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보는 자리가 극락정토
아미타불 보는 자리가 극락정토
  • 최범술 스님
  • 승인 2014.09.2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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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십념(十念)

만인에게 통용되는 평등성 ‘공’

평등한 자리 역시 ‘공’이다

진리는 속된 현실을 버리고

참된 것 가려낼 줄 알아야

 

최고로, 가장 높아야 그 앞에서 누구나 머리가 수그러지고 숭배를 한다. 최고로 높은 것이 있는데 다음의 제2나 제3을 보고 숭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셋째는 귀취지의가 있다. 목숨을 돌이켜 여기 대해서 취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아미타불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진리를 총망라해서 갖고 있고, 또 가장 놓은 것이고 무릇 모든 사람이 모든 진리가 다 여기에 돌아가 목숨을 돌이켜 우리가 구원을 받고 보은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뜻이 다 한데 겸해 있으며 종교라고 하는 ‘마루종’자가 역시 이 셋을 포괄하는 점으로는 같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스럽고 깨끗한 마음으로 된다. 삼업(三業)을 맑혀, 체, 상, 용(體相用) 그러니까 그 자체나 양상이나 일체의 공용성(功用性)을 죄다 버린 완전한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가 모든 속된 생활을 떠나고 이러한 절대적인 지경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 염불하는 것이다.

여기 원효대사는 말씀하시기를 외부 세계의 모든 것에 물들거나 집착해 있는 염착심(染着心)을 모조리 여의어야하고 이를 여인 지경이야말로 곧, 만덕(萬德)을 갖춘 아미타불의 보신(報身)을 보는 자리라 하였다. 아미타불을 보는 자리가 곧, 극락 정토다. 우리는 이 극락정토에 생활을 영위한다. 이에 대해서 재미있지만 그러나 좀 알아듣기 힘들고 어려운 철학이 있다.

첫째는 공상(空相)도 역공(亦空)이라는 것이다. 이는 원효대사의 말씀. ‘공상도 역공이라’는 것이 무슨 소리냐 하면, 여기서 공(空)이란 ‘이것이다’하고 단정하는 그것을 말한다. ‘이것’이란 저속하고 현실적인 것을 일체 버린 것, 진리를 가리킨다. 진리란 만인에게 통용되는 절대적인 평등성(平等性)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인에게 통용되는 평등성이 들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이 역시 공(空)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공공(空空)도 역공(亦空)이라는 것이다. 그대로 풀이한다면, ‘공을 공이라 하는 것도 또한 공이다’이런 말이다. 이것이 무슨 소린가? 진리를 진리라고 하는 것, 그것은 만인에게 통용되는 평등한 자리를 설정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등한 자리가 또한 공이다 하는 것이다. 진리를 현실 속으로 끌어들어 해해 놓는 것. 이를테면 진리란 광대무변한 것인데 이를 현실의 특수한 틀에 적용시켜, 이것은 이것이며, 이런 자리다 하는 것은 평등한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에서 일단 뛰쳐나와 현실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을 설명하는데 ‘자리’라는 말을 썼다.

그렇다면 과연 현실적으로 ‘평등한 자리도 역시 공이다’하는 것이 무엇을 말함인가? 현실 사회를 놓고,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는 존재론적(存在論的)인 단정이나 또는 옳다 정당하다고 하는 따위의 실천 모럴의 테제가 보여 주는 차별상은 무엇인가? 옳은 것은 어디까지나 옳다, 어떠한 이유로 하여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하는 차별상을 이것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공(空空)도 또한 공(空)이다. 평등에서도 공은 공인 것이다. 여기서 공공(空空)이라는 것이 현실의 차별을 나타낸 말이다. 왜냐하면 공을 공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없도록 하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현실은 이를 부인 하거나 무(無)로 돌릴 수는 없는 ‘존재(存在)’임에 틀림없다는 차별의 분별이 되어진다. 즉 이것은 시유(是有)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다고 하는 단정과, 이것은 옳고 또 이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분별을 말하고 있다.

셋째는 소공(所空)도 역공(亦空)이다. ‘공한 바도 또한 공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의 진리다운 바도 또한 공이다. 이것은 무슨 소린가? 앞에서 진리는 공이다 하였고 그 다음 현실도 공이다 하였는데 이번에 셋째번으로는 ‘진리다웁게 하는 바’를 또 가려내었다. 이것은 첫째번과 둘째번 테제가 이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셋째번 테제다. 공한 바란 진리다운 것, 그러니까 진리성을 완연히 드러내어 설명하는 것이다. 현실을 가져오거나 진리를 테마로 삼아 명제(命題)를 내어놓거나, 실상인즉 이 둘이 다 하나의 것이며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지적하는 말로서 역공(亦空), 또한 빈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현실과 진리가 둘이 아니다 하는 것을 뜻하여 또한 이라는 역이 처음부터 줄곧 따라다닌 것이다.

앞에서 ‘진리답게 하는 바’를 가려내었다라고 소공을 설명하였는데, ‘가려내었다’는 것은 앞의 두 테제를 통해 새로운 테마를 찾아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 위의 둘과 셋째번의 소공이란 것은 앞의 둘의 종합한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진리와 현실을 종합한 그것을 진리성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또한 공이라는 것이다. 진리와 현실이 둘 다 통틀어 하나를 본위(本位)로 삼고 있다. 하나라고 하는 것을 일제(一諦)라, 또는 진리성 하나를 위한 것으로 일법계(一法界)라 이런 말을 한다.

첫 번째 공상역공(空相亦空)에서는 현실을 버려야 된다. 진리는 속된 현실을 버린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현실의 각계에 걸쳐 집합된 양상에 지양해야 된다는 말이었다. 둘째의 공공역공(空空亦空)에서는 우리가 현실에 즉해 있기 때문에 이에 의지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타상(依他相)이다. 현실 그것에 의지하여 우리가 주관을 세운다. 이런 말이다. 셋째 소공역공(所空亦空)은 이 현실을 또 버려야 된다는 것이다. (원효대사 말씀으로는 속(俗)) 현실을 버려야 된다. 또는 현실에 즉해야 된다. 버려야 된다, 즉해야 된다, 현실 안에는 이런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버려야 된다, 즉해야 된다, 라는 것은 두 가지 말이다. 하나는 아니면서도 이 논리에서 일관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첫째번의 버려야 된다는 말 가운데에서 속된 것은 버리고 참된 것을 가려내는 그런 뜻이 들어있고, 둘째의 현실에 즉해 나가야 될게 아니냐는 말에는 현실에 즉해서 그 현실에서 참된 것을 찾아낸다는 뜻이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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