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사 선지식 초청법회-혜국 스님(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자기 자신 놓치지 말아야 고요 찾아
고요할 것 없는 본래 고요가 참모습

수처작주하기 위해서는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고
고통을 손님 맞이 하듯 해야 돼

<“당신이 눈 감는 날, 깨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인생은 감정 놀음에 요동치기만 했을 뿐 당신 뜻대로 마음껏 살아본 적이 없다고요”.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며 혜국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수처작주하는 삶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스님은 자신이 주인이 되고 고통과 슬픔을 손님으로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한 번의 참절을 위해서는 만 번의 헛절이 필요하다며 부단히 좌절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정진이라고도 했다. 9월 21일 불광사 선지식법회에서의 혜국 스님을 만나본다.>

▲ 혜국 스님은1961년 일타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로 출가했다. 1970년 성불을 다짐하며 소지공양 이후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7개월 간 장좌불와 수행을 했다. 1973년부터 1994년까지 해인사, 송광사, 봉암사 등 전국 선원에서 수십 차례 안거에 참여했고 경봉, 성철, 구산 스님 등 문하에서 수행정진했다. 제주 남국선원, 부산 홍제사를 창건하고 현재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이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주인으로 살라'. 오늘 법문의 주제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양 다들 착각하고 살지만 부처님 안목으로 보면 내 안의 못된 성질, 화나는 성질, 내 맘대로 되길 바라는 욕망에 따라 나는 감정의 노예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죠. 이렇게 본다면 눈감는 날, 여러분은 감정의 흐름을 타느라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에서 벗어나고,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49년을 길에서 사셨던 것입니다. 이는 인류를 구하는 길이었습니다. 훗날에도 부처님이 걸어가신 길이 인류에게 얼마나 희망이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인 노릇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못된 성질에 빠져있고 죄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주인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요. 여러분들은 108배를 1년 동안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겠다 다짐했다가도 얼마 못가서 흐지부지되고 마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자신, 주인이 맹세하는 것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업을 따라가기 때문이죠. 시간만 되면 업을 따라 가고 싶어지는 게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참 어려운 일인데 1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업따라 사느라 낭비하고 있어요.

나를 깨우쳐준 성철 스님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동진출가한 후 열심히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 있습니다. 절에서 학교를 다녔을 때 글쓰기 동아리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러다 한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었어요. 고백도 못해보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서 혼자서 끙끙 앓은 거죠. 마음이 하도 힘들어 해인사에 계시던 성철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희랑대를 거닐던 스님을 앞에 두고 냅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세 번했죠. 성철 스님이 단박에 알아차리시더군요. 가시나 생겼냐고. 그리고서는 물건을 가리키며 이게 보이냐고 물으시더군요. 보인다고 했더니 무엇으로 보냐고 물으셨고 전 다시 눈으로 봅니다고 했죠. 불을 끄셨습니다. 다시 물으시더군요. “이거보이나”. “아니요. 안 보입니다”. “아까 눈으로 본다 했는데 어두우면 왜 안 보이노. 부엉이나 올빼미는 깜깜할수록 더 잘 보는데 말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입 역시 마찬가지다.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가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길이 주인으로 사는 길이다”.

성철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때 처음으로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것이 지난 1백년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꼽았습니다. 대개 종교는 자기 것이 옳다고만 주장하죠. 그런 교리 가지고는 세계평화는 물론 자기 가정도 평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모두가 한 허공입니다. 똑같아요. 벽을 허물든 아니든 한 법신이죠. 불교 외에는 세계평화 희망이 없다는 걸 토인비는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진리는 코앞에 있어
불교는 이처럼 내 벽을 허물고 온 우주가 나라는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수처작주 역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되려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죄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밤은 어둡지만 태양은 그 빛을 줄인 일도 없고 장소를 옮긴 일도 없습니다. 주위가 깜깜해진 이유는 지구가 태양광명을 안 받아들이겠다고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영원한 빛이라는 마음광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내가 죄인 것입니다. 마음광명에서 돌아섰던 내가 다시 돌아서면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는 죄가 없습니다.

주인이 되려면 먼저 믿어야합니다. 신앙과 신심은 다릅니다. 부처님법은 신앙이 아니라 신심이에요. 신심이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내가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감정에 끄달리는 것, 그것이 죄지 그 감정만 이겨내면 나는 죄인이 아니고 부처입니다. 어두움이 없어요. 그러나 믿는데서 그쳐서는 안 되고 발심으로 이어져야합니다.
한국선방문화는 너무 수행으로 치우치다보니 삶과 하나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판쪽은 또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수행과 따로 놀고 있어요. 전등불을 켜면 그냥 밝아지는 것이지 불과 밝음은 둘이 아닙니다. 수행도 중생구제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아픔과 함께 갈 수 있어야 수행입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와서, 죄가 없다는 마음광명을 본인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날마다 운명을 바꿔나가는 것이 주인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비교하지 말아야합니다.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이 존재, 인간은 여인숙이라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당도한다

한 번은 기쁨, 한 번은 좌절, 한 번은 야비함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들을 맞아 즐거이 모시라(중략)

고통, 슬픔 등을 내 마음의 영혼을 깨우기 위해,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자식들 가운데 부모말 잘 들으려고 온 아이들이 있나요? 뭔가 자기가 받아야할 빚이 있거나 찾아먹어야 할 것이 있거나 할 때 자식들로 태어나는 것이죠.
남과 비교할게 아니라 기쁨, 슬픔을 그저 받아들이십시오. 눈으로 담는 것은 나가는 손님, 귀로 들리는 것은 들어오는 손님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손님대접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이영도 시인의 단풍이란 시를 감상해보죠.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선 정이어라
못내 턴
그 청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향로!

단풍이 지는 것이나 새싹이 돋아나오는 것이나 여러분들에게 들어오는 손님이나 똑같은 원리입니다. 이를 잘 살피면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걸음걸음 진실을 밟으라
제가 소지공양을 하고 태백산 도솔암에가서 장좌불와하며 공부를 하려는데 공부가 잘 안되더군요. 그래서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자살시도를 했는데 낙옆 위에 떨어져 살아났죠.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죽일 권리가 없다고요. 나는 내 혼자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공기를 만들어 내 코에 넣어준 공덕으로 살고, 물이 내 입에 들어와 갈증을 해소해주는 등 우주전체가 나를 왕자처럼 떠받들어 주기에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 자연과 나는 하나였습니다.

부처님 법을 깊이 믿어보면 우리는 희망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좌절을 안 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하루를 살되 깨어있는 것이 정진입니다. 그 방법을 실천하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죠.

아까 우리에게 찾아오는 손님 이야기를 했었죠. 우리는 눈으로 나가는 손님과 귀로 들어오는 손님을 쥐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그러면 홧병이 되는데도 말이죠.

마음에 붙들고 있으면 상처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모든 세계가 공적함을 믿어야 합니다.

옛 어록에 어떻게 수행해야하는지를 묻는 제자와 이에 대해 답을 하는 스승이 나옵니다. 스승은 ‘오직 걸음걸음 진실을 밟으라’고 답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루하루 내 감정을 따라가고 있느냐 아니면 내 마음 부처를 기쁘게 하느냐 이것을 짚어보는 것입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를 때는 감정에 끌려가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됩니다. 항상 자기자신을 놓치지 않고 있으면 자기 고요를 찾게 됩니다.

더 이상 고요할 것이 없는 본래 고요가 여러분의 마음고향, 본모습입니다. 어떤 좌절도 안 느끼고 희망을 느끼는 것이 여러분의 집입니다. 그것을 위해 내 본래 인격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주인이 주인 노릇 하기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번의 참절을 하려면 만 번의 헛 절을 해야하고 한 번의 참된 기도를 위해서는 만 번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기안에 망상이 일어날 때 내안에 찌거기가 있다는 걸 먼저 알아차리고 그 모습을, 자기 단점을 싫어하지 마세요. 자기의 못된 성질을 사랑하세요. 내 안의 단점이 그래도 날 이끌고 와서 이렇게 부처님법을 만났구나하고 생각하세요. 이 단점을 기도로 바꿔 관세음보살로 이뭣고로 바꿔 수처작주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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