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통사 中

▲ 영통사 뜰에 서 있는 대각국사비.
무상한 시간 구도의 징표

“또 앞으로 몇 리를 나아가자 산이 휘돌아 길이 막혔다. 올려다보니 다섯 봉우리가 장엄하게 다투어 높이 솟아 서로 형제들처럼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관산이다. 그 기슭에 영통사(靈通寺)가 있었다. 이 절은 옛 송경(松京)의 대가람(大伽藍)으로,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건물이 열 중에 두셋 정도만 남아 있다. 뜰에는 세 개의 석탑이 서 있고 문밖에는 고려 시대 승려 의천(義天)의 비가 서 있는데, 중간 이하는 글자가 떨어져나가 읽을 수 없었다. 채수의 송도록에서 매우 칭찬한 명승지 서루(西樓)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협(金昌協 1651 ~1708)의 문집 〈농암집(農巖集) 제23권〉에 나오는 ‘송경(松京)유람기’는 오늘날의 개성 주변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이다. 후반부에 오관산과 영통사에 대한 기술이 있는데 비교적 소상하다. 특히 “뜰에는 세 개의 석탑이 서 있고 문밖에는 고려 시대 승려 의천(義天)의 비가 서 있는데, 중간 이하는 글자가 떨어져나가 읽을 수 없었다.”는 부분은 오늘날의 풍경과 큰 차이가 없다. 2005년 천태종이 복원한 영통사 역시 보광전 앞의 석탑과 뜰 앞의 의천 대각국사 비가 그대로 존립하고 있다. 무상한 시간 위에 서 있는 구도의 징표인 셈이다.

김창협은 개성 지역을 유람할 때 영통사에 들렸던 소감을 시로 남겼다. 〈농암집〉 제6권에 ‘영통사’라는 제목아래 두 수의 시가 실려 있다.

 

영통유이구(靈通游已久)

단억입산심(但憶入山深)

예예석림색(??石林色)

요요종고음(寥寥鐘鼓音)

사공탄지겁(寺空彈指劫)

객지백두음(客至白頭吟)

계마장랑하(繫馬長廊下)

전진창도심(前塵?道心)

 

영통사 유람한 지 하마 오래라

산속 깊이 들어갔던 기억만 아련하다.

바위에 나무숲이 무성도 하고

범종이며 북소리 적막하구나.

손가락 퉁길 사이 절은 텅 비고

길손은 백발 되어 시를 읊누나.

긴 행랑 아래에 말을 매면서

지난 일 서글프게 이야기하네.

넉넉한 마음의 흥취

 

첫 번째 시에서 김창협은 영통사의 풍경과 무상한 세상사를 담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에서는 그 무상감이 더욱 절실해지고 역사 속에 흘러간 영통사의 시간을 관조하는 자세를 보인다.

화기우래편(花氣雨來?)

승거연리심(僧居煙裏深)

계행만창석(溪行萬蒼石)

루대오청잠(樓對五靑岑)

채로기유재(蔡老記猶在)

취헌시가음(翠軒詩可吟)

전조나부문(前朝那復問)

비자욕생금(碑字欲生金)

 

골고루 내린 비에 꽃이 피는데

깊은 안개 그 속에 스님들 사누나.

검푸른 일만 바위 흐르는 시내

푸르른 다섯 산봉 마주한 누대.

채로 기록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읍취헌 지은 시가 읊을 만하네.

과거 왕조 이제 와 어찌 물으리

비석 글자 황금이 흘러나올 듯한데.

 

시에서 3구와 4구는 ‘검푸른 바위’와 ‘푸르른 산봉우리’로 대구를 이루었는데, 5구와 6구는 ‘채로’와 ‘취헌’이라는 인물로 대구를 이루었다.

채로는 성종 때의 문신 채수(蔡壽 1449 ~1515)이고 취헌 역시 성종 때의 문신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 1479~1504)이다. 채수는 허침, 조위, 안침, 성현 등과 개성 지역을 유람하고 〈유송도록(遊松都錄)〉이란 여행기를 남겼다. 김창협은 그 기록을 본 것이다. 또 박은의 경우도 영통사를 찾아가 ‘영통사에서 흥을 읊다(靈通寺記興)’라는 시를 지었다. 그의 문집 〈읍취헌유고〉에는 ‘영통사기흥’ 외에도 두 수의 칠언율시가 실려 있다. 그 중 ‘영통사 벽에 걸린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를 보자.

 

산화척촉자성림(山花??自成林)

고사송삼청역음(古寺松杉晴亦陰)

분부초인여쟁석(分付樵人與爭席)

추수곡조요동음(追隨谷鳥要同吟)

두타일소경무어(頭陀一笑更無語)

천석백년응사금(泉石百年應似今)

세만회심향화사(歲晩會尋香火社)

종전진토만부침(從前塵土?浮沈)

 

산꽃이라 철쭉이 절로 숲을 이루었고

옛 절에 솔숲은 맑은 날도 어둑하여라.

나무꾼에게 분부해 자리 다투게 하고

골짜기 새 따르며 함께 시를 읊고저.

두타는 한 번 웃고 더 말이 없는데

천석은 백 년 토록 늘 오늘과 같으리.

세모에는 반드시 향화사를 찾으리니

종전엔 진토 속에

부질없이 부침했구나.

 

시는 봄날 철쭉이 만개한 풍경 속의 영통사를 묘사하며 시작된다. 그리고는 나무꾼도 합석하여 즐기려는 넉넉한 마음과 새들이 우짖듯이 함께 노니는 벗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자 하는 흥취를 드러내고 있다. 뒤이어 나오는 두타 즉 고행하는 스님은 한 번 웃고 말이 없다는 구절과 천석 즉 자연 만물은 백년토록 오늘과 같으리라는 대구도 아주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 간 두타승과 만고에 여여한 자연 만물이 자연 그대로 공존하는 풍경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욕정이 사그라진 깨달음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시인의 속내가 결구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세모에는 반드시 찾아가리라 다짐하는 ‘향화사’는 산사(山寺)를 뜻하는데, 고절한 은자(隱者)의 은거지라는 의미도 있다. 당나라의 백거이(白居易)가 벼슬을 그만두고 향산에 들어가 결사를 맺고 수행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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