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십념(十念)

미타의 대본원력은 수승한 힘

아미타불 간절히 부르면

시방세계 광명 두루 비추어

금빛 찬란한 손길 내밀어준다.

 

‘무량수불전’에 하는 것은, 우주의 헤아릴 바 없는 대생명을 깨치신 그의 앞에 나가서 말씀을 일러다오. 그 분인즉 대자대비의 사랑으로 자신의 몸을 삼고 있는 아미타불이다.

‘우러러 두 손 모아’는 큰 서원이 깊은 그 부처님 앞에 귀명(歸命)한다. 목숨을 돌이켜 빌고 절 한다는 것. ‘원왕생 원왕생’ 그러한 지경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 나는 기어이 당신과 같은 그런 생애에 들어가 극락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하는 것.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이것은 흔구(欣求)라고 한다. 흔구정토(欣求淨土), 기꺼이 정토를 구한다. 그리움은 아까 말하였듯이 인간의 영원한 자세다. ‘사뢰어 주소서’ 우리의 원행(園行)이 보은하고 감사하는 것이라고, 절실히 느끼고 그 큰 사랑 속에 들어가 있어야 되겠어요, 하는 이 사연을 일러 다오.

‘이 몸 버려두고’ 그 큰 사랑이 어떻게 나를 버려두고 아미타불 당신인들 어찌 마음 편하고 자신의 덕을 이루실 수 있겠느냐는 말. 중생의 제도 없는 대자대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건질 사람 없는 구세주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제도의 대상이 되는 중생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구세할 주인이 된다.

나무아미타불을 원효대사의 논리로 볼 진데, 소공역공(所空亦空)이라는 제 3의 테제에 해당되는 것이며, 고답적(高踏的)인 교학의 진리나 어려운 현실의 중도(中道)는 우리들 고달픈 중생에게 힘에 겨운 일이므로 확실한 믿음을 얻어, 염불을 외우므로서 이행도(易行道)를 밟아 가자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 자신도 그렇게 말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지경을 말한다. 우리는 현실 생활에 어렵고 고달픈 일이 많은데 복잡하게 잡념을 일으킬 것 있느냐. 정신 통일하여 정성껏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방법을 택하기로 하자. 이런 생활이다.

나무아미타불을 하고 염불수행을 하고, 몸도 목욕재계하고, 입을 양치질 하고, 뜻을 맑히고 이렇듯 기도하고, 정진하고, 성스러운 수도 생활을 하고, 성자 생활을 하면서 아미타불을 부르면 우리가 비록 죄악이 많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고 안태한 극락세계로 간다. 극락 상품(上品)으로 올라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생활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할 일 다한 것은 아니다. 현실을 옳게 파악하고 극락세계에 가 있는 것만 좋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금 왕생으로 사회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대사회성을 알고 그리로 나아가야겠다. 희망할 따름이 아니라 대사회성을 간파한 다음에는 그 지경을 알았으니까, 이제는 저 얼빠진 사람들,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더 비근한 예로는 자식들을 위해, 일을 위해, 그 가엾고 어여쁜 것들을 위해, 악이라도 겁도 내지 않고,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아무 데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재로운 활동으로 제도 사업을 벌려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염불하는 사람의 보은·감사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회의식을 깨친 사람의 대사회의 생명을, 사명을 이룩해 나가는 자리인 것이다.

대사회의 사명을 이룩해 나간다, 중생을 제도한다, 이런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것은 불가사의한 수승(殊勝)의, 아주 뛰어난 원력(願力)에 의하여서 이 지경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이것을 나무아미타불, 칭명 염불하는 가운데 얻어진다. 비상한 원력이 이에서 솟아나고, 우리는 보은·감사의 지경에 도달한다. 이것이 다음에 말하는 섭취게(攝取偈)란 것이다.

 

15. 섭취게(攝取偈)

광명편조(光明遍照) 십방세계(十方世界)

염불중생(念佛衆生) 섭취불사(攝取不捨)

 

염불하는 사람은 누구 하나 버리지 않고 모조리 다 섭취(攝取)해서 건져 준다는 미타의 대본원력(大本願力)이 우리에게 아주 수승한 힘이 된다.

품에 안는다.

광명(光名)이 두루 퍼지어

십방(十方) 세계에

아미타불

목말라 부르는 중생득에게

손을 뻗쳐, 일일이

금빛 찬란한 손을 뻗쳐

안아들고

품에 안는다.

 

한 사람인들 버리기야 하리.

 

미타의 본원력(本願力)에 우리가 실려, 배라 할까, 비행기라 할까, 그것을 타면 혼자 제 발로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빨리, 그 힘으로 삽시간에 천 만리를 갈 수 있다. 그런 비유를 든다. 원시경전 가운데에 이런 얘기가 있다. 배를 타고 가는 비유인데, 원행 길을 혼자 가다가, 큰 강을 만났다. 이를 건너야 목적지에 닿을 것인데 좋은 도리는 없을까. 한참 만에 배 한척을 찾아내었다. 그것을 타고 노를 저어 이제는 어렵잖게 건너편 언덕에 이르렀다. 이렇듯 강을 건너 놓고 생각하니 배가 어떻게나 고마운지 측량할 길 없다. 그리고 보니 배가 여간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문득 애착이 붙어 버린다. 배를 뒤집어쓰고 육지를 걸어 갈 수는 없다.

배는 어디까지나 방법이고 과정이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강을 건너는 것이며, 이는 달성했다. 그러면 배를 가지고 육지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쓸데없는 수고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念佛) 자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염불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아미타불을 뵈어야 하고, 그의 본원력(本願力)을 얻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었던가. 공상역공(空相亦空), 공공역공(空空亦空)은 아직 배를 가져가야 하나 어떻거나 망설이는 상태다. 그 배에 대해서 애착이 있는 것이다. 소공역공(所空亦空)의 자리에서는 배건 뭣이건 그것이 유용(有用)하다는 데 대해서까지 애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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