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십념(十念)

‘악’ 속에 ‘선’ 있을 수 있고

‘선’에서 위선 찾을 수 있다.

중생 건지기 위해 국가 위해

악을 잘 이해하고 그 효용성도

이해할 줄 아는 지혜 필요

 

그러므로 이 둘 다 참된 그 자리란 것이 워낙 하나뿐이지 그것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지경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원만하게 알이 통통 찬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참된 그 자리를 알았다, 바로 그런 자리다. 그래서 알았다는 이 자리에서는 즉한다는 염을 버리고 오직 한 가지의 진리성만을 나타낸다.

공상역공에서는 참된 진리의 중도(中道)를 설명한 것이고 공공역공은 현실에 즉해서 중도의 원리를 말한 것이고 소공역공이라는 데서는 참된 것도 진리도 현실도 모두 다 아니면서, 이렇듯 모두 다 아닌 그것이 완연히 우리에게서 파악되어지고, 실상인즉 그 내용은 한 군데도 기울어진 것이란 없고, 또 그 꼭 들어맞는 중이라는 것도 없는, 가에도 중간도 아닌,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편벽된 자리에서 섰거나 혹은 이것이 꼭 옳다는 그런 자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닌, 그러면서도 오히려 참된 중도(中道)의 진리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원효대사의 이 철학은 그냥 논리만 따져 나가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울 것이므로 다음에 예를 들어 풀이해 본다. 불교의 계율에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 술이라면 나는 기어이 마시지 않는다. 술 먹으면 좋지 않은 일이 많다. 술에 취하면 항용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아니 할 일을 저지르고 생떼 부리고 하는 것, 모두 안 될 일이 아니냐. 이것은 속에, 그러니까 현실에서의 중도의 뜻을 말하는 얘기다.

다음은 술이란 왜 먹어선 안 되느냐? 술은 마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방면으로 정신을 흐려 놓아 혼란에 빠뜨려 자칫하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하고, 또 경제적으로도 부질없이 낭비를 하게 되어 가정생활에 파탄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일쑤다. 이것은 진리의 내용을 밝히어 설명한다. 나는 술을 안 먹으니까 이것이 꼭 옳다. 너는 술에 취해 있으니까 기어이 안 된 일이다. 이렇듯이 술 안 먹는데에 얽매어 가지고 술자리 같은 데서 탕탕 상을 치며 그만 내다던질 듯, 그런 짓 하면 못쓴다고 술 먹는 사람에게 대해 마치 싸움을 걸 듯 덤벼든다. 그릇된 일 하는 사람보면 기어이 저는 옳고 그 사람은 나쁘다고 규정짓는다. 선(善)을 내세워 싸움하려 들고 나는 이 만큼이니 옳다고 하는 이런 것도 딱한 일이다.

그렇다고 나쁜 일을 해도 괜찮다는 소리가 아니라, 악이건 선이건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차라리 악을 잘 이해하여 때로는 그 효용성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나 또는 우리 국가사회를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충무공(忠武公)과 같은 행동으로 사람의 생명까지도 뺏어가며 대의(大義)를 지킨다는 그런 생각도 해 봐야 한다.

또 이른바 악이라는 것 가운데에 드물게 선이 있을 수도 있고 흔히 우리 주변에는 번지레하게 가장 위선(僞善)이 보인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유명한 문학 작품으로 춘향전(春香傳)이 있는데 춘향이는 기생의 집에 태어났다는 것. 천한 기생질 하던 월매의 뱃속에서 났다는 것이 어찌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야 있는가. 미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연꽃과 같이 툭 트인 인물이 나올 수도 있고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임금이며 왕비며 하는 이들 중에도 해괴한 일이 생겨나고 또 별별 잡보가 다 있는 법이다.

이런 사리(事理)를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는 그 자리를 일컬어 이변이불착중(離邊而不着中)이라고 한다. 치우침도 없고, 중간도, 잡스런 것도 없는 그 오롯한 진실성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불 생활 하는데 있어서도 이것 저것 잡념이 많으니까, 업장의 소멸을 위해 무엇보다도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자. 이것은 공상역공(空相亦空)이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가고 대자 대비에 접한다. 비록 하품, 하생일지라도 필경엔 상품, 상생으로 올라 우리는 왕생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나무아미타불하자. 이것은 공공역공(空空亦空)이다. 극락세계에 가거나 왕생을 한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그러한 왕생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중생에게로 나와 대자 대비를 베풀고 극락엘 갔다, 중생에게로 왔다.

사바가 곧 극락이고 극락이 곧 사바일 수 있는 이것은 소공역공(所空亦空)이라 한다.

진(眞)도 아니고 속(俗)(현실)도 아닌 한군데 치우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중도(中道)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진리의 생활을, 그러니까 보은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참된 염불 생활이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염불이란 것도 상당히 어려운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어떻게 어려운 것을 다 할 수야 있으랴. 여기에 좋은 방법이 있다. 그 어려운 것을 다 자꾸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온전한 생각으로 그냥 염불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면 다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 무거운 바윗돌을 두 사람이 목도를 한다고 하자. 그들은 목도를 해 돌을 옮기면서 연방 영치기 소리를 낸다. 돌을 메고 가는 데에도 무척 힘이 들 텐데, 또 입에서 소리를 낸다면 더욱 지칠 것이다. 옆에서 보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짊어질라, 소리 낼라 힘을 배로 쓰는 것 같다. 목도하는 데에만 집중해야 할 힘이 두 갈래로 분산될 것만 같다.

실지로 물리 현상으로 본다면 틀림없이, 에너지의 발산이 어깨와 입으로 두 갈래로 분산되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영치기 영차’ 소리를 낼라치면 피로한 줄도 모르고 새 힘이 솟아 나와 그들의 목도는 흥겹게도 그 소리를 맞추어 돌을 거뜬히 옮겨 가는 것이다. 이를 군호 맞춘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군호라는 것이 이를테면 진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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