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 유교 경전 〈대학〉

송대 성리학 집대성했던 ‘주희’
본성 깨달아 만물의 이치 아는
〈대학〉의 격물치지론에 주목

불교의 이치 넘어서려 했으나
용어에만 집착한 한계 보여줘

▲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의 진영. 그는 〈예기〉 제42편을 따로 떼어낸 〈대학광의(大學廣義)〉를 다시 편집해 〈대학장구(大學章句)〉로 만들어 이를 숭앙했다. 주희의 노력으로 〈대학〉은 세상에 널리 읽히는 유교 경전이 됐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겪으면서 성립된 중국 한대(漢代) 유학의 특징은 소실된 경전을 다시 수집, 정리하고 자구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훈고학이다. 그러나 훈고학은 경전의 내용과 거기에 담긴 진리 규명보다는 그 자구해석에만 매달려 논쟁을 일삼게 되면서 차츰 학계의 외면을 받다가, 불교가 전래된 이후 마침내 사상사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당(唐) 중엽부터 일련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유학사상에 대한 재평가와 자체반성은 유학의 흐름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시작하였고, 이어 송(宋)왕조의 성립과 함께 유학자들이 민족의 주체성에 눈을 뜨면서부터 이른바 정통성에 입각한 전통사상의 재정립이 새로운 추세가 되었다. 종래의 선진유학(先秦儒學)을 새롭게 발전시키고, 유학의 바탕 위에 불교의 내용을 흡수하면서 신유학의 기운이 돋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송대 유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는 이단이고 또한 비정통이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유학을 대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유학의 경전은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실천적 교훈들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송대에 접어들어서 불교의 형이상학과 논리를 종합하여 새로운 시대와 사회에 맞는 새로운 유학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한다.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주희(朱熹, 1130~1200)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희는 치밀한 논증과 명석한 사고, 해박한 지식으로 주돈이(周敦, 1017~1073), 소옹(邵雍, 1011~1077), 장재(張載, 1020~1077),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 1033~1077) 등의 사상을 종합하여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희는 종래의 사장학과 훈고학의 학풍을 쇄신하고, 노장사상과 불교를 배척하였으며, 마침내 새로운 시대와 사회문제에 맞는 유학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희가 처음부터 불교배척의 입장에 섰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유년기부터 불교 교리에 흥미를 갖고 널리 불교 경전을 섭렵하였다. 그는 l4세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부친의 유언에 따라 호헌(胡憲, 1086∼1162)·유면지(劉勉之, 1091∼1149)·유자휘(劉子?, 1101∼1147) 밑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당시 불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선승들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다.

“나는 15~6세 때 또한 일찍이 불학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하루는 병옹의 처소에 있다가 한 승려와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승려는 다만 상응하는 대답만 할 뿐 옳고 그름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유 선생(유자휘)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분명하고도 신령한 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유 선생이 뒤에 나에게 이야기 해 주었을 때 나는 마침내 이 승려에게 긴요하고 오묘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드디어 그에게 찾아가 질문하고 그가 말하는 것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았다. 과거에 응시하러 갈 때에 미쳐서는 그의 생각을 가지고 허황된 설을 제거하였다.(〈朱子語類〉 卷104, ‘朱子1·自論爲學工夫’)

이와 같이 주희는 선승들을 직접 만나 선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였고, 그가 과거시험 보러가면서 휴대하고 있었던 책은 당시 간화선의 대표자였던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의 어록 한 권 뿐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처럼 주희는 유년기부터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설을 듣고 분명하고도 신령한 선을 이해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유자휘·유백수 등의 선은 주로 정(精)에 치우친 묵조선적 경향이 강한 반면, 대혜종고의 간화선은 동정을 초월한 일상의 일념상에서 대오함으로서 인간의 능동성을 북돋우는 것이었다. 여기서 보면 주희가 처음 받아들였던 선학의 특징은 정적이며 묵조선이었는데, 주희는 당시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정(精)에 치우친 묵조선에 만족할 수 없었다.

주희가 불교와 멀어지게 된 것은 이동(李?, 1093~1163, 연평延平)과 만나게 되면서였다.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주희는 이동이 “그대는 공(空)에 매달려 허다한 도리는 이해하면서도 눈앞의 일은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도란 현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상생활에 있을 뿐이니, 착실히 공부하는 데서 이해하면 곧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고 하면서 “성인의 경전을 잘 읽어 보라”는 말을 토대로 공부하면서 불교를 비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사실 주희가 생각하기에 직지인심을 통한 본성의 인식은 마음속에 있는 주관적이고 내면적 자기반성 의한 것이어서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었고, 외면적·객관적 근거를 담보해 내는 것 역시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주희는 객관적이면서도 확실한 근거를 갖는 방법을 구하였는데, 주희가 여기에서 착상한 것이 바로 외부세계이다.

즉 변화하는 외부세계의 사물을 관찰하고, 그 외부사물 안에서 변화하지 않는 이치(太極-理-性)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외부 사물의 이치를 자기에게 치환함으로써 자기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희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된 데에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는다)”이라고 언명한 것에서도 동기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주희의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한 근거는 바로 유학 경전 중 하나인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격물치지란 본래 〈대학〉 경1장에 보이는 용어로, 성리학에서는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궁구하고, 이를 미루어 인간의 본성을 다 알아 궁극적으로는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 내지는 실체를 밝혀낸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학〉의 내용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니며,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親民)·지어지선(止於至善)이 이에 해당되고, 팔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주희는 〈대학〉의 삼강령 팔조목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철학적 문제가 바로 격물치지라고 보고 “이 편의 종지는 강령이 세 가지가 있고, 조목이 여덟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격물치지가 가장 급선무가 된다.(〈晦菴集〉 卷15, ‘講義 經筵講義’)”고 하였다.

격물치지에 대한 주희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앎을 이룸이 사물을 접하는 데 있다(致知在格物)고 한 것은, 나의 앎을 이루고자 한다면 사물에 접하여 그 이치를 궁구함에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다. 대체로 사람 마음의 신령함은 앎이 있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사물은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으나, 오직 이치에 대하여 아직 다 궁구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그 앎이 다 이루어지지 못함이 있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반드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따라 더욱 궁구하여 그 극진한데 이를 것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한 것이다.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아침에 활연히 관통하는 데 이르면 모든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전체의 큰 씀씀이가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격물이라 이르며, 이것을 앎의 이루어짐(知之至)이라 이른다.”

이 글을 분석해보면, 주희 철학의 근본 목적은 현실세계에서 변화하고 있는 만물의 내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하여 그 속에 있는 본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치환함으로써 복성(復性), 성성(成聖)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고, 나아가 죽음으로 인해 멸절되는 인생의 무상감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의 전개를 가능케 하는 근거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외부사물에 당연히 태극=천명=리=성(太極-天命-理-性)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본성이 투영되어 있다는 유학의 전통적 사유체계이다. 바로 이러한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주희는 본래의 마음을 밝히는(明明德) 최우선적 방법으로 그의 격물치지론을 전개하였으며, 본성을 인식하고·성인의 경지를 이루어 천인합일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출발선상에서 외부사물을 자기의 반영체로 자각했던 것이다.

즉 주희는 외부사물이 자기의 반영체라는 전제 하에 외부사물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리가 곧 본성임을 확인하고 그 외부사물의 리를 미루어 자기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는 것을 그의 격물치지론을 전개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토대로 보면 주희의 격물치지는 선종에서 자아의 본래성품을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 또는 성(性)이라고 부르고, 수행을 통하여 분별심에 물들지 않은 본래성품을 보면 곧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명제를 배척하고 유교경전에 의거한 새로운 인식론을 확립하기 위해 전개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위·진 이후 남북조·수·당의 오랜 세월에 걸쳐 유학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으나, 상대적으로 불교는 화엄학·선학 등 중국인의 체질에 맞는 학적 체계가 갖추어짐에 따라 당에서 송에 이르는 동안 중국의 사상계를 거의 석권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유학의 부흥을 기치로 이루어진 성리학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사상에 대한 경계와 비판과 배척은 필수적이었다. 특히 중국의 남송 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가진 주희의 성리학이 정통유학을 계승하는 시대사상으로 서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성행해 왔던 불교사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주희에게 있어서는 시대적 사명이었던 것이다.

특히 불교는 중국에 들어온 후에 중국인들의 사유방식에 맞게 중국화 되었는데, 그 중 화엄학(華嚴學)은 사법계(四法界)이론을 제출하여 본체계(理法界)와 현상계(四法界)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理事無碍法界)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또 현상계의 일들이 서로 막힘 없이 관통하고 있음(事事無碍法界)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작용(作用)이 곧 성이라는 설을 제출하는데, 이에 대해 주희는 “불씨는 원래부터 리를 알지 못하여 지각운동(知覺運動)이 성이 되는 줄 안다.(〈朱子語類〉 卷126, ‘釋氏’)”고 하면서 불교가 리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심(心)을 성으로 혼동하였다고 비판한다. 성즉리(性卽理)를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는 주희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에서 지각운동을 성으로 보는 것은 곧 기(氣)의 작용을 성으로 보는 것이 되고, 이는 심을 성으로 혼동한 것이 된다.

주희가 말하는 리란 곧 태극(太極)이며 우주의 본체이다. 구체적인 사물에서 보면 태극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물 가운데 존재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주 만물의 본체인 리로 내재한다. 또한 주희에게 있어서 리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의리, 즉 인륜의 뜻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희는 불교가 천리를 알지 못해서 본성이 곧 리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마음을 성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였다고 비판하고, 불교는 작용이나 심을 성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참다운 견성이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고 보면 주희에 따르면 불교는 리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심성과 수양법에 있어서 정치한 이론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이론일 수 없고, 또한 수양방법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도 참된 이론을 구성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도 없다고 여긴 것이다.

함현찬 성균관대 BK21플러스사업단 연구교수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리는 주희처럼 본체이자 실재인 객관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깨침(覺)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깨친 경지’를 개념화시킨 것이 리이다. 다시 말해서, 리는 실재 개념이라기보다는 방편 개념으로 쓰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이법’이나 ‘법’이 유학의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나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희가 말하는 객관적 천연의 이치가 실리라고 하는 입장에서 불교를 공허하다고 비판한다면, 이러한 비판은 불교의 본래 모습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고, 오직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엄밀히 말하면,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와 불교에서 말하는 리는 그 범주가 다르다. 따라서 사실상 서로를 단순하게 리라는 ‘용어’에 천착해서 비교하거나 논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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