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당처가 빈줄 알아야한다 ②

‘진심 구하기’는 허공 잡겠다고

말 타고 달리는 것과 같다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삼독심은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이 도리를 알면 법 굴리게 된다

 

실에 있어서 우리가 본래의 내의 그 자체성, 다시 말하자면 눈이 있는 자리, 눈은 보는 걸 뜻하는 건데 나중에 가서는 소명하게 압니다. 듣는 그 자리를 소명하게 알면은 망상과 망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걸 모르면, 이것이 어떤 반연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진짜와 같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회(화)를 내보세요. 부회 낼때는 부회나는 것이 진짜에요. 그것도 우연히 반연에 의지해서 경계에 닿질리는 그 마음이 자기 마음하고 잘 안 맞단 말이죠.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지, 반연에 의지해서 이것이 일어나는 것이지, 본래 어디 망상이라는 것이 또렷하게 있어서 성내는 것이 아니고 또렷한 자리가 있고 웃는 것이 또렷한 자리가 있어서 거기서 나온 건 아니거든요.

실로 나중에 가서는 아까 반야경에 읽었습니다만도 눈 귀 코 혀 몸 새김 거님도 없다는 이것이 부처님 말씀인데 실로 나중엔 납득이 갑니다. 아, 그렇구나 납득이 가게 되는데 실로 우리는 하나의 반연에 의지해서 좋다 나쁘다 결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반연에 의지해서 사실로 우리의 자성을 망쳐버립니다. 자성을 망친다는 건 내 부처를 자살시키는 거나 꼭 한가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로 해서는 이렇게 쉬운데 좀체 이놈이 잘 안 돌아섭니다. 암만 봐도 ‘내’거든요. 내 몸뚱이 이거, 자꾸 스스로 변하는 거 이거, 아무 것도 아닌데 암만 봐도 내거라. 그러나 사실 아는 사람의 분수로 봐서는 암만 생각해도 내 것이 아니거든요. 지멋대로 변하는 거라 말이죠. 그리고 이거 자체성이 없는 것. 또 망상 망념을 일으킨다 해 봅시다. 설혹 일으킨다 해봤든 그 어떤 반연에 의해서 그래서 성을 냈다 웃었다 할 따름이지, 본래 어떤 성내는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것도 없는 거라. 실에 있어서는. 그러니 요 대목이 말은 극히 쉬워도 극히 어렵습니다.

사실로 요 문제를 딱 해서, 여러분들이 알긴 알아요. 여러분들이 실감있게 딱 알아서 나중에 가서는 망상 분별도 내가 쓸 수 있어. 어떨 땐 망상도 한 번 부려 보는 거라. 알면서. 어떨 땐 분별도 부려 보는 거라. 알면서. 이렇게 될 때까지는 말이죠 참말로 상당히 수양을 해야 합니다. 수양 안하면 안 됩니다. 이 불법은 수양하는 겁니다. 우리는 새로 공부하는 각오를 해야 됩니다. 내가 절에 많이 다녔다 이거 다 그 생각 치워야 됩니다. 내가 책도 많이 봤다 그 생각도 싹 치워야 됩니다. 그래서 새로 공부를 한다는 이런 견지 밑에서 나간다면은 절에 있어서 한 일년 이년 다닌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몇 번 이래 듣는 것이 일년 이년 다니면서 공부할 때보다 그거보다는 훨씬 속 빠릅니다.

실로 나는 내 마음을 찾아야겠다, 진심을 찾아야겠다, 참말로 마음 찾아야 되겠다, 내가 삼독심을 버려야겠다 이래 하지만은 삼독심, 어떻게 버릴 겁니까. 왜 그러느냐. 반연에 의지해서 임시로 지가 만들어냈는데 삼독심이 어디 있을 턱이 있나요. 없는 건데 허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일어나는 것인데 나중에 구름 사그라지면 그것도 없어지는 건데 어디 가서 삼독심 찾을까요? 또 그러면 우리가 진심을 찾을라고 해 봅시다. 삼독심을 버릴라 해도 안 되지만은, 버릴 것이 없거든. 공연히 반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삼독심인데 버리긴 뭘 버려요? 버릴 것이 어디 있나요? 반연을 일으키지 않으면 삼독심은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또 진심을 찾을라고 해봅시다. 어떻게 찾는다는 말이에요? 실은 찾을라는 그놈이 진심인데 그걸 놔두고 어떻게 찾는다는 말입니까.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이거 아주 중요한 문젭니다. 오래 듣던 분들은 만날 하는 얘기 같지만 말이죠. 우리가 기초로 우리가 들어갈 때는 이거부터 확연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진심 못 찾습니다. 어디 가서 어떻게 찾는다는 겁니까. 빛깔도 소리도 없는데 어디 가서 어떻게 찾는다는 겁니까. 어디 있길래. 허공을 걷어잡을라고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나 꼭 한가지라 말이에요. 어디 가서 진심을 찾을 거요. 그러면 버리자 말이여. 어디 가서 진심 버릴 거요? 뭘 걷어잡고 진심 버릴 거요? 자 그러면 마음자리가 없느냐. 마음이 없느냐. 그것도 아니네. 내가 마음을 맨날 쓰고 있네. 잘 쓰고 못 쓰는 그것만 다를 뿐이지 마음 늘 쓰고 있잖아요? 또 마음을 안 쓸 때는 또 없어. 아무 생각도 않을 때는 아무 것도 없어. 자, 이거 마음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그러나 저러나 허공을 찾는 사람과 허공을 뛰쳐날라는 사람과 꼭 한가지거든요. 그 사람은 허공 속에서 허공을 찾는 거여. 또 허공 속에 앉아서 허공을 버릴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마음속에서 마음을 또 찾으려 하고, 마음속에서 마음을 버리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러니 우리가 이러한 도리부터 확연히 알아버려야, 이걸 알면은 사실 공부 반 이상 된 거나 한가집니다. 그 다음에 가서는 법을 굴리게 되는 겁니다. 얘기하는 자체가 내 자신이 법을 굴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허공을 버릴라 하는 사람이 돼서도 안 되고, 탐심이니 진심이니 치심이니 삼독심, 버릴라 하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그건 일으켰다 없앴다 지 마음대로 하는 건데, 원래 삼독심이 그 자리에 무엇이 있다면은 그것도 버릴 필요가 있겠어요. 버리지도 못하겠지만 삼독심이 어디 있나요?

삼독심도 그 자리엔 없는 것이거든. 하필 삼독심이 있어요. 탐진치, 뭣을 버린단 말입니까? 물거품처럼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하는 건데 버리긴 뭘 버린다 말이에요? 차라리 버린다면 눈을 버린다는 말이나 꼭 한가지라 말이죠. 그러하니 꼭 허공을 버릴라 하는 사람이나 허공을 걷어잡을라 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둘이가 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에요.

허공을 피할라고 했는데 허공을 피할 수가 있느냐. 허공을 잡을라고 했는데 잡을 수가 있느냐. 만날 허공하고 같이 있는데 하나의 사고방식에 따라서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망상을 방하착해라 하는 것이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하니 우리의 마음자리 이 자리도 사실로 먼 곳도 아니고 가까운 것도 아니거든. 왜 그러느냐. 멀다 하면 끝없이 먼 거라. 우리가 마음을 찾아 나서면 허공 전체를 뒤져도 마음 못 찾아. 왜 그러느냐. 찾는 그놈이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야 잘 했든 못 했든 찾는 그 놈이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못 찾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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