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의 ‘미(彌)’는

하나의 큰 것 믿는다는 의미

자신이 깨치고 그 다음에

남을 깨치도록 돕는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행동으로

성취시켜 나가는 것이다.

 

13-3. 보은게(報恩偈)

이런 사상은 그가 선을 너무 편협하게 생각한다는 것과 세상에는 집단적인 악이 존재한다. 뚜렷한 사실과 또 스케일이 큰 광범위한 선의 참 모습을 그가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므로 이 점은 우리가 퍽이나 생각해 볼 문제다. 이에는 신라 화랑(花郞)의 대종장(大宗匠)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백결(百結)선생이라는 분도 훌륭하였지만, 백결 선생이 자기의 스승으로 성인으로 받들어 모시던 물계자(勿稽子)라는 어른이 있었다. 물계자는 국가가 위태로울 때 우리는 나아가서 전쟁을 해야 하고 칼 쓰는 법, 진 치는 법을 알아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자신도 그것을 익혔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칼을 뽑아 들고 휘두르며 ‘살려지이다’하는 것이다. ‘살려지이다’라는 이것은 그가 칼을 쓰는 것이 결코 사람을 죽인다거나 악업을 짓는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의 선, 절대의 대 사회라는 목적을 가진 큰 의리 대의(大義)에 산다는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신념의 소리였다. 이것은 또한 중국철학의 근본되는 주역(周易)에 있는 글, 천지의 대지에 살려지이다. 하는 소리다. 그 소리 ‘살려지이다’를 불교적으로 본다면 진언(眞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신으로 입으로 육체적으로 삼밀(三密)이 가지해서 우러나오는 소리가 이러한 큰 진언이 되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은혜를 입고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 정성스러운 은혜를 얼마나 감사스러운 일인가 느끼고 스스로 어떻게 보은하도록 하느냐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신구의업(身口意業)에 몸으로 입으로 마음 쓰는 것으로 쉴 사이 없이 무유간단(無有間斷)으로 지속하는 기쁨으로서 이러한 생활을 해나간다. 우리들 일상 생활이 늘 이래야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보은하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자연스러이 생각마다 염불을 외는 것이다. 그래서 십념(十念)이라고 하여 열 번 염불한다.

 

14. 십념(十念)

나무아미타불(十念)

지금까지 이론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이런 것 저런 것 늘어놓아 퍽이나 복잡하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것은 간단하고 단순하고 하기 쉬운 것이라야만 이를 받아들인다. 하기 쉬운 것이라야지 복잡하고 어려워서는 일상생활에 쓰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생활에 맞추어 간간하고 단순한 진리가 마련되었다. 이것이 나무아미타불이다.

앞에서 풀이하였지만 여기서는 내 나름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생각해 본다.

남(南)이란 우리가 다들 ‘바르다’는 말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한국에서는 이것을 남녘남이라 한다. 임금이 바로 앉아서 선정을 베푼다는 뜻. 임금은 군주주의(君主主義)라는 것보다도 단군(檀君)이나 요순(堯舜)의 시대에서 볼 때 나라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어른, 성인(聖人)을 말한다. 임금이 나라 일을 바로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는 남쪽을 향해 앉는 것이다. 이것은 남쪽이 정대하고 바르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오행설(五行說)로 비추어 보는 견해다 오행은 중국사상이 아니라고 신채호(申采浩)선생은 말한다. 팔괘(八卦)의 여덟이라는 수가 중국의 것이고 오행은 우리 고조선의 단군 계총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에서 중국의 수는 8이고 우리는 5가 정수라고 하였다. 알기 쉽기로는 윷놀이가 있다. 처음 하나 도에서 비롯하여 개, 걸, 윷, 모로 끝난다. 이래서 우리의 원시적인 수는 모고 그것이 마지막이다. 모 위는 더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겨레의 사상은 5를 기분으로 하였다. 첫째 손가락의 수가 다섯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섯을 기본수로 정하고 이를 철학적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여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설에 비추어 볼 때 남은 불에 해당한다. 불은 광명과 정열의 상징이다.

또 무(無)는 무엇인가? 없을 ‘무’자다. 없다는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아서 알 수 있는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허공이다. 그러나 어디로 어떻게 붙잡아서 이것이 허공이다 할 수 없으므로 실상은 이를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가장 큰 것을 일컬어 없다, 무다 하는 것이다.

가장 큰 것을 우리는 무로 표현하였지만 이것은 뜻의 풀이고 보다 직접적으로 이를 소리로, 발성으로 나타내면 어떻게 될까. 항용 소리의 기준은 아(阿)이다. 아어오우으이 하는 자음이 붙지 않은 기본음인 모음에서 제일 첫째 소리며, 따라서 가장 큰 것이 ‘아’다. 아빠, 아이참, 하는 따위로 이것은 감동으로서 발하여진다.

다음 미(彌)는 무엇인가? 나는 이를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믿다’하는 것이 미타(彌陀)란 말이 되었다. 믿는 것이다. 하나를 가장 큰 것을 믿는다. 가장 큰 하나의 그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깨치고 다음에 남을 깨치도록 하고, 그 깨친 바의 행동을 궁극까지 성취시켜 나가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이를 나대로 내가 감히 설명한다면 아주 공명정대하게 정열적으로 무형의 것을 붙들어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유형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러자면 하나의 큰 기둥을 믿어 이를 깨치고, 남을 깨치도록 하고, 그리고 그 깨친 바를 행동화하여 실천한다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은 물론 범어지만 우리말로 내 해석으로서 생각해 보아도 역시 재미있다. 이런 뜻에서 나무아미타불은 바로 우리말이고, 우리말의 진언(眞言)이라고 생각한다.

나무아미타불은 진언이기에 총섭지의(總攝之義)가 있다. 모든 것을 두루 포섭해 가진 진리다. 둘째는 독존지의(獨尊之義)가 있다. 홀로 가장 높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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