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불교 유적 순례기- 천수 맥적산 석굴
천수는 구법 여정의 베이스캠프
구법승 모셔 법회와 역경하기도
짚단을 쌓아놓은 듯한 맥적산에
190여 석굴 조성해 부처님 예경
북위~당대 불상 변천사 ‘한눈에’
깎아진 절벽에 조성된 대불·석굴
바라보면 선현들 佛心에 감탄이
위수에서 난주로 가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 중 하나가 바로 진주(秦州)다. 진주는 현재 천수(天水)의 옛 지명으로 한 무제(재위 BC 141~BC 87) 당시 장건에 의해서 서역과 교역할 수 있는 비단길이 개척되기 시작했다. 이곳에 불법을 얻기 위한 구법승들이 모여든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함께 동행한 가이드는 천수를 구법승들에게 ‘베이스캠프’로 소개했다. 스님들을 모셔다 법회를 열고 서역에서 유입된 불경(佛經)들을 한역(漢譯)했던 곳이 천수였다는 것이다. 구법의 길의 관문이기도 했던 천수에 그 불심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차장에서 10여 분을 오르니 정말 설명대로 짚단을 쌓아 놓은 듯한 기암절벽의 산이 보였다. 기암절벽 사이 대불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에서도 확인할 정도니 그 크기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맥적산 석굴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운강·용문·돈황석굴과 함께 중국의 4대 석굴로 불린다. 석굴의 굴착과 불상 조성은 4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북위·서위·북주·수·당·송·원대 등 10여개 왕조를 거치며 불사가 이뤄졌다. 그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석굴과 소조불상들이 맥적산에는 존재한다. 소조불의 크기부터 형태, 기법까지 다채롭고 자연의 풍광이 한데 어우러져 중국 사람들은 맥적산을 ‘동방예술조소관(東方藝術雕塑館)’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맥적산 석굴은 산의 서남, 남, 동쪽 세 곳의 낭떠러지에 개착돼 있다. 시기는 서쪽 절벽이 오래됐으며, 동쪽으로 갈수록 비교적 연대가 내려온다. 가파른 낭떠러지에 194개의 석굴과 감실들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으며, 여기에 소상(塑像) 3513구, 석상(石像) 3662구 등 7200여 불상이 봉안돼 있다.
이들 불상들은 대부분 ‘석태니소상(石胎泥塑像)’이다. 석태는 돌을 깎아 윤곽을 만들고 니소란 진흙으로 모양을 만들어 채색을 했다는 것으로 다채로운 표정의 불상들이 만들어질 수 있던 것도 ‘석태니소’기법 때문이다.
이 같은 다양한 불상과 불화로 맥적산은 많은 이들이 상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었다. 실제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맥적산에 대해 “푸른 구름 어린 가파른 절벽 사이에 돌을 깎아 불상을 만들었다. 만개나 되는 감과 천개나 되는 방이 있는데 비록 사람의 힘으로 이뤘다 하나 신의 솜씨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극찬했다.
맥적산 앞에서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멀리서도 보였던 거대한 삼존불이다. 대불과 190여 석굴을 가까이서 만나기 위해서는 좁고 아찔한 계단을 올라야 한다. 개인적으로 경증의 고소 공포가 존재해 안전 장치가 거의 없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일은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위태롭게 계단을 오르자 동쪽 절벽에 조성된 13호굴 대형 삼존불 입상의 발 아래에 이르렀다.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조각된 삼존불 입상은 그 크기가 15m에 달한다.
이 대불은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문제가 조성한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대업을 기념해 엄청난 불사를 일으켰는데 당시 스님이 23만명, 절 3792개소, 불상 10만6580구를 조성했다. 또한 문제는 맥적산의 정상에 사리탑을 세우고 정염사(淨念寺)란 사호를 내리기도 했다.
대불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다른 석굴들로 발걸음을 올렸다. 하지만 석굴 상당부분은 훼손을 우려해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3, 5호굴 등 대표적 석굴들을 친견할 수 있었던 것에 위안을 삼아야 했다.
3호굴은 긴 복도의 석굴 형태로 이뤄져있다. 절벽에 총 297개의 불상이 조성돼 있는데 호상과 수인이 천차만별이다. 특히 채색불의 기법인 특이해 눈길을 끌었다. 9호굴은 산에 의거해 7개의 굴이 병렬돼 있으며, 목조 건축을 모방한 건축물이 앞에 나와 있다.
동쪽에서 올랐던 석굴은 서쪽으로 갈수록 연대가 이른 것이기 때문에 그 형태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 석굴의 불상들은 한국에서도 익숙한 풍만하고 뚜렷한 호상의 당나라 시기가 주류라면 서쪽 석굴의 불상들은 북위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됐다. 북위 시기의 불상들은 인체 비율이 호리호리하고 말쑥하고 청아한 호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수불청상’이라고 한다.
유 교수는 한국의 마애불에서 사라져 복원되지 않고 있는 예불 공간인 ‘전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유 교수는 “서산마애삼존불과 경주 남산 마애불 앞에서는 일반적으로 예불을 위한 공간인 전실이 있었다”면서 “현재는 이 같은 전실을 복원하고 있지 않다. 전실이 복원돼야 전국에 산재된 마애불들은 단순한 문화재를 넘어 예경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석굴은 ‘천불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도 했다. 실제 맥적산에는 ‘천불동(千佛洞)’이라고 불리우는 복도 형식의 3호굴이 있었고, 5호굴의 벽화에는 수많은 불보살이 빼곡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옛날 기암절벽에 수많은 천여 불상을 조성한 것은 순수한 신앙의 발로였을까, 왕조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수많은 정적을 죽이고 황제라는 지위를 얻었던 미혹한 자의 참회였을까.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천년이 지난 지금 많은 사람들은 옛 선현들이 조성한 불상 앞에 머리를 낮추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있다는 것이다. 천년 전에도 21세기에도 부처님은 시방세계 아니 계신 곳 없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