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당처가 빈줄 알아야한다 ①

애욕의 당처 비어 있는데

생각 일으켜 탐진치 일으킨다

그 자리 비어 있는 줄 알면

애욕의 덩어리 눈녹듯 사라져

부처님의 그 모습은 참 좋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고, 그다음엔 중생들은 그렇게 안되는 게 전부 애욕의 덩어리라. 애욕도 천층만층이에요. 그 애욕이 있는데 탐진치까지 가해졌어. 그러니까 거기서 얼굴 빛깔이 자꾸 달라져요. 애욕만 있어도 거울에 모습이 나타나겠는데 탐이 가해진다든지 성내는 게 가해진다든지 어리석음이 가해지는 데 따라서, 미련하게도 뵈고 독하게도 뵈고 어떤 때 이쁘게도 뵈고 다 이래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은 내가 왜 이 말을 하느냐는 건 이유가 있어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느냐.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애욕의 당처가, 우리는 모두 애욕의 덩어리라 합시다. 내나 여러분들이나. 애욕의 당처가 비었다는 걸 이건 과학적으로. 그 자리 비었거든. 애욕을 우리가 어떻게 볼 거예요? 무슨 모습이 있어야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데. 그거 빈 거 아니라요? 아하, 애욕의 당처는 빈 거로구나. 공연히 비어 있는데, 아무 것도 없는데, 내 생각을 일으켜서 말이지 삼독심, 탐진치를 일으키는구나. 내 생각을 안 일으키면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을 건데 내 생각을 일으키니 탐진치로구나. 공연히 없는데 내가 탐진치, 애욕 이런 걸 갖다가 만들어 내구나.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 생각을 하면은 당장 이 자리에서 달라집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애욕덩어리거든요. 그러면 애욕덩어리는 탐진치, 사량 분별 모든 것이 꽉 뭉쳐 있다 말이죠. 그러나 그걸 갖다 걷어 잡을래야 걷어잡을 수 없네. 그 어디 다른 데 있는 걸 내가 갖다 쓰는 거 아니거든. 내 생각을 일으켜서 성날 때 성을 내고 웃을 때 웃고 좋아할 때 좋아하고 이래 하는 겁니다. 다만 내 마음자리가 한 생각을 일으켜서 그렇게 할 따름이거든요. 그러면 그 자리 빈 거 아니에요?

그러하니 그 자리가 빈 줄만 알면은 애욕의 덩어리는 어느 사이에 눈 녹듯이 없어져 버리고 청정법신이 되버리는 겁니다. 이래서 내가 이 얘기를 자꾸 하는 겁니다. 그러하니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 두 말할 것 없이 허공으로서의 내라 할 땐 허공에 무슨 놈의 애욕이 있던가요. 무슨 놈의 탐진치가 있던가요. 다 여기 들어가는 거라. 그러하니 우리가 어리석게 공연히 원래 없는데 한 생각을 턱 일으켰어. 일으켜서 막 부회(화)를 내고 성내고 뭐하고 해 쌓는 거, 그거 전부 쓸데없는 짓거리 아니에요? 그것이 본래 있다면 써도 좋아. 손해가 간다 할지라도 본래 어디 있나요? 여러분의 가슴 속에 탐진치가 어디 있나요. 한 번 내 보세요. 못 찾습니다. 못 찾는 게 아니라 없으니까. 또 여러분의 가슴 속에 애욕이 어디 있나요? 애욕이란 말이 나타났다지만 애욕의 덩어리인데, 우리 몸은 애욕의 덩어리라 하고 그 뿌리가 어디 있나요? 없어요. 공연히 아무 것도 없는데, 텅 비어서 허공과 꼭 같은 내 몸인데 그만 내 스스로 이 생각도 일으켜. 저 생각도 일으켜. 그래서 애욕의 덩어리를 내가 만드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자신들이 만드는 것이거든요. 그러하니 여러분은 생각할 때 부처님의 몸매와 같은 몸매를 가질라면은 애욕의 당처가 비었다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애욕의 당처가 비었으니까 인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 안 하면 돼. 그 말이에요. 알겠지요?

순전히 탐진치든지 애욕이든지 사량 분별이든지 뭣이든지 내가 한 생각을 일으켜서 내가 지어낸 것이거든요. 지어 내는거 안 지어내면 되지 안 해요? 그거 아니에요? 빤한 것이거든요. 그러나 이런 말을 들어도, 알아도 어떤 경계가 딱 닥쳐 놓으면 그만 성을 낼 때 성을 내고 웃을 때 웃고 좋다 나쁘다 이래 싸니 그것이지, 그러나 저러나 성을 내도 성을 내는 그 앞 소식이 비었다. 또 좋은 일이 있어도 웃어. 웃는 그 앞 소식도 비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이건 내가 한 여김을 일으켜서 이렇게 한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따져 들어가세요.

이것이 여러분들의 실지 공부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을 가진 것이 만 년 염불한 거보다 낫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염불이 어떻게 할것입니까. 염불했다 해서 복이 들어옵니까. 염불하는 순간에는 내가 잡념이 없어져요. 이것이 하나의 공덕이에요. 그러나 잡념이 없어진 줄 모르고 무엇을 구해서 염불을 한다는 것은 도리어 도깨비 밖에 되는 것 아닙니다. 나는 염불 잘하는 사람들 도깨비다 난 이래 합니다. 난 말합니다. 서울서. 부산 와서 그런 말 했어요. 어느 보살 참 염불 절 한다. 도깨비로구나. 역시 눈이 좋지 못해. 참말로 잘 한다는 사람 눈이 푸르러 그런 기운이 있어. 모습놀이하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서울서 설법 때 그런 말 했어요.

그러하니 여러분이 허공으로서의 내다. 탐진치 애욕,… 무엇이든지 그 당처가 전부 빈 거다. 내 한 생각을 일으켜서 애욕심을 일으킨 거다. 탐진치를 일으킨 거다. 사실을 사실대로만 생각하면 됩니다. 없는 걸 우리가 억지로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만 생각을 여러분들이 참말로 한번 그 생각을 가지면은 잠깐 사이에 그 생각을 가지면은 이십 년 삼십 년, 염불한 것보다 낫습니다. 그 공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왜 실리를 택해야 되지, 실다운 이익을 택해야 되지 왜 헛된 놀음을 하겠나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아까 부탁한 것 꼭 그리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내가 자주 마음과 타협을 하지 마라 눈과 타협을 하지 마라 귀하고 타협을 하지 마라 늘 그러죠. 이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문제이고. 실은 마음과 눈, 요놈 두 나가 들어서 사람을 우리 몸뚱이 병신 만들고 있습니다. 만날 눈과 타협하고 귀와 타협을 하고 코와 타협을 하고. 마 타협하는 통에 그래서 본래의 소식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꼭 그렇습니다. 이거 눈과 타협을 하고 귀와 타협을 하고 이렇게 해서… 실은 이 망념, 망상, 이것이 실다운 자체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을 해보십시오. 성을 낸다든지 웃는다든지 그 뿌리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만 어쩌다 경계에 닿질려서 내 마음에 좀 맞으면 웃고 내 마음에 틀리면 성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상 분별 사량 번뇌, 삼독심도 여기서 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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