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엘리엇의 詩選

인도학 심취하며 불교 관심
스스로 불교에 침잠함을 회고

엘리엇의 대표적 시 ‘황무지’
불교적 사유와 감수성 담겨
시 곳곳에 중도·연기 사상이
“상처의 시대, 치유법 제시해”

▲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의 사진.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 극작가인 그는 인도학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했다. 그가 1922년에 발표한 ‘황무지’는 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엘리엇은 194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엘리엇은 하버드 대학원 철학과 시절 인도학 공부를 통해 계몽된 신비화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회고한다. 그의 대학원 시절의 노트나 에세이는 현재까지도 하버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인도에 대한 박식함이 잘 드러나 있고 대학원 당시의 철학 연구 계획의 약 1/3이 아시아 철학과 언어학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의 학위과정 수업에도 불교연구와 관련된 과목이 눈에 띄었고 그의 노트에는 중도(中道)를 지향하는 인도의 대승불교의 학파이자, 나가르주나에 의해 창건된 중관파(中觀派)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엘리엇은 실제로 시를 쓸 때를 회고하면서 자신이 상당히 불교에 침잠해 있음을 스스로 밝히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는 칠레의 한 여류 시인에게 불교는 자신의 작품에서 평생의 영향으로 남아 있으며 〈황무지〉(Wasteland)를 쓸 때 자신은 거의 불교도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한 엘리엇은 〈셸리와 키츠〉(Shelley and Keats)론에서 “몇몇 초기의 불교 경전들은 구약성서의 어떤 부분들처럼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바 있으며, “오래 전 나는 고대 인도어를 공부했으며, 그 당시 나는 주로 철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시도 다소 읽었다. 그리고 내 자신의 시가 인도 사상과 감수성의 영향을 보인다는 것을 나는 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또 ‘현자 괴테(Saga Goethe)’를 자신의 초기 불교 경전 및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독서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문맥에서 다루고 있다. 이처럼 인도의 텍스트들과 사상들은 엘리엇에게 평생의 중요성을 가졌었다. 이러한 인도와 불교의 사상이 드러나는 내용이 그의 시 〈사중주〉(Four Quartets)의 ‘번트 노튼(Burnt Norton)’에서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도, 정연한 모형을 지으며,
텅 빈 골목을 따라, 회양목 원 속으로,
들어가 말라붙은 연못을 들여다본다.
메마른 연못, 메마르고 굳어진,
가장자리는 갈색,
그리고 연못은 햇빛과 함께
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연꽃이 떠올랐다,
소리 없이, 소리 없이,
수면이 빛의 핵심을 받아 번쩍거린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뒤에 있었다,
연못에 반사되어.
그러다 구름이 지나고, 연못은 텅 빈다.
So we moved, and they, in a formal pattern,
Along the empty alley, into the box circle,
To look down into the drained pool.
Dry the pool, dry concrete, brown edged,
And the pool was filled with water out of sunlight,
And the lotos rose, quietly, quietly,
The surface glittered out of heart of light,
And they were behind us, reflected in the pool.
Then a cloud passed, and the pool was empty.

컨즈(C. M. Kearns)와 같은 비평가들은 위 시의 표현을 지금까지 영어로 쓰인 ‘shunyata,’즉, 공(空)의 체험에 관한 시구 중 가장 뛰어난 표현으로 꼽고 있는데, 단지 소재에서의 인유라기보다는 그의 불교적인 감수성과 감각 및 사유태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로 시작하여 “주라. 공감하라. 자제하라. 평안 평안 평안(Datta. Dayadhvam. Damyata./ Shantih shantih shantih)”로 끝나는 ‘황무지’는 한 편의 정신적인 여행으로 볼 수 있다.

이 표현은 반야심경의 “관자재 보살이 심오한 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다 공임을 조견하고 일체의 고액을 건넌다”로 시작하여 “닿았노라, 닿았노라 피안에 닿았노라 피안에 와 닿았노라 깨달음에 이르러 기쁘도다”로 끝나는 표현을 연상하게 한다. 두 편의 서사가 모두 죽음과 고행으로부터 평안과 축복으로 나아가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외형적인 유사성이 드러난다.

또한 황무지는 마치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다양한 선지식을 찾아 헤매는 구도의 행적을 보여주듯, 인류의 역사를 조감하는 지혜 탐구의 여로로도 읽어볼 수 있다.

엘리엇의 대표적인 시론인 몰개성 시론(impersonality theory) 역시 불교의 핵심 교의인 연기적 사유를 보여준다. 화엄종의 제3조 법장(法藏)의 금사자장(金獅子章)은 연기를 설명하여, “금은 그 자체가 본성을 갖지 않기(無自性) 때문에, 금세공사의 수작업(緣)으로 사자의 형태가 드러난다. 그것은 다만 수작업이라고 하는 연(緣)에 의해 존재할 뿐이므로 연기라고 하는 것이다”고 쓰고 있다. 재료로서의 금 자체에는 사자로 드러날 본질이나 의지가 없고 다만 금세공사의 손질이라는 연에 의해 사자로서 드러날 뿐이며 이것이 연기다. 결국 화엄교학의 연기설은 모든 사물이 무자성이라는 것, 어떤 사물에도 실체적이고 변하지 않는 본성이라 할 만한 것은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몰개성 시론이 드러나는 ‘전통과 개인 재능’에서 “성숙한 시인의 정신은 특별한, 또는 매우 다양한, 감정들이 멋대로 그 안에 들어와서 새로운 조합들을 만드는 매개체”라고 설명하고 시인 정신은 자신은 변함없이 여러 가지 화학물질들이 결합하도록 촉진시키는 촉매와 같다고 정의했다. 엘리엇에게 있어서 시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제멋대로 시인 정신이라는 매체 속에 들어와 연(緣)을 맺고 이에 의해 새로운 조합을 만든 것일 뿐, 그 자체의 자성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그의 시학은 연기설의 속성과 유기적으로 공유한다.

엘리엇의 철학과 문학을 파악해볼 수 있는 주제어로는 ‘관계성’이 있다. 이는 색(色)의 공성(空性)을 분석하고 인식하는 관계론적 원리인 연기설과 역시 관련이 있다. 엘리엇에게는 어떤 객체도 밖으로부터 의미를 받아들이는 관계들의 얽힘에 의해서만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하나의 개체나 요소는 마음 속에서 단번에 명확하게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관계들의 거미줄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의 실체는 그 자체로서 정확하게 고정될 수 없다. 그 자체로 존재한다기보다 오직 다른 대상들에 대한 중첩하는 관계의 얽힘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엘리엇은 박사학위논문인 “F. H. 브래들리의 철학에 있어서의 지식과 경험(Knowledge and Experience in the Philosophy of F. H. Bradley)”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축물이다(The self is a construction)”고 쓰고 있다. 그리고 자아는 하나의 세계에 의존하며 이 세계 역시 자아에 의존한다는 말로 자아와 세계가 상호 의존적임을 밝힌다.

일체의 구축이 여러 요소들의 결합물이며 이와 같은 구축의 허구성 또는 불변성을 탈구축(de-construct)하는 것이 엘리엇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의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비개성주의 또는 몰개성 시론은 이 개념의 구체적인 실천이라 볼 수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일체 현상의 연기적인 구축에 공을 드러내는 것이 공(空)사상인데 엘리엇이 관계 얽힘의 시학에 이를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엘리엇은 세계가 선험적으로 하나일 수도 있고 선험적으로 여럿일 수도 있다고 본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는 화엄연기(華嚴緣起) 세계의 기본 구도이다. 엘리엇은 이 두 견해가 적대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고 본다.

어떤 내용이 적절하려면 설명의 주제에 대한 더 많은 시점들을 고려해야 하며 더 많은 문맥들과 관계들의 얽힘을 내포해야 한다. 엘리엇이 단일한 조망, 단일한 시점을 유지하는 설명보다 시점의 변화와 다중적인 조망들을 허용하는 서술을 더 선호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원효의 화쟁사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엘리엇은 〈사중주〉의 ‘이스트 코커(East Coker)’에서 “나는 여기, 중도에 있다”(here I am, in the middle way)고 쓰고 있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 시구가 불교적 중도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에 있어서 중도는 존재의 모든 고정된 공식들을 포함하여 모든 형태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성취되는 해방의 길이며 불교의 중도 추종자들은 변화하는 형식들과 공간의 관계에 집중한다. ‘번트 노튼(Burnt Norton)’의 ‘비존재와 존재 사이의 제한의 형태(the form of limitation/ Between un-being and being)’ 또한 중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회전하는 세계의 정점에.
육(肉)도 아니고 탈육(脫肉)도 아니고,
어디로부터도 아니고 어디를 향하여도 아니다; 정점에, 그곳에 무도가 있다,
그러나 억류도 아니고 움직임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정이라 부르지 말라,
과거와 미래가 모이는 곳. 어디로부터의 움직임도 어디를 향한 움직임도 아니고,
상승도 아니고 하강도 아니다.
At the still point of the turning world. Neither flesh nor fleshless;
Neither from nor towards; at the still point, there the dance is,
but neither arrest nor movement. And do not call it fixity,
Where past and future are gathered. Neither movement from nor towards,
Neither ascent nor decline.

이 표현은 여실히 불교의 중도 사상과 니르바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엇 시에서 ‘정점’(still point)은 언급된 것처럼 고정되지 않고 억류나 움직임이 아니다. 불교에서 세속은 열반과 다르지 않고 열반과 세속은 둘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다음의 표현도 중도 사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에 이르자면
그대는 무지의 길로 가야 한다.
그대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소유코자 한다면
그대는 무소유의 길을 가야 한다.
그대가 아닌 것에 이르자면
그대가 있지 않은 길로 가야 한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대가 아는 유일한 것이고
그대가 소유하는 것은
그대가 소유하지 않은 것이고
그대가 있는 곳은
그대가 있지 않은 곳이다.
You must go by a way which is the way of ignorance.
In order to possess what you do not possess
You must go by the way of dispossession.
In order to arrive at what you are not
You must go through the way in which you are not.
And what you do not know is the only thing you know
And what you own is what you do not own
And where you are is where you are not.

▲ 조의연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
이렇게 엘리엇은 중도와 무소유의 입장을 드러내면서도 반면에 지혜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고도 말한다. 그의 철학적 사유와 문학 활동 그리고 지혜탐구는 동전의 양면처럼 몰두와 무소유의 입장이 병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엘리엇과 불교는 중도라는 쟁점에서 상통하는 비전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적 사유는 여러 상충하는 이념들로 인해 또는 자신의 이해타산으로 분열된 우리 시대에 필요한 통합적인 치유를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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