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십념

천당에 가고 도통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미타불을 만날 때

수승한 인연으로 극락세계

가는 일이 가능해진다.

 

다른 설에 의하면 정정은 십주에서부터 그 이상, 십회향(十廻向)에까지 올라야 된다고도 한다. 십주의 자리가 퇴전하지 않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데, 이 두설은 일반적으로 불교도들이 하는 소리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경우는 구품왕생(九品往生)을 일컫는다. 구품(九品)이란 하품하(下品下), 하품중(下品中), 하품상(下品上), 중품하(中品下), 중품중(中品中), 중품상(中品上), 상품하(上品下), 상품중(上品中), 상품상(上品上)의 아홉가지다.

이를테면 상품하(上品下)가 제가끔 또 상중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극락세계의 연꽃도 하하품(下下品)에서 상상품(上上品)까지 있다는데, 최하 부분의 연꽃 봉오리 맺힌 그 자리가 하하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품하생(下品下生)의 연꽃이라도 나무아미타불하면 벌써 왕생할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를 정정취(正定聚)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십신, 십주 또는 십행, 십회향이니 하여 정정취에 드는 것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어 놓았지만 아미타불은 정토문(淨土門)을 열어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아미타불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아미타불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극락세계에 가서 생활한다는 말이며, 이것은 아주 수승한 인연에 의하여 불퇴전의 지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원효대사는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 천당에 간다든가, 도통한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데 극락세계 가는 것은 어떻게서 그리 쉬우냐? 이런 질문에 대해서 천당에 간다 아라한이 된다 하는 따위의 일것은 제가 스스로 걸어가자니 그토록이나 어렵다 아무리 걸음이 빠르다 해도 하루 백리나 백오십리 길이면 고작이다. 비록 앉은뱅이 일지라도 비행기를 타거나 특급열차로, 큰 배로 순조로이 바람과 파도에 실려 간다면 하루에도 천리 만리를 간다. 현실 세계의 배나 비행기의 조종사들의 힘을 빌더라도 저 혼자 걸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인데 하물며 우리의 가장 뛰어나는 수승한 아미타불의 원력에 부딪칠 때, 우리는 곧 정정(正定)의 지경을 파악할 수 있다. 이래서 참,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이란 이가 얼마나 장한가.

신라 때 우리 선일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원효대사의 제자라고도 하는 광덕(廣德)이라느니, 광덕의 처라느니 이런 사람이 지었다는 노래지만, 어쨌든 원효대사 같은 큰 어른이 지도한 힘이 이런 데서도 엿보인다.

달이어,

이제 서방(西方)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전(無量壽佛前)에

말씀아뢰다가

맹세 깊으신 무량수불전에

우러러 두 손 모아 사뢰기를

원완생(願往生)이라고,

여기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어 주소서,

아,

이 몸 버려두고.

사십팔원(四十八願)이 다 성취 하실까.

왕생(往生)하기를 바라던 먼 옛날 신라 사람의 노래다. 서산마루에 걸린 하현달을 바라보고 기울어진 달더러 이르는 말이다. 아미타 무량수불 앞에 나아가거들랑 말씀 아뢰어 다오. 소복한 여인이 울바자 밑에 합장하고 서서 비는 말이다. 부처님께 맹서 하신 일인데, 설마 이를 어기시고 안 된다 하시지는 않겠지. ‘가고 싶어요. 님 곁에 나도 가고 싶어요’가서 부처님께 드릴 말씀은 달아, 그리워 가슴 들먹이는 한 계집이, 님의 맹세를 믿고,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듯 애달픔으로 여기 섰노라. 울바자의 하얀 박꽃이 이슬처럼 내리는 부처님의 은혜에 호젓이 젖어, 바르르 떨고 있다. 아 이 내 목숨을 바쳐 그리워하는…… 이 몸 버려두고, ‘날 더러 어떻게 살라고 혼자 버려두고’그래도 괜찮으실까요? 아미타불이어, 저를 두고 님께서 혼자는 못가십니다. 사십팔원이 어떻게 이루어지시겠어요. 그립고 애달픔에 설레어 떨고 섰는, 이 신라 계집의 왕생 소원을 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루시진 못한 것 아니신가요.

한 많은 우리 겨레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다. 신라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이 있었다는 것을 이 영원한 정한(情恨)은 천년을 사이 두고도 오히려 새로운 것이다. 전해 내려오기로는 광적이 죽자 그의 처가 가신 님 그리는 애절한 심회를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엄장이 얻어다 세상에 내어 놓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이 노래를 보시고 퍽이나 기뻐하신 모양이다. 이를 엄장이 얻어 왔다고 하지만 그가 지은 것인지도 모른다. 원효대사께서 손수 이 노래를 지으시고 여기에다 기구한 사연을 달았는지도 알 수 없다. 작자는 누구였든지 간에 이 노래가 유포되면서 신라 사람들의 가슴을 친 것만은 틀림없다. 아무리 무량수불, 우리 아미타불게 드리는 말씀이기로니 이렇듯 다정하고 간곡할 수가 있을까. 순정한 연애 감정 그대로다. 어버이를 기리는 자식의 애틋한 심정보다는 조금 더 짙은,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의 애욕에 얽힌 사랑 보다는 훨씬 승화한, 그러면서 애절하다고 할 만한 정한의 호소다. ‘이 몸 버려두고, 사십팔원이 다 이루어지실까’하는 끝귀의 함원(含怨)은 바로 일품이다.

아미타불은 마흔 여덟가지 원을 세우셨는데, 그 중의 하나로 ‘내 이름 아미타불을 부르면 누군든지 왕생할 것이오. 반드시 극락세계로 가도록 손수 이끌어 주겠다. 만일이라도 그것이 안 된다면 내 맹세코 성불하지 않으리라’ 는 것이 있어, 이를 들어 ‘사십팔원이 다 이루어지실까’한 것이다. 아미타불 그리워하는 이 몸을 버려두고 그것이 될 수 있겠어요 한 것이다. 얼마나 아미타불의 대자 대비에 메어달린, 그리고 탁 맡겨버린 삼매(三昧)의 믿음에서 우러나는 정열의 노랜가. 우리는 이런 데서 신라 사람들의 행복스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온 겨레가 이러한 노래를 보르고 늘 보은·감사하는, 나무아미타불의 생활들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생활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믓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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