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불교 유적 순례기- ①서안 법문사

부처님 지골사리 봉안처로 유명세
1987년 진신사리탑 보수공사하며
사리함 발굴… 2005년 한국서 전시

唐代 황실 주도로 사리공양 활발해
“의상 등 구법승 참여 있을 것” 추정

▲ 법문사 진신사리탑. 1986년 반파된 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탑 아래에서 지하궁이 발굴됐으며, 이 안에서 지골사리 4과 등 국보급 문화재 300여 점이 나왔다.
중국 서안(西安)의 옛 명칭은 장안(長安)이다. 일반적으로 실크로드의 시작점을 서안으로 잡는다. 중국의 특산품인 비단이 이곳을 기점으로 서양에 전해졌다. 실크로드는 불법 전파의 통로이기도 했다.

서안에서 시작된 실크로드를 수많은 동북아 구법승들은 인도로 가는 길로 활용했다. 지금은 키르기스스탄까지 5500km의 고속도로가 놓였지만 옛 구법의 길은 험난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문헌에 따르면 740명의 구법승들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고, 생환해 돌아온 구법승은 63명, 전체의 8.5%에 불과하다. 공부를 마치고 나이가 들어 돌아오지 못한 구법승들을 감안해도 실크로드를 통한 구법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인지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중국 곳곳의 도시에는 대규모 불교 유적이 많다. 중국 서안도 마찬가지다. 서안에는 법문사를 비롯한 대자은사, 흥교사 등 대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법문사는 당대(唐代)부터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법문사는 서안에서 서쪽으로 1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 법문사는 매우 크게 중창돼 있다. 본래 사찰 규모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한 현대적 보궁이 별도로 마련됐으며, 그 규모는 매우 웅대하다. 법문사 주차장에서 내려서 법문사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운행하는 차량으로 이동해야 한다. 물론 걸어서도 갈 수 있다. 다만 더운 볕을 이기고 대리석에 올라오는 열기를 참으며 30여 분 이상을 꼬박 걸어가는 고행을 참을 수 있다면. 

▲ 새롭게 만들어진 법문사의 보궁. 멀리서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길 옆에는 대형 불보살상들이 조성돼 있다. 현재 법문사를 살펴보면 사찰보다는 커다란 현대적 불교 공원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현재 중국이 불교에 대한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법문사의 옛 사격 이외의 화려한 현대 시설은 새롭게 불사한 것으로 어마어마한 정부 투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중국의 정치 체계상 정부에 종교가 예속돼 있어 이 같은 현대 시설이 정부의 세력 과시용으로 보여지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살펴보면 법문사는 예로부터 중국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법문사가 건립된 시기는 공식적으로는 후한 시대(147~189)로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고 있지만 그 연원은 아쇼카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왕의 신임을 받지 못했던 왕자 아쇼카는 101명의 형제 중 99명을 살해하며 왕좌를 차지했다. 이후 대제국을 세운 그는 수많은 살생에 대해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이후 아쇼카왕은 제3차 결집을 후원했으며, 중국에 스님을 보냈다. 스님들은 부처님 진신사리 19과를 가지고 중국에 왔지만 당시 불법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없었다. 결국 스님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사리를 시안 인근인 성총에 묻어두고 그곳에서 수행하다 입적했다. 이후 안식국의 왕자이자 동아시아의 걸출한 역경가였던 안세고가 중국에 들어와 서안 성총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안세고는 오색 광채가 북두칠성까지 뻗어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자리를 파보니 7개의 푸른 벽돌에 쓰인 산스크리트 문장과 함께 진신사리가 있었다. 그 사리 중 부처님의 손가락 사리를 모신 곳이 법문사의 전신인 아육왕사(阿育王寺)다.

법문사의 최고 전성기는 당나라 때이다. 당시에는 5000명의 승려가 수행을 했으며 30년에 한번 씩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개방했는데 그 때마다 풍년이 들고 사람들은 화목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법문사에서 황제가 있는 시안으로 지골사리를 이운할 때면 그 길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심지어 황제도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당나라가 패망하면서 법문사는 쇄락의 길을 걷는다. 또한 1568년 지진으로 인해 진신사리탑은 무너졌다. 1579년에 이르러서야 현지 사람들의 불심으로 성금이 모연돼 탑이 중건됐다. 이 때 건축된 것이 8각 9층 전탑(벽돌탑)이다.

▲ 부처님 지골사리. 당나라 시기에 가장 많은 공양이 이뤄졌다.
영욕의 세월을 견뎌온 법문사를 현재의 대찰로 발전시킬 수 있던 것은 바로 부처님 지골사리 때문이다. 최고 전성기 시절 법문사의 사리공양은 유명했다. 북위부터 당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부처님 지골사리의 영봉은 9번 이뤄졌으며, 그 중 7차례가 당나라 시기 법문사에서 봉행됐다. 그만큼 지골사리 참배는 일반인들에게는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귀중한 행사였다.

하지만 당나라 황제 의종은 법문사 진신사리탑 지하에 지하궁전을 만들고 그 안에 지골사리를 봉안하고 지하궁전은 밀봉해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 후 부처님 지골사리는 전설로 전해져 중국인들에게 내려왔다.

지하궁전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최근에 와서다. 1976년 장마에 조금씩 붕괴되던 진신사리 전탑은 1981년 8월 폭우로 한쪽이 무너져 내렸고, 결국 중국 정부는 1986년 탑을 완전 해체하게 된다.

해체와 함께 발굴을 시작한 중국 정부는 탑 아래 지하궁전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전설로 내려 온 지골사리 4과와 함께  백옥으로 정교하게 만든 아육왕탑, 금으로 만든 봉진신보살(捧眞身菩薩), 중국 여황제 측천무후의 자수치마, 온갖 금관과 은곽, 비취색 자기, 금으로 만든 석장(錫杖) 등 300여 점의 문화재가 쏟아졌다.

중국은 이곳을 1급 문화재로 지정하고 대대적 보수를 거쳐 1988년 진신사리탑을 중건하고 박물관 등을 새로 지어 일반에 공개했다. 2005년에는 법문사의 지골사리가 한국으로 봉송돼 서울과 부산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당시 조계사에서 이뤄진 봉안식에서 故 지관 스님(조계종 총무원장)은 “진신사리는 부처님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이것을 친견하면 마음에 신심이 절로 나고 또 모든 업장을 녹일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며 “한중 양국의 우호증진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법문사 일주문 앞 향로에서 향공양을 하고 있는 중국불자들.
현대에서도 진신사리를 봉송해 친견하게 하는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듯 최고 전성기 시절 법문사 사리공양에 구법승들의 참여는 없었을까? 이를 증명하는 기록은 현재까지 나오지 않지만 아예 없었다고 단정하기도 이르다.

전중배는 회당학보 10집에 기고한 ‘당대(唐代) 한?중 불교교류’ 제하의 논문에서 법문사 사리공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을 구법승들을 추정했다.

전중배는 측천무후 당시 이뤄진 법문사 사리공양회를 주목했다. 측천무후의 두 번째 사리공양회를 주도한 것은 법장과 문강 스님이다. 특히 법장 스님은 구법승이자 우리나라 화엄종 시조인 의상 스님과의 교우가 두터웠는데 둘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했으며, 의상은 당으로 가는 승려 효충을 통해 금을 보내기도 했다.

전중배는 “의상과 법장의 지속적인 교유관계 속에서 당대의 불구와 불교의식이 신라에서 계속적으로 전해졌다”면서 “<불조통기>에는 850년 신라의 승려가 법문사 탑을 도굴하려다 실패했다는 내용이 있는 등 9세기 중엽까지 신라 불교계에 법문사 사리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기>에는 법문사 사리공양 행사에 장안에 체류하고 있던 구법승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종남산 일대에서 수행하고 있던 한국의 구법승들의 참여와 참배도 쉽게 이뤄졌을 것이다.

험난한,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구법 여정의 시작. 당나라 시기 구법승들은 법문사의 지골사리를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법을 위해 자신의 몸을 잊는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다시 새겼을까. 하늘로 뻗어있는 탑신을 보며 가늠해볼 뿐이다.

‘중국 실크로드 불교 유적 순례기’는 앞으로 격주로 연재되며, 조계종 교육원 연수교육의 협찬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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