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일요법회 - 원철 스님(해인사승가대학장)

‘중도’의 또 다른 이름 ‘연기’
연기알면 세상 이해도 높아져
타인 공감하는 능력도 향상
고(苦) 줄여주는 좋은 수단

<불법과 세간법은 둘이 아니다. 항상 듣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자와 타를 구분짓고 고를 만들어낸다. 원철 스님은 불교 기본 교리인 연기법을 빌어 불법이 2천5백년전 부처님께서 설명한 박제된 이론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을 계속 주지시켰다. 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실천적 삶으로 연결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스님은 사랑, 간고등어 등을 예로 들며 연기론에 관한 풍부한 해석을 시도했다. 8월 24일 서울 길상사에서 있었던 일요법회를 들여다본다. >

▲ 원철 스님은법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7년 해인사에서 일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90년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승가대와 은해사승가대학원을 졸업한 후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ㆍ박사를 마쳤다. 해인사 승가대학과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해인사 승가대학 교수, 불교문화대학 선학과 강사, 월간 <해인> 편집장, 포교원 신도국장, 총무원 기획국장, 총무원 재정국장, 교육원 불학연구소장을 지냈다. 현재는 해인사승가대학의 학장 소임을 맡고 있다.

불교적 삶의 방식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사유와 행동에 대해 나름대로 자기만의 법칙을 부여합니다. 때문에 어떤 상황에 대해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내가 살아온 방식, 이제까지 추구한 경험이 모여서 결정짓게 됩니다. 많은 가치관 속에서 자기 나름의 삶의 법칙을 전제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간순간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맞춰 살겠다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무 생각이 산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자신이 세우고 있는 전제가 과연 옳은가 아닌가에 대해서 점검하는 태도가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적 가치관을 삶의 기준으로 삼겠다 다짐합니다. 불교적 삶의 방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에 관한 이야기는 경전에 많이 나와 있고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 말하고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연기를 빼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연기가 무엇입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조건의 모임이고 그 조건이 흩어졌을 때 현상 또한 없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한 것을 찾고 변하지 않는 것에 필요이상으로 집착합니다.

불교에서는 연기를 법이라 표현합니다.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보게 된다’고 부처님은 이르셨죠. 또한 <잡아함경>에서는 연기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차유고 피유(此有故 彼有)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차기고 피기(此起故 彼起)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차무고 피무(此無故 彼無)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차멸고 피멸(此滅故 彼滅)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연기는 시공간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해왔지만 부처님이 체계화, 논리화, 이론화시키고 이 작업에 가장 많은 능력을 투자하신분이죠.

시공간적 연기
시간적 연기를 이야기해봅시다. 희랍 철학자는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죠. 강물도 나도 끝없이 변해가니까요. 끊임없이 시간적 연기 속에서 변해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랑을 두고 어떤 이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반면 반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움직이는 면도 있고 고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은 한쪽 변에 치우쳐 생각하는 것입니다. 20대가 말하는 사랑은 지고지순하고 영원하지만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낸 50대는 사랑에 변하는 부분이 있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사랑이 오래 갈 수 있는 조건이 늘 유지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거죠.

불교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내 안에서 상대를 수시로 사랑하고 수시로 미워하는 것이라는 정의도 가능해집니다. 똑같은 대상인데 어느 날은 사랑스러운 감정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다른 날은 미워서 쳐다보기도 싫을 때도 있으니까요. 때문에 변하지 않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는 것이 불교적 연기론에 입각한 사랑의 해석입니다.

마찬가지로 공간적으로도 연기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A지역에서 만들어진 차가 차마고도를 지나면서 비를 맞고 습기가 차는 과정을 거쳐 B지역에 도착해 완전히 맛이 달라진 것도 그 예입니다. 조건에 의해 차 맛이 변하게 되는 것, 공간적 연기과정이죠. 녹차가 발효된 홍차도 그렇고 안동의 유명한 특산물인 간고등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덕 바닷가에서 잡은 고등어의 저장기간을 길게 하기 위해 뿌린 소금이 고등어의 맛을 좋게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조건이 맞지 않았다면 변화가 없든지 썩든지 했겠죠. 그렇기에 알맞은 조건이 전제되었을 때만이 콩이 썩지 않고 콩나물로 자랄 수 있으며 우유를 치즈로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건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단선적이고 기계적으로 연기론을 규격화시키면 안 되는 거죠. 정견의 입장에서 연기론을 봤을 때 제대로 된 연기론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자기 관점에서 연기론을 해석하려 든다면 부처님께서 보신 연기론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전제되어 있는 것은 정견입니다. <금강경오가해> 중 야보 스님은 공간적 연기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습니다.

천척사륜직하수 千尺絲綸直下垂하니 (천척의 낚시줄을 곧장 드리우니)
일파자동만파수一波?動萬波隨라 (한 물결이 일어나니 만 가지 물결이 따라 일어나네)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하니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고기 물지 않으니)
만선공재월명귀 滿船空載月明歸로다 (배에 가득 공연히 달빛만 싣고 돌아오는구나)

현대 사회 설명 수단
한 물결의 파동이 만가지 물결을 만들어낸다는 이 말은 현실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해저 지진이 일어나면 쓰나미가 되어 밀려오고 육지를 덮치게 되는 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자연적 연기는 자주 발생해요. 그런데 여기에 인공적 연기가 더해지는 경우를 가정해보죠. 쓰나미가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를 덮쳤을 때 지구에 일파만파 커다란 위협을 가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자 세계적으로 원전에 대해 반성하게 됐죠.

이처럼 연기는 우리 삶속에 가까이 있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기에 이러한 연기 법칙이 더욱더 활발하게 작용을 하죠. 연기론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연기의 속성 중 또 다른 한 가지는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이 얼음과 수증기 사이를 왕복하는 것도, 철근이 상온에서는 타지 못하다가 고온에서 타는 것도 일종의 연기죠. 나뭇가지가 불쏘시개, 지게 작대기, 회초리가 되는 것도 조건 변화에 의해 용도가 달라지는 경우입니다.

마찬가지로 수지침에도 연기론적 원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수지침에서는 손바닥 안에 오장육부가 있기에 각 장기에 해당하는 손바닥 부분을 찔러주면 몸에 있는 다른 기능을 좋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손바닥에서 온 몸을 다 보는 거죠. 손바닥의 경혈이 장기들과 연기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상학적으로 많은 이들이 효과를 입증했기 때문에 수지침이 오늘까지 없어지지 않았겠죠. 수지침의 역사가 곧 연기론 검증의 역사입니다.

이해 넘어서 행동으로 표현돼야
연기라고 표현을 안했을 뿐이지 세상 존재하는 것이 연기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연기를 알게 되면 세상의 많은 부분들을 설명할 수 있고 예측하며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고통을 많이 줄일 수가 있겠죠. 연기론은 고상한 삶의 이론이 아니라 고(苦)를 줄여주는 좋은 수단입니다.

중국 화엄종파 초조인 두순 선사는 ‘윗동네 소가 풀을 뜯어먹었는데 아랫동네 있는 말이 배탈이 나서 천하의 명의를 찾으니 돼지 왼쪽다리에 뜸을 뜨는구나’라고 연기 법칙을 표현했습니다.

연기 법칙은 이해에서 끝나면 의미 없습니다.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하죠. 중도가 바로 연기의 실천적 모습입니다. 양변을 같이 보는 거죠. 이 세상에 완전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중생적인 면과 부처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양면을 동시에 봤을 때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연기법을 알게 되면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게 됩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지는 것 뿐 아니라 그가 나와 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까요. 기쁨과 슬픔을 타인과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죠.

중도적 안목으로 실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에 입각한 삶이 됩니다. 이에 관해서 임제스님이 한마디로 정리하셨죠. 수처작주. 어디에 가든,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인 양 열심히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순간순간 연기론에 입각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죠.

이상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체계인 연기와 중도에 대해 명확한 안목을 가져주십사 하고 부탁하면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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