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스님, 공생선원 개원 12주년 기념법회

▲ 설정 스님은 … 1942년 수덕사가 자리한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속가(俗家) 부친이 만공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 가정에서 성장한 스님은 1955년 수덕사에서 원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 범어사·봉암사 선원 등에서 수행했다. 30대 중반부터 수덕사 주지(1978~1988)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1994~1998)을 지냈다. 2009년 덕숭총림 수덕사 제4대 방장(方丈)에 추대됐다.

죄악 근본 탐욕과 집착서 비롯
참선·주력·염불로 탐진치 녹여야
육근 얽매인 현대인 정신줄 놓아
화두로 번뇌 부숴야 견성 가능

물질가치에 매몰된 많은 현대인들은 인격을 상실한 채 고뇌하고 걱정하며 살아간다.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은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면 참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견성은 화두참선과 염불 주력으로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할 때 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다음은 설정 스님이 10월 5일 공생선원 개원 12주년 초청법회에서 열린 법문의 요지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요. 특히 현대인들은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졌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물질에 대한 집착이 심한 때가 지금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존경쟁이 치열해졌고, 그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뇌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에는 물질가치, 생명가치, 인격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 소중한데도 불구하고 물질 때문에 생명이 경시되는 사회가 지금의 현실입니다.

불교에서는 물질·생명·인격가치 위에 견성가치라 하는 절대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절대의 견성가치는 참생명의 가치요, 진정한 생명을 살리는 가치입니다. 우리가 견성을 하게 되면 참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자애·평화·모든 방편과 실력·지혜와 공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견성한 자들을 열반·해탈 했다고 말합니다. 해탈의 경지에 가면 너와 나라는 것이 끊어져 버립니다. 주관과 객관, 대소(大小)가 끊어지고,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닌 경지가 됩니다. 이것을 대자유의 경지, 대원력의 세계라고 합니다. 현실 그자체가 그대로 환희이자 축복입니다. 이 무한한 공덕과 실력, 지혜와 복덕이 나한테 다 구족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괴롭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그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죄악에서 오는 겁니다.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고통이 오는 것이고, 그 죄악의 근본은 탐욕과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이 죄악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참선과 주력, 염불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누구나 이 공부를 할 수 있고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성취할 수 있으며 걸림없이 살 수 있습니다.

생사 걸림 없이 살아야 해탈가능
중국 선불교 전성기를 이끈 방거사(?~808)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방거사는 아내와 아들 딸이 모두 ‘수행자’였습니다. 네 가족은 전재산을 ‘동정호’에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행했습니다.
산으로 들어간 가족은 ‘짚신’이나 ‘조리개’같은 것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네 식구는 결연한 의지로 참선을 하며 자기 자신을 다 놔버렸습니다. 자기를 다 놔버리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세계가 벗어납니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수행자로서 끊임없이 수행하는 삶을 지속했습니다.

참선을 하든 뭘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놔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탐진치라고 하는 것을 놓을 수만 있다면 거기서부터 자성은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탐진치를 한꺼번에 놔버리면 심성자리가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놈을 갖고 있으니 그놈 때문에 막혀서 도저히 자성자리가 드러나질 않는 것입니다. 방거사는 이미 물질가치(재산)를 다 털어내버렸을때 공부가 반쯤 됐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어느 날 방거사는 딸 영조에게 말했습니다. “나가서 해가 어느 정도 있는지 보고 와라.”
방거사는 정오가 되기 전에 방에 마련해 놓은 자리에 좌정해 ‘열반’에 들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딸 영조도 방거사 못지않게 깨달음을 증득한 선사였습니다. 영조는 나가지 않고 문간에서 내다보더니 “해가 안 보이는 데 일식중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방거사가 밖에 나가 일식을 확인하려던 그 때 영조가 방에 들어와 방거사가 ‘열반’에 들려고 마련했던 자리에서 가부좌하고 열반에 들었습니다. 방거사는 “참으로 기민하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후의 이야기도 매우 극적입니다. 딸의 장례식을 치루고 지방장관을 지내던 친구가 놀러왔을 때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친구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아들은 아버지와 동생이 떠났단 소식에 “말씀이라도 하시지”하며 밭에서 일하다 쇠스랑 손잡이를 잡고 선채로 열반에 들었습니다. 방거사의 부인도 방거사의 소식을 듣고 “싱거운 사람들 같으니 , 소식도 없이 떠나다니”하며 동네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어디론가 떠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공부한 사람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합니다. “언제 죽겠다, 언제 간다” 생사를 자유자재로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저렇게 깨달았으면 중생교화를 하지 왜 그렇게 홀랑 가버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사가 초탈한 경지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그 생사가 초탈된 상태에서는 무대가 사바세계 뿐 아니라 우주 시방법계에 맘대로 왕래자재무애 하는 겁니다.

견성에 머물지 말고 백척간두진일보하라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합니다. 하루저녁에 초가집 열 개를 지었다 부순다는 이야기가 있듯 말이죠. 그 번뇌 망상이 꺼졌다 일어났다 하는 자리를 한번 되살펴 보는 겁니다. 이게 화두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불교는 간화선입니다. 화두를 들어 그 꺼졌다 일어났다 하는 생각을 끊어버립니다. 여러분이 참선하면서 번뇌, 망상 일어난다고 걱정하는데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화두를 들어버리면 번뇌 망상은 다 꺼져버리게 돼 있습니다.

화두를 의심하고 있는 그 당처를 잘 잡고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일심으로 가다보면 그런 생각으로 뭉쳐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 때가옵니다. 한 시간이 갔는지, 두 시간이 갔는지, 몇 시간 갔는지 모르는 그런 때가 훌렁 지나갑니다. 그런 때 결판이 납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나와 둘이 아니라는 그러한 경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일하면서 얼마든지 참선할 수 있습니다. 염불, 주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으로 갈 때 올 때,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계속 놓치지 않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별리고(愛別離苦)의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헤어진 남녀를 비롯해 자식을 잃은 부모, 부모를 여읜 자식 등. 잃어버린 상대만 생각하며 괴로워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그 사람 생각, 밥을 먹을 때도 그 사람 생각이 나서 괴로워합니다. 또 돈을 잃고 돈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등. 늘 집착하는 대상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거처럼 화두를 들어보세요. 삼매가 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염불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세음보살이든, 나무아미타불이든, 지장보살이든, 부처님 명호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 부르는 생각을 집중하고 있으면 염불선이 됩니다. 그렇다고 복이나 성취를 빌면 안됩니다. 일념으로 하다보면 다 되게 돼있습니다. 열심히 일념으로 하다보면 잡념이 다 떨어지고 마음속에 있는 온갖 분별, 망상, 차별심이 다 떨어지는데 청정심이 안 일어날 수 없고 심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별 망상으로 진리를 찾으려 하면 안됩니다. 처음에야 그럴 수 있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한생각을 해야 합니다. 철학·과학으로 부처님 법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철학은 사고(思考)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것이죠. 분별하는 것으로 불교를 접근하면 안됩니다.
부처님 공부는 무상·무심으로 가줘야 합니다. 그때 까닭이 나오게 됩니다. 일념으로 갈 때 경계들을 지나게 됩니다.

참선을 한다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한번 앉으면 한 시간 세 시간, 삼일도 끄떡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화두가 있냐고 묻자, “화두 들게 뭐가 있습니까, 편안한데”라고 답했습니다.
너무 편안하고 맑고 깨끗한 자리이기 때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으면 습관이 들어 화두가 다 날라가버리고 편안해지는 것이죠.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걸 마경(마의 경계)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남은 경계이죠.
이렇게 동정이 일여(一如)하고 오매가 일여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해야 합니다. 백척이나 되는 장대 위에서 한 발짝 내딛으면 죽는 것인데 내딛어야 합니다.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옛분 들이 그런 얘길 합니다. 우리나라 선의 전통은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요. 요새는 돈오돈수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경제론적으로 보면 돈오돈수이지만, 수행론적으로 봤을 때는 돈오점수여야 합니다.
전생이라 하는 꽃이 확 폈다 하면 그 꽃이 잘 피어서 시들지 않고 열매를 맺도록 보림(保任)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무결한 경지가 옵니다.

마음 밭 잘 갈아야 뿌리 잘내려
앞으로 100세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저는 이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참생명운동으로 전국민이, 전세계인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돈, 지위, 명예 등 짜잘한 것들로 갈등, 원망하고 다투지 마세요. 못난 중생들이 자존심가지고 난리칩니다. 그런 생각이 날 때마다 화두를 들고 부수어버리세요.

곡식심어서 농사짓는 사람이 밭을 잘 갈아야 나무뿌리도 잘 내리고 결실도 맺는 겁니다. 이렇듯 우리는 부처님법을 공부하고 심성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원래 맑고 깨끗했던 참나로 회복하는 것이 견성의 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살기 바쁜데 어떻게 수행하느냐고 합니다. 그 속에서 공부하고 정진해야 공부에 힘이 생깁니다. 경계가 없이 가만히 앉아서 하는 공부는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견성을 하는 그날 까지 이 고삐를 놓쳐선 안 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되 그 보는 놈을 관(觀)해야 합니다. 듣되 듣는 놈을 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근(六根)의 도적을 만나 색성향미촉법에 끄달려 도둑맞고 살다보니 제정신이 없게 되는 겁니다. 전부 남에게 도둑맞고 자기 살림살이를 지킬 수 없게 된겁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공부해서 견성하자는 것은 내 살림살이, 내 것을 가지고 자유스럽게 편안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빈털터리 거지가 돼 중생노릇하며 고통받고 살자는 것이 아니고, 세세생생 써도 없어지지 않는 지혜, 복덕, 자비라는 내 원래 보물을 찾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공부요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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