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당처가 빈줄 알아야한다 ④

경계에 닿질러 일어나는 망심

오만 생각 일으키는 그 자리는

빛깔도 냄새도 소리도 없어

의젓하게 그대로 있는 거에요.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면 경계에 닿질려서 일어나는 그 마음을 써. 다시 말하면 반연(攀緣). 아, 여러 가지 인연해서 이렇고 저렇고 해서 그 반연 일으키는 그 진심 아니에요? 그렇다면은 반연이라는 거는 지가 올바로 생각했던지 그르게 생각했던지, 거기서 한 가닥 여김을 일으켜서 말이지 반연을 일으켜 놨는데 이것 헛것이거든요. 지가 일으켰으니 헛거 아니에요? 모래 위에 집짓는 거나 한가지란 말이죠. 아, 요거 헛거로구나 하고 딱 알아버리면은 말이죠 반연에서 일어나는 망심은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 다음에 진심이 그대로 나타나. 그대로 나타났다고 해서 이거 어디서 딴 데서 숨어가 있다가 다시 오는 그것도 아니거든. 아, 반연을 일으키던 그놈이 바로 진심이구나. 그러면 내가 반연을 일으키지 않으면 되구나. 경계에 닿질려서 일어나는 망심을 내가 쓰지 않으면 되는구나. 이거 좀 어려운가요?

그러니까 눈의 소재를 찾아야 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이지 눈이라는 마음을 대표한 겁니다. 마음이 맑으면 눈이 맑아. 그러니까 눈부터 들고 나오는 거예요. 나중에 다른 거 다 나옵니다. 하하하. 초학자는 차차 차차 이래 해가야 좋습니다. 그 소재(所在,) 소재가 어디 있나요? 솔직한 말로. 소재라 해 봤든 당장의 마음 그 가운데 있거든. 진심을 찾을라는 거기에 있거든. 내가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바로 그 자리거든. 그럼 내가 공부를 해야 되겠다. 아이고 나는 와 이리 모르노. 나는 와 모르노 하는 그 자리거든요. 그럼 나는 와 모르노, 이거 반연에 따라 일어나는 망상이거든. 내가 와 몰랐노 하는 이 생각도 싹 치워 버리면, 그대로 뚜렷한, 이런 생각도 일으킬 수 있고 저런 생각도 일으킬 수 있고 오만 가지 생각을 일으키는 그 자리는, 그대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면서 의젓하게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요것이 너무 쉬워놓으니 어렵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죠?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하운 선생, 어떻소? 좀 어렵게 들립니까. 근데 이것이 문제는 말이 너무 쉬워서 그렇나요? 말이 너무 쉬워서 좀 어렵게 들릴지도 모르지. 말이 쉬우나 어려우나 간에 이것이 절대 원칙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말이지 두 가지 세 가지 마음이 있을 수가 없어요.

한 생각이 요렇게도 되고 요렇게도 되는 것이지. 만약 선과 악이 있다면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요새 인자 어떤 철학가들은 선은 선이 있고 나면서부터 악한데 어떻고 어떻고….

왜 그러느냐. 당장의 내가 있거든. 부처님 환하게 아는데. 그러하니 이전 어른들이 대도를 통한 분들이 전부 말한 것이, 부처님도 그랬습니다. 육년 동안 말이지 고생한 거 헛고생 했다. 아 마음 하나 탁 돌리면 그만인데 헛고생 했다. 이전의 다른 조사들도 헛고생 했다. 이러고 기쁨에 겨워서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랬는데 이거 희한한 일이 있는 것이 육조대사 이 양반이 헛고생을 안 했어요. 나중에 참 도를 이룬 다음에 거 고생을 했는데 그건 좀 다르죠. 한 십여 년 동안 고생을 했거든요. 아, 이 양반 어떻게 됐든지 말이지 천하의 무식쟁인데, 그 양반 그 얼굴 보면 말이죠 동상이나 목상이나 사진 찍어놓은 것 보면 얼굴 못났습니다. 얼굴도 못났지 키도 작지 상놈이지 무식하지, 그거 뭐 천하의 불행한 건 전부 독차지한 분이에요. 전매특허나 한가지에요.

이런 분이 고생을 안 하고 대도를 성취했습니다. 그 무슨 관곈가. 이 사람이 만약 우리가 예를 들면, 만약 책을 좀 보고 공부를 했다면 안 됐을런지도 모릅니다. 안 됐을런지도 몰라요. 진심이 있고 사심이 있고 삼독심이 있고 무엇이 있고 이렇고 저렇고 불도까지 닦아가는데는 오십 삼단계가 있고 무엇은 어쩌고 무엇은 어찌하고. 그 지식이 만약 그 양반이 지식이 있어서 책을 봤더라면은 대성 못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이건 내가 과도한 말인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양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어. 그만 그저 산에 가서 일할 줄 알았고 나무 팔아서 어머니를 갖다 부양해야 되니, 또 효자라요. 어머니를 부양해야 되니까 쌀 팔아서 어머니 갖다 드릴 줄 알아. 그리고 괴로우면 잠잘 줄 알았어. 화닥닥거릴 일이 하나도 없어요. 부자를 본다든지 해도 그것도 탐도 안했어. 좌우간 백 가지 탐이 있었다면 한가지 쯤 나도 이래 해 봤으면 했을까 안 했을까, 이래 했을지 모르지만 그 얼굴 꼬라지 보니 말이지 나도 그래 했으면 이런 생각할 사람이 못 돼. 얼굴 꼬라지가. 순심 이거든 순심, 지견이 많은 사람은 공부 안 됩니다.

좌우간 어쨌든지 우리가 이 마음자리 하나만 어디 있다는 거 이거만 알면은, 요거 하나 알기 위해서 우리가 공부하고 참선하고 염불하고 하는 겁니다. 다른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하니 참말로 우리가 어렵느냐. 사실로 어렵다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잘 못 가지기 때문에 그것이 어려운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까 허공을 찾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 아니에요? 또 허공을 걷어잡을라고 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 아니에요? 자, 허공을 찾을라고 하는 사람도 걷어잡을라고 하는 사람도 허공 속에서 지금 걷어잡아 있는데 그걸 모를 따름이고, 또 허공을 버릴라 하는 것도 말이죠 허공 속에서 어디 가서 다른 데 가면 허공이 아닐까요. 지구 밖을 떠나더라도 허공이 아니에요? 어리석은 짓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여러분의 마음자리가 어디 있느냐 꼭 그거와 한가집니다. 솔직한 말로 여러분의 몸 가운데도 있는 거 아닙니다. 또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러느냐.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거니까. 또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몸 여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물거품처럼 이런 걸 나투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허공이 너무나 친해. 그 본래의 슬기 자리가 너무나 친하기 때문에 그걸 무시해서 그렇지. 어디 깃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알면은 벌써 이것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피어가 있는 것 아니에요. 여러분의 가슴 속에 이것이, 이 난초가 피어가 있지 않으면 이거 안 뵙니다. 안뵈요. 저 화분도 그렇지 꽃도 그렇고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게 환해. 이렇게 환해. 환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환한 거와 같이 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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