 전부 삿된 일이 아닙니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깥의 것도 안의 것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이라고 그랬지 않느냐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바깥의 ‘나쁘다’ 이러는 것을, 이것은 나쁘니까, 이거는 선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 이건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법이 아니고, 이건 삿된 마음이고 망상이기 때문에 이건 끊어야지.’ 한다면 자기 마음 깨닫기는 영영 그른 겁니다. 사람이 참사람이 되려면 이런 데도 엎드러져 보고 저런 데도 엎드러져 보고, 이런 데도 들어가 보고 저런 데도 들어가 보고….

어떤 강도가 하나 있었는데 그거를 한번, 그것을 많이 하면은 물이 들까 봐 무섭다고 하지만 한번 잠깐 돼지 소굴에도 들어가 볼 수 있는 거죠. 돼지가 하는 습이 완전히 물들까 봐 걱정이지만, 우리가 그 도리를 안다면 돼지 소굴에 들어가서 돼지로 내가 며칠 동안을 산다 할지라도 그건 물들지 않아요. 또 강도 속에 들어가서 내가 강도가 돼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강도의 물이 들질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향기로운 그 내음이, 내음 없는 내음의 그 불빛이 너무 밝아서 그 캄캄한 강도의 마음도 녹일 수가 있더라 이겁니다. 그러면 강도가 만약에 내 집에 들어오더라도 저 강도도 바로 나인 것이다라는 것을, 육신은 나요 바로 그 마음은 내 마음이니 그 둘이 아닌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일치시켰을 때, 한마음이 됐을 때 비로소 그 강도는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 없게 되죠. 분명코 둘은 둘인데 죽일 수가 없이 된다 이겁니다. 이쪽 사람은 그렇게 일치했기 때문에 알고 있지만, 그쪽 사람은 모르지마는 이 공용 공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벌써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 속의 자기 주인공은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주인공으로 하여 육신이 움죽거리는 건데, 그 마음으로 하여 육신이 움죽거리는 건데, 그 마음이 스르르 녹는데 어떻게 칼로 사람을 찌르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를 자기가 못 찌른다 이 소리에요. 금방 마음이 약해져서.

그러니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겨울과 같이 딴딴히 얼었다가 일치하니까 금세 봄이 되더라 이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간적으로 볼 때 겨울과 봄이 이렇게 기간이 몇 달 있는데, 한순간에 겨울이 봄이 된 거죠. 그러니까 녹았단 말입니다. 그 강하게 얼었던 얼음이 그냥 순간 녹아버리니까 물이 돼 버렸어요. 물이 됐는데 뭘, 얼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깨트릴 게 뭐 있나요? 그러니까 찌르지 못하죠.

그래서 이 도리를 우리가 말로 할 수 없는 거지마는, 이렇게 말로 해서 여러분이 듣는다면 주인공에다가 놓을 수 있는 그 자신이 생긴다 이겁니다. 주인공이라는 것은 우주 전체가 한데 합쳐진 즉, 주인공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에서 나오는 일들은 바깥에서 하는 일이나 안에서 하는 일이나, 안에서 생각나는 거나 바깥에서 내 몸뚱이가 움죽거리는 거나, 상대성이 있는 거나 모든 게 나로 인해서 생긴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는 주인공에다 되놔라. 딴딴하고 강한 것도 그냥 용광로에 넣고 쇠도 용광로에 넣는 거고. 그러면은 거기에서 다, 봄이 오면 다 녹는 거죠, 한마디로 말해서.

그러니 우리가 이 탓 저 탓 할 것도 없고, 이것저것 불법이 어떤 건가 하고 눈을 희번덕거리고 찾아다닐 것도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렇게 인연이 돼서 어떤 법당에 들어갔을 때, 아무 법당에라도 들어갔을 때 그 등상불이 ‘아이, 저건 등상불이니까.’ 이렇게, 즉 말하자면 버리지 말라 이겁니다. 그건 왜? 그때에 그 순간, 그 법당에 자기가 들어갔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부처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거기 들어갔기 때문에 인연이 돼서 그 부처의 형상도 내 형상이에요. 그 형상을 배척한다면 내 몸뚱이가 망가져요. 모든 게 중하지, 중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남을 못 믿고 남을 배척한다면, 남을 욕을 한다면, 바로 내가 욕을 먹어지고 내가 몸이 망가지고, 배척하는 것만큼 자기가 망가져요. 또 모든 것이 욕심을 부려서 ‘내가 배척하지 말랬으니까 전부 내 거다.’ 이렇게도 생각하지 말라 이겁니다. 사람이 모두가 내 거기 때문에 놔 놓고 써라 이겁니다. 놔 놓고. 그러면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가벼운 것도 없고 무거운 것도 없고 그냥 여여하게 내가 씀씀이에 의해서 내가 만 원 쓰려면 만 원 쓰고, 천 원 쓸려면 천 원 쓰고, 몇천 원 쓰려면 몇천 원 쓰고, 이렇게 다양하게 써라 이겁니다. 그 주인공 안에 다 들어 있으니까요.

무심의 상태란 어떤 것인지요

문) 가끔 무심도인이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도를 공부함에 있어 무심의 상태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무심이란 건 지금 여러분도 전부 무심입니다. 왜냐? 말하는 것도 고정된 게 없지, 보는 것도 고정된 게 없지, 만남도 고정됨이 없지, 먹는 것도 고정된 게 없지, 자는 것도 고정되게 몸을 그냥 움죽거리지 않고 자는 게 없지,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되게 가고 오는 게 없지. 그냥 일거수일투족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대로 마음 쓰고 그대로 무심으로 그냥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오고 가고, 그냥 보고 듣고 이렇게 그냥 찰나찰나 넘어갑니다. 찰나찰나 그냥 돌아요. 그게 무심입니다. 그대로 무심이지요.

그런데 왜 괜히 붙들고 무심이냐 유심이냐 하십니까. 유심도 무심도 둘이 아닙니다. 알고 보게 되면은 우리가 함이 없이 그냥 행을 하는 거고, 말하는 것도 함이 없이 말을 하고 듣는 것도 함이 없이 하고, 우리가 그대로 여여하게 그냥 사는 건데, 전부 모르고들 마음으로 붙들고 늘어지고 온통 야단들이죠. 무심이 따로 없어요. 그냥 우리가 한 발짝 떼어 놓고 그걸 생각을 안 하면 무심입니다. 한 발짝 떼어 놓고 뒷발자국을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앞으로만 가면은, 발자취를 생각 안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한 발자국 떼어 놓고선 그 뒤 발자취가 금이라고 한다면 돌아다보게 되거든요. ‘아이고, 저놈의 금을 내가 밟고선 저렇게 저거 했으니까 고 금을 마저 내가 이거를 해야겠다.’ 하면은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대로 무심코 그냥 걸어 여기까지 올라왔지 않습니까. 요걸로만 비유해 본다면, 저기서 올라올 때 그냥 무심코 걸어서 올라왔지, 내 뒤 발자취가 어떤가, 요렇게 떼어 놨나 저렇게 떼어 놨나 하고 걸어왔습니까? 또 보는 것도 무심히 보지 내가 저거를, 저게 어떤가 그러고는 미리 생각을 하고 봤느냐고요? 듣는 것도 그래요. 미리 생각하고 듣는 게 없습니다. 그냥 듣고 나서 인제 그 판단이 되죠.

그러니까 무심입니다, 그냥 무심. 왜 그냥 여여한 거를 모릅니까? 아이, 그냥 고정됨이 없다고 반야심경에다가 그렇게 해 놨지 않습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서 그대로 여여하느니라.’ 하고 말입니다. ‘색도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그대로 고정됨이 없으니 공과 색이 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무심이라는 여여한 도리만 알면 그냥 무심이요 그냥 무심도예요.

내 의식에 속지 않고 지혜롭게…

문) 공부를 해 나가다 보니 마음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만 어떨 때는 내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에 속아 넘어가기도 합니다. 내 의식에 속지 않고 지혜롭게 살고 싶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우리가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죠? 그런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앞뒤가 없는 그 가운데서 한 발 한 발 떼어 놓고 가는 놈이 있을 거 아닙니까. 즉 말하자면 가는 놈이 가는 놈한테 거기다가 일임하라 이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에 곧장 거기에 연락이 되죠. 어느 학생이 중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호주에 가서 공부를 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영 말을 잘 모르니깐 공부가 안되죠. 그래서 주인공에다 맡기고 ‘주인공이 해! 주인공이 할 수밖에 없잖아!’ 하니깐 몇 개월 되지도 않아서 학교에 그냥 들어가서 말을 배웠다는 얘깁니다. 그건 왜 그러냐. 내 마음과 내 이 마음 안의 ‘참나’의 마음은 수없는 경년을 걸어왔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말이든지 듣지 않는 것이 없죠. 그러니깐 거기에다가 둘 아니게끔 자꾸 지혜를 불어넣어 주니까 빠를 수밖에요.
내가 이렇게 말을 해도 여러분들은 그것을 감지를 못할 거예요. 보지도 못했고 해 보지도 못했고 한 거 알지도 못하니까. 그렇다고 무시하진 말아요, 사실이 그러니까. 귀머거리한테 저 천둥 번개를 쳤다고 하는데 아니라고 그러면 그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자유스럽게 발판을 세우고 자유스럽게 뛸 수가 있는 세계일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의 여러분이, 이런 게 있죠. 가난해도 행복하기만 하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 못하고 항상 쪼들리면서 살다가 그냥 쓰러지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마음이 부자라면 다 부자예요. 그렇듯이 하여튼 여러분은 주저하지 말고 이 항아리 속에서, 내 이 몸체 항아리 속에서 마음이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서 이 세상을 이렇게 ‘이럭해도 될 수 있을까?’ 이럭하고 한 번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렇게 할 수 없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떠한 거든지 송구스럽고 괴롭게 생각하지 마시고 공부하는 데 어떠한 게 닥쳐오더라도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이끌어갈 수 있어. 너만이 이것을 꼭 해야 돼. 난 손만 빌려 줄게.’ 하고 모든 거를 다 좀 여유 있는 마음으로써, 진짜로 믿는 마음으로써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호흡법을 공부하고 있는데

문) 저는 마음과 기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해서 조식수련법, 즉 호흡법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좌선하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숨만 느껴지고 배 속에 이상한 변화가 느껴지는데 더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할지 가르침 바랍니다.
답) 아니, 자동적으로 기가 있는 것을 사용하는 건데, 내 마음으로서 내 몸뚱이 속의 자생 중생들에게 신호를 보내면 자생 중생들이 모자라는 건 채우고 작용을 하는데, 뭣 때문에 호흡 들어가고 나가는 데 거기다 기준을 둡니까. 아니, 호흡을 내쉬고 들이쉴 수 없으면 죽는 거고, 들이쉬고 내쉴 수 없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런 죽는 법을 왜 합니까. 내쉬고 들이쉴 수 없으면 죽고, 또 들이쉬고 내쉴 수 없으면 죽잖아요. 그런데 그 내쉬고 들이쉬고 하기 이전을 지금 말하는 겁니다. 목숨은 내쉬고 들이쉬는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목숨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들이쉬고 내쉬는 것 지켜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해요. 그렇게 자동적으로 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미심쩍어서 지키고 있어요? 그냥 놓으세요.
이 몸은 집합소예요. 생명들의 집합소. 그리고 심부름꾼이자 관리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아니에요. 더불어 나지. 그러니까 몸속에 있는 생명체들하고 같이 더불어 하나에요, 개개인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따로따로 있지도 않고 한데 있지도 않고. 그러니까 둘이 아니게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까 내가 밥 한 그릇을 먹어도 내가 혼자 먹는 게 아니고, 둘이 아니게 한마음으로 한데 뭉쳐서 먹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잘못도 네 잘못도 하나도 없게 되는 거죠. 잘못해도 같이 잘못하는 거고 잘해도 같이 잘하는 거고.
그런데 살다 보면 몸이 떨어져요. 우리가 헌 옷 벗어버리듯 떨어집니다.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배 속에 있는 모든 게 같이 떨어져 버리죠. 이거 보세요. 내 마음은 길잡이요, 선장이요, 선장이 다스리는 채찍과 같은 겁니다, 마음이. 그런데 배 속에 있는 생명들에게 오히려 선장이 말리면 배를 어떻게 끌고 갑니까. 지금 몸이 배라고 한다면 몸속에 모든 자생 중생들이 들어 있는데 선장이 배를 끌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선장이 오히려 그 배 안에 탄 중생들한테 말려 들어간다면 어떻게 선장이 채찍질을 하면서 배를 몰고 가겠느냐 이 소립니다.
‘변화가 있으면 변화가 없게 하는 것도 너니깐 변화 없이 작용을 잘해서 모자란 거 잘 채워서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가.’ 이렇게 하면 되지, 뭐가 그렇게 하나하나 건건수가 많습니까. 지금 살기도 바쁜 세상에 어떻게 종교마저 그렇게 바빠야 하고 그렇게 이론이 많아야 합니까. 아니, 그렇게 생각이 부질없이 많아서 어떻게 편안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네 나무 네 뿌리를 믿어라 이겁니다.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그 네 뿌리에서 에너지를 흡수해서 올려 보냄으로써 푸르르게 살 수 있고, 꽃이 필 수 있고, 열매가 맺을 수 있고, 그 열매는 무르익을 수가 있고, 무르익어서 만 가지 맛을 내게 할 수 있고, 그래서 만 가지로,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중생들에게 다 공급할 수가 있다 이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다가 그냥, 내 마음의 불바퀴에다가 그냥 모든 걸 맡겨 놓으라는 겁니다. 맡겨 놓고 ‘잘되게 하는 것도 너니까 못되게 하는 것도 너다. 그러니 네 심부름을 잘하게 하려면 잘되게 해야 되지 않아?’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으란 말입니다. 맡겨 놓는 버릇을 해 보시라고요.

출가자와 재가자의 공부에 구별 있는지요

문) 출가자와 재가자가 공부하는 데 구별이 있는지요.
답) 구별은 없는데 사람의 차원이 구별이 돼 있기 때문에 구별이 있는 거지, 구별은 없어요. 풀 한 포기도 생명이 있으니까 마음을 전달하고 그러는데요, 뭐.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을 바로,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게 차이가 나는 거뿐입니다.
또 스님이 돼야만이 많이 하고 스님이 안 되면 많이 하지 못한다 이런 게 아니라 공부는 똑같이 하는데 아무래도 살림하는 사람은 자기의 가족이 있잖아요, 가족이. 그런데 이 스님네들은 가족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쉽다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이 스님네들은 아무래도 이 마음이 그냥 걸림 없이 그냥 저거 해서 넓게 나가는 그 가슴이 벌어져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 의복도 이렇게 입고 있고 그러니까 모르는 중생들도 다 이렇게 오지요, 거죽으로도. 또 보이지 않는 중생들도 마음으로 이렇게 달려든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지는 율이,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건질 수 있다 하면은, 그 속가에서 공부를 한 분들은 그저 속가에서 그 모든 걸 굴리고, 그렇게 잘 이끌어 나가는 그런 역할을 한다 이거죠.
그러니까 무의 세계 유의 세계를 겸해서 스님네들은 다 천차만별로 돼 있는 거를 그렇게 천차만별로 자기가 나투면서 하기 위해서 중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아무래도 가정이 있으니까 거기에 여념하다 보면 넓게 바깥으로 튀쳐 나갈 수가 없거든요. 지구 바깥으로 튀어 나갈 수도 없고 또 우주 바깥으로도 튀어 나갈 수가 없거든. 그냥 물속으로도 숨어 들어갈 수가 없고 오직 그 생각 자체가 바로 거기에 어깨에 짊어진 게 있기 때문에 무거워서 그렇단 얘깁니다. 안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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