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 그림 최주현

사람이 별거 아닌 거 가지고도
이 천지를 획득할 수가 있고,
그저 규모가 큰 거를 향해서 간다고 해서
크게 깨치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발 밑에서 깨쳐야 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러니까 내가 항상 그러죠. 과거 미래 현재를 한데 합쳐서 떡을 세 켜만 해놓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으면은 많은 대로 일곱 켜를 해놓고, 많으면은 아홉 켜를 해놓더라도 그저 세 켜만 해놓고 해도 되고, 또 세 켜를 못 해놓으면 한 켜만 해놔도 초, 향 그리고 다기물, 큰 그릇에 물 떠서 상 옆에 하나 놓고, 너무 섭섭하걸랑 과일 세 가지를 한데 합쳐서 한 그릇에 놓고 그러고 지내면 벌써 조상들은 법당에 들어오면 어디부터 보는 줄 아십니까? 스님네들 마음부터 봅니다.

그러면 스님네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지내느냐 하면은 아, 이 재(齋)비용은 얼마나 들어왔고, 얼마치를 흥정했고 얼마가 남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거기부터 들어옵니다. 거기 들어왔다가 위패로 돌아갑니다. 위패 옆에 꽃을 해놨다면 꽃에 응접하고요. 그렇게 자유스럽게 왔다가 자유스럽게 나퉈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보면은 벌써 그 상이 덜 차려졌고 더 차려졌고 요런 것까지도 생각하게 되고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니 이런 공부 하는 스님네들한테 벌써 척 들어오면은 삼계(三界)의, 삼세(三世)의 그 삼심(三心)이 일심(一心)으로써 그냥 광대하게 벌어진 것을 착 앎으로써 “허허!” 하고, 아주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써 벗어나게 되는 건지 모릅니다. 스님의 마음에 들어오면은 스님의 마음의 차원에 따라서 그 차원대로 알고, 또 차려놓은 것도 그렇게 뜻이 있으니까요. 그 둥글어서 둥근 안에 모두 들어서 천지가 다 내 천지이니까, 내 거 아님이 없으니 그 조상한테, 내 거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나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으니 어떤 거를 쳐야 되며 어떤 것이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까지 조상들이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벗어나게 되죠.

그런데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서 그런다면은, 그 음식이 맛있고 맛없고 덜 차리고 더 차리고, 이런 데만 집착을 하고 온통 그냥 이집 저집 일가친척으로 다니면서 살아있는 것처럼 내 말도 듣지도 않고, 내가 와도 본척 만척하고 이런다고 사단이 벌어지죠. 그래서 죽은 집에 가서, 죽은 사람이 자기가 죽었다는 걸 인정 안 하고 산 걸로 생각을 하고, 거기 어정거리다가 일가친척이 오면은 자기를 본체만체 했다고 탁, 그냥 그럴 수가 있느냐고 떠다박지르면 그게 병나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은 이 마음공부를 필연적으로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생활 자체가 교재고 생활 자체가 바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재료니깐요. 이제 위패도 그, 재(齋) 지내는 거와 결부돼서 지금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나셨지 해롭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나신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당시에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게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지금까지도 그냥 여여하게 살아계시고, 죽는다 산다 하는 게 없이 그냥 계십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대로 그 뜻을 받아서, 우리가 잘 심사숙고해서 듣고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데에 목표를 둬야 되겠습니다.

간단하게 재 지내는 거 얘기해드렸죠? 그 천도재를 해도 억만금을 내놨다 하더라도 우리는 천도재를 그렇게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차려놓고 하질 않아서 “싫다.” 한다면 나는 “가져가라.” 이럽니다. 그러는데 그 재 지내는 거, 위패를 해놓는 거, 위패를 거기다 붙여놓고서 그러지 말고 지낼 때마다 위패를 접어서 하시라 이겁니다. 붙여놓지 마시라고요. 그러면 벗어나는 데 지장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아무리 하셨어도 그러한 마음을 갖는다면 나도 못 벗어나는데 조상을 어떻게 벗깁니까?

그러하니 그렇게 아시고요, 또 한 가지, 허허허. 이거 이왕 얘기하는 끝에 얘기하죠. 방생을 할 때에, 나는 방생을 하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이 난다고 얘기했어요. 8ㆍ15 해방 되고 나서 수없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드는데, 차 대가리 위에 모두 빡빡하게 들어서서 타고 오죠. 그런데 그냥 가다가 이리로 떨어지고 저리로 떨어져서 머리가 깨지고 창자가 터져서 죽고 이렇게 하는데, 참 가관이에요. 차를 내려서도 자기 집 찾아가느라고 온통 서로들 헤매고 굶고서라도 그냥, 그 자기 집 찾아가느라고 기진맥진해서 쓰러져가면서 가는 모습들을 볼 때 그 처참한 거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고기를 잘 노는 거를 잡아다가 말입니다, 진흙에서 노는 미꾸라지를 잡았다면은 맹물에다가 딱 담가놓습니다. 허허허. 그러면 그게 온전할까요? 그거 미꾸라지뿐이 아니라 거북이랑 뭐 고기랑 모두 잡아다 놓으면은 잡는 데 죽고, 잡아다 놨을 때 죽고, 갖다가 물에 넣었을 때에 죽고, 찾아가다가 죽고, 허! 몇 명이나 살리는 겁니까, 그게? 살리는 겁니까, 그게? 오히려 고문하는 거지. 냉철하게 따져보십시오.
사람을 그렇게 해보십시오. 사람도 그렇게 했죠. 일제시대 때에 징용으로 끌려가고 탄광으로 끌려가서 그렇게 했었죠. 뭐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왕지사 선덕을 쌓고 방생을 하려면, 지금 부모 없이 사는 애들도 많고, 또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도 많고, 지금 이렇게 먹는 게 흔한데도 먹지 못하고 흔치 못하게 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다만 한 푼이라도 구제를 한다면 그것이 바로 공덕이 아닐까요? 그리고 방생을 하려면은 차라리, 스님네들도 천차만별입니다. 스님네들도 사찰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괜찮은데, 사찰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분들은 곤궁합니다. 한번 그것도 생각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사찰에 주지로 계신 분을 갖다주는 거보다도, 오히려 주지로 안 계신 분, 그냥 여기저기 다니며 공부하는 분들을 위해서 좀 생각해볼 수 있는 그 생각 말입니다. 그것이 공덕이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생각해보면은, 그르고 옳은 거를 전부 저절로 알게 돼 있어요. 그런데 사람으로 고등동물로 태어났어도 그르고 옳은 거를 모른다면, 부처님이 아무리 가르쳐도 그건 소용 없는 일이죠. 이날까지 부처님이 가르쳐 오시는데도 불구하고, 모습이 그저 이 모습 저 모습 보인다고 해서 부처님이 아니라고 보지 마세요. 한국에도 역대에 일컫는 부처님들이 많이 나셨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많고요. 모습만 각각이면은 죄 각각이라고 보지 마세요. 모두가 한 부처 한 제자예요. 여러분까지도 말이에요. 또 하나 빼먹은 게 없나? 아니, 빼먹은 거 같기도 해. 이왕 말하는데 뭐. (대중 스님을 향하여) 뭐 빼먹은 게 없니?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러하니까, 모든 게 여러분의 삶이 아니었더라면 종교도 없고 상대도 없고 상대성의 원리도 없고 다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올 때 형성시킨 장본인 선장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여북하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이 너희들의 몸뚱이는 허허바다에 띄워놓은 배와 같느니라. 그리고 그 몸뚱이 속에 들어있는 생명들은 중생으로 비유했느니라.” 몸속에 중생들이 잔뜩 탔죠? 지금 여러분 오장육부 속에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꽉 탔습니까? 비바람이 치고 그저 파도가 치고 이런다고 해서, 그 마음들 의식들이 다 제가끔 그냥 벌렁벌렁 뛴다면 배는 뒤집히게 돼 있죠? 여러분은 그냥 쓰러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배 속의 중생들과 그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지금 집, 시자 겸 관리인 겸 바로 집입니다. 그 생명들이 살고 있는 집 말입니다. 그래서 심부름꾼으로서 먹여주고 달라는 대로 주고, 목마르다면 물 주고 춥다면 입혀주고 그냥 다 이럽니다. 이러는 시자인 것입니다. 심부름꾼 말입니다.
그러니까 심부름꾼은 심부름을 잘 해야 하는데 자기가 그냥 자긴 줄 알아요. 자기가 혼자 사는 줄 알아요. 자기가 벌었고 자기가 망했고 자기가, 매사 것이 자기예요. 자기 내놓을 게 뭐 있어요? 자기라는 거 내놔보세요! 자기 몸속에 수없는 헤아릴 수 없는 천차만별의 모습들과 생명들과 의식들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혼자 산다고 그러겠어요? 더불어 사는 주인공이죠. 공해서 돌아가죠. 그러니까 공해서 돌아가는 그 자체를 다스리는 선장이 반드시 있습니다. 자기를 형성시켜 내놓은 수없는 광년의 겁을 거쳐오면서 자기를 형성시키고 형성시켰던 자기! 자기가 지금도 형성시켜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요거 한마디만 딱 하고 이제 넘어가죠. 사람이 지구라면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구가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내가 항상 그런 말 하죠. 지구가 버스라면 버스에 우리가 하나 잔뜩 타가지고는 그 버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고요. 그러면서 버스 안에서 내 거니 네 거니 내 의자니 네 의자니 하고 싸움박질들을 하고, 아수라장처럼 하고 서로 뺏고 잡아먹고 하고, 그 차 안에서 온통 난리가 나죠? 차 바깥은 한 치도 내다보지도 못하고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큰 일인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은 애 적이 있고 젊을 때가 있고 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사람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체들이 모두 그 에너지를 먹고 삽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 안에서 생산이 되는 거, 이렇게 해서 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 겸해서 도로 생산을 해내서 모두 사대로 통신이 되고 작용을 해서 이렇게 모두 삽니다. 그런데 점차적으로 나이가 먹어가면서 이게 쇠퇴해지니까 속에서 생산하는 것도 적어지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적어져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대중: 그렇습니다.
큰스님: 똑똑히 잘 들으세요. 적어지면은,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점점 몸 한 채에 그 에너지는 쇠약해지게끔 돼 있죠? 그러면 수명이 짧아지죠?
그렇듯이 지구가 몸이라면, 우리 천차만별의 생명들이 지금 아귀다툼을 하고 모두 먹고 살고 있습니다. 왜, 저 누에벌레가 뽕나무 먹듯 하고 갑니다. 우리 전체가 뽕나무 먹듯 해요. 생각해보셨습니까? 생각하시고 사셨습니까? 허허허. 얘기를 안 해드리면은 모를 것 같아서, 한 번도 생각해보는 점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러면은 누에가 뽕나무 먹듯 하고 그냥 버석버석 버석버석 먹어들어가는 이 에너지를 어떻게 다 충당을 한단 말입니까? 이거는 일체 만물만생이 다 지금 지구에 붙어서 누에가 뽕나무 먹듯 하고 가고 있습니다. 땅 속이나 바깥이나 허공이나 뭐 막론해놓고 그렇게 먹고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몸의 인체에 에너지가, 수명이 짧아지듯이 그 지구의 수명은 짧아지지 않을까요? 수명이 길겠습니까, 짧겠습니까?

대중: 짧겠습니다.

큰스님: 그냥 먹어들어가는데요. 그러고 나중엔 먹을 게 없으면 쓰러지게 돼 있죠. 그러면, 그게 쓰러지면 다 그냥, 생명들이 다 쓰러지게 돼 있죠. 사실 생각한다면요 참, 우리 사는 거 보면 벌레 같기도 해요. 뭐 아주 고상한 사람으로 아주 생각들 하지만요, 내가 생각할 때는요, 어떤 때는 딱할 때가 많아요. 나부터요. 나는 빼놓고가 아니에요.
그렇다면은 이 마음공부를 결사적으로 아니 한다면, 이웃 동네의 다른 혹성이나 다른 우주성이나 다른 별성, 다른 태양에 모두 연결이 두절돼버려요. 아시겠습니까? 두절이 되면은 그냥 다 죽는 거죠, 뭐.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장마가 들어서 크게 망가지고 이러니까 세계적으로 딴 동네 딴 나라에서 다 봐주듯이 말입니다, 딴 나라에서도 봐주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유지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듯이, 우리는 이 마음공부를 해야만이 팽창되는 거를 줄일 수도 있고, 타버리는 것을 대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벌레처럼 에너지를 그렇게 파먹는 게 아니라 마음의 공양을 먹을 수도 있는 그런 대치 방법이 아주 없는 거는 아닙니다.

마음이 선량하고 착하고, 서로 죽이지 않고 서로 뺏지 않고, 서로 그냥 순리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모든 게 된다면, 에너지를 먹어들어가는 게 삼분의 이는 줄어집니다. 이 모든 게 어디가 잘못됐다 하더라도, 예를 들자면은 이 지구의 오존층이 무슨 탈이 났다든가, 또는 비행기가 날아가다 탈이 났다든가, 무슨 어디가 어떻게 됐다든가 이런 문제들도 이 마음공부를 해야만이 그걸 대치할 수가 있습니다. 요만한 내 집안의 내 식구들만 생각하지 말고, 내 식구들을 보호할 줄 알아야 남의 식구도 보호할 줄 알지 내 식구를 보호할 줄 모른다면 남의 식구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을 벗어나게 못한다면은 어떻게 내가 벗어나며, 내가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면은 어떻게 내 식구를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내 식구가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지구의 모든 거를 벗어나서 통신이 되게 하고 에너지를 흡수하게 하고 모든 거를 자유자재하겠습니까?
그래서 별성은 수명이 길고 짧고 간에, 대체적으로 볼 때에 우주가 별성을 낳을 때에는 모든 거를 흡수해서 생산을 하고 또 생산을 합니다. 그러니까 콩 한 쪽 심어서 콩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분한테 공급을 하고, 또 하나는 콩나무로 또 화해서 또 공급을 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 진리를 타파해야 하는데 만약 이 마음공부를 아니 한다면 타파가 아니 된다 이 소립니다.

만날 우리가 그냥 잘되게 해주십시오, 우리 남편 잘되게 하고 우리 자식 나가지 않게 하고 뭐 어쩌고, 공부 잘하게 하고 이러고만 있을 겁니까? 그대로 실천해야죠. 나가든지 들어오든지 그저 좋은 말 하고, 따뜻하게 행동을 해줘서 집에 들어오고 싶게 만들어주고, 안으로 ‘주인공은 둘이 아닌 까닭에 주인공,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겨놔야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거기까지도 불이 들어와서 ‘나는 이제 나다니기 싫구나.’ 이렇게 해서 스스로 들어오게 만들어야지, 강제로 “너 요놈아, 요 깡통을 찰 놈아!” 그러고 욕을 하고 “네가 배울 때 못 배우면은 지게밖에 더 지겠니?” 이러면 그 말이 씨가 돼서 오히려 자식들이 활발치 못하게끔 살게 만들어주는 그 부모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모릅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고 또 부모와 자식도 그렇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부모가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자식을 잘되게 하는 마음으로서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세상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아버지, 참 세대가 틀려서 할 수 없구먼!”이러고, “그거 세대차가 나서 아이고, 그 구태의연한 말씀 좀 고만하세요.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고선 구박이나 주고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왜? 좀 융통성 있고 지혜롭다면 “예, 아버지!”, “예, 어머니! 어머니가 그저 잘되라고 하시는 그 말씀 깊이깊이 새기겠습니다.” 하고 이렇게 대답을 한다면, 그렇게 안 하더라도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자기가 그렇게 말해서 아들이 잘된 줄 알고 좋아서 기뻐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그리고 또 좋아서 그 관(觀)하는 거를 가르쳐드리면은 돈이 드니 못합니까, 무슨 노력이 드니 못합니까? 자기를 자기가 믿고 찾는데 뭐가 원통해서 못합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게 만들고 자녀들과 부모들을 다 그렇게 이끌어준다면, 승천을 하지 말래도 승천을 하게 돼 있어요. 벌써 죽기 사흘 전에 턱하니 그리로 저절로 자동적으로 가게 돼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그 입력이 돼요. 숙명통 타심통 신족통 또 천안통 천이통, 이것이 다섯 가지가 한꺼번에 종합된 컴퓨터예요. 이 컴퓨터에서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다 거기에 입력이 됩니다. 입력이 된다면 입력된 대로 나오죠. 그래서 내가 가르칠 때에 입력이 그렇게 돼 있는 데다가 입력을 다시 한다면 바로 누진(漏盡)으로 벗어나요. 자꾸 말입니다, 그건 없어지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라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벗어나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고만 해버릴까요?

여러분이 내가 용어를 몰라서 말이 좀 더듬거리고 좀 안됐다 하더라도, 배운 여러분은 잘 듣고 행하고 진실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질문하실 것 있으면 질문하세요. 사무장님도 어디서 뭐 받았죠? 오늘 질문하지 말게 하시라고요. 내 그런 거 뻔히 얼굴 보면 나타나는 걸요 뭐. 허허허.
사회자: 원래 없어요, 스님.
큰스님: 사람이 별거 아닌 거 가지고도 이 천지를 획득할 수가 있고, 그저 규모가 큰 거를 향해서 간다고 해서 크게 깨치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발 밑에서 깨쳐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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