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통사 上

▲ 조선조 이후 퇴락했던 개성 영통사는 2005년 천태종에 의해 복원되었다.
대각국사의 출가 사찰

영통사(靈通寺)는 북한에 있는 절이다. 소재지는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1027(고려 현종 18)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고려는 1036년(정종2)에 독특한 법을 하나 만들었다. 왕이 왕자가 4명 이상일 경우 한 왕자의 출가를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통사에 계단을 설치하고 경율(經律)을 익히는 도량으로 삼았다.

1055년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대각국사 의천스님(1055~1125)도 영통사로 출가 했으며 입적 후 영통사에 사리를 봉안했고 비도 세웠다. 대각국사비는 지금도 남아 있는데, 비문은 김부식(金富軾)이 썼다.

영통사는 조선조 이후 퇴락하여 당우는 모두 허물어지고 대각국사비와 탑이 폐허 속에 남아 있었다. 2005년 남한의 대한불교천태종과 북한이 영통사를 복원했으며 매년 대각국사의 열반일(10월 5일)에 맞춰 천태종과 조선불교도연맹이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필자는 2007년과 2012년 영통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개성 시내에서 버스로 한 시간 남짓 가면 오관산의 아름다운 연봉들이 나타나고 몇 개의 산굽이를 돌아 산으로 들면 영통사가 나타난다. 널찍한 마당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대각국사비인데, 풍상에 마모되어 글자를 판독하기는 어려운 지경이다.

영통사는 옛 자료를 토대로 복원되었는데, 왕과 왕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던 절답게 회랑을 두른 당우들이 하나같이 격조 있다. 물론 산이 에워싼 경치도 매우 아름답다.

 

고려시대 왕실의 보호를 받던 영통사는 나라를 대표하는 사찰이었을 것이다.

 

“이제 능사(能事)를 겨우 끝냄으로써 훌륭한 스님들을 맞이해 열람하니 천 손가락이 책을 펼쳐 넘기고, 육종(六種)의 소리가 놀랍게 진동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임금님의 덕이 더욱 빛나시어 사방의 노래로 전파되어 찬양하고, 나라의 기강이 다시 굳어져 한 가지 일도 잘못됨이 없으며, 아래로 뭇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편안히 재활(再活)하듯 하여지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일부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제41권 석도소(釋道疏) 편에 실린 이 글의 제목은 ‘영통사를 보수하고 나서 대장경(大藏經)을 피람(披覽)하는 소’이다. 영통사에 보관된 〈구사론〉이 유실된 것이 많아 아를 보완하는 불사를 마치고 쓴 글이다.

 

시에 담은 깨달음의 풍경

백운거사 이규보가 영통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고 불교 공부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영통사에서 적지 않은 시를 쓰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제11권에는 고율시 한 수가 전한다. 제목은 ‘영통사(靈通寺)에 놀면서’다.

 

선로영우접취미(線路?紆接翠微)

불번문사축승귀(不煩問寺逐僧歸)

도산재청청계향(到山才聽淸溪響)

용파인간백시비(?破人間百是非)

 

실 같은 길 구불구불 산허리에 닿았는데

스님을 따라 가니 번거롭게 절을

물을 것이 없네.

산에 이르자마자 맑은 시내 소리 들려오니

인간의 온갖 시비 일시에 부서지네.

 

스님과 동행하여 영통사로 가는 동안의 정취를 한 편의 시로 그려 낸 것이다. 지금도 영통사 가는 길은 구불구불 산허리를 돌아간다. 우거진 숲길은 아니지만 다복솔이 듬성듬성 하다. 스님과의 동행은 아니고 버스를 타고 도착하면, 절 옆을 흐르는 계곡에서 들리는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이규보의 시대와 다르지 않은 물소리일 것이다. 다만, 시절 인연이 그때와 달라 ‘온갖 시비를 일시에 부서지게’ 하지 않으니 상념이 많을 뿐이다.

 

지벽진기식(地僻塵機息)

누고서기미(樓高暑氣微)

조수명경하(鳥隨鳴磬下)

승진모종귀(僧?暮鍾歸)

이석운생수(移石雲生袖)

간송로적의(看松露滴衣)

추상산과숙(秋霜山菓熟)

경차구암비(更此?岩扉)

 

땅이 궁벽하니 티끌 마음 쉬어지고

다락이 높으니 더운 기가 가시네.

새는 밥 때에 울리는 경쇠소리 따라 내리고

스님은 저녁 종에 맞추어 돌아온다.

돌을 옮겨 앉으니 구름은

소매에서 일어나고

솔을 우러러보니 옷자락에 이슬이 드네.

가을서리에 산과일이 익을 무렵

다시 이 바위 문을 두드리리라.

 

〈동문선(東文選)〉 제10권에 실린 이 오언율시(五言律詩)는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의 작품이다. 제목은 ‘차영통사벽상운(次靈通寺壁上韻)’.

변계량의 시대만 해도 이미 영통사에는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시를 남겼을 것이다. 그래서 변계량도 절의 벽에 걸린 시를 보고 그 운을 따라 이렇게 맑고 청아한 시를 남겼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인만큼 유학을 익히는 선비들도 불교에 대한 지식은 풍부했다. 그래서 절의 풍경을 단지 풍경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묘사하는 조예를 가졌을 것이다. 워낙 시문에 능했던 변계량이라 하지만 영통사의 풍경에서 발견하는 적멸의 즐거움은 대단하다.

고요한 산사에 저녁이 찾아오고 배고픈 새가 절로 날아드는 시간에 스님들이 돌아온다. 오관산은 바위산인데 바위와 구름이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져 사람을 사람이 아닌 듯 느끼게 만든다. 그러한 진경 속에 노닐다 보니 훗날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을 가눌 길이 없는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