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태를 길러라 ④

몸뚱이에 탁 들어앉지 마세요.

늙고 변해가는 인간의 육신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를

향해 가는 이 육신을 잡고

인생놀이를 할지언정

그런 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떻게 공부를 하는 방향을 딱 정해 놓으면은 그때는 마 그 사람은 벌써 견성한 거나 한가집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시공간이 끊어졌기 때문에 언제 되도 되는 것이거든요. 이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삼마지 사마타 이걸 갖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말하자면은 벌써 범어인데 그러면 이 이름을 전부 외워야 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실로 별거 아닙니다. 그러나 참 아닌 게 아니라 어렵기야 좀 어렵죠. 우리가 중생의 분으로만 봐서 어렵지 법신분으로 봐서는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세요. 여러분의 법신이 어디 들어앉아 있습니까? 가죽 주머니, 여기 들어앉아 있지 안 해요? 여기 전부 똥밖에 더 들었어요? 또 느낌도 없는 것. 그러하니 이거를 확실히 말이죠. 이것이 내 소유물이 아니다 말이여. 이건 내 관리물은 될지언정 내 소유물은 아니다 말이지. 이거를 갖다 과학적으로 또 의학적으로 사람 몸을 갖다 우리가 알려면 의학적으로 알아야 됩니다. 의학적으로 딱 판명이 되 버리면 아 그렇게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속에 법신자리가 있어. 법신이 있기 때문에 말이지 내 몸이 내 소유물이 아니고 내 관리물이다 하는 것도 법신자리가 아는 것이지, 이거 자성이 있나요? 이거 성품 없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말이지 여러분들이 문제 삼지 마세요. 인제부터는 여러분의 몸뚱이를 여러분이 비록 쓸지언정, 관리를 하면서 쓸지언정, 쓴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말이지 여기에 탁 들어앉지 마시라 그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 갖다 버려버리란 그 말도 아니에요. 이걸 버려버리면 묘용의 도리가 없어져. 우리는 말이지 우리의 법신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묘용의 도리를 갖다가 이 가짜 육신 이 변하는 육신 늙어가는 육신 그야말로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를 향해서 가는 이 육신을 걷어잡고 말이지 인생놀이를 할지언정 그런 줄은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런 줄만 알아버리면은 요 삼마지를 어떠한 방법이다. 한 걸 알기가 쉽긴 쉽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그걸 알아버리면은 그놈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이 법신 자리를 우리가 확인을 못했어. 왜 그러느냐. 확인이 될 턱이 없는 겁니다. 만약 확인이 될 것 같으면은 부처님이라도 그건 가짭니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이 그대로 알 따름이지 그걸 갖다 우리가 볼라 하면 됩니까 여러분. 뭣이 있어야 보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볼 거예요?

그러하니 다만 중생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업덩어리 하나, 이거 업의 소산이거든요. 업덩어리. 남자 몸도 나퉈. 여자몸도 나퉈. 재주있는 사람도 나퉈. 재주없는 사람도 나퉈. 이거 업 심부름 하는 거예요. 아 그래서 말이지 이것이 내다 해서 말이지 해봤든 결국 우리가 속아 넘어가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고 자리만 확실히 알아버리면은 그 다음에는 내가 공부를 지어나갈 수 있는 방편을 내 스스로가 작정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내 몸이 아니란 말이죠. 이거 전부 그겁니다. 이것이 내 몸이 아니라 내 관리물이라. 그렇다면 이거는 말이지 좋은 줄을 아요 나쁜 것을 아요. 사실로 아닌 게 아니라 말이지. 여기서 내 법신 딱 떠나버리면 흙구덩이 집어넣어도 모르고 불구덩이 집어넣어도 모른 거 아니라요? 그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거라 말이죠. 화장터 가서도 우리가 보지 않아요? 공동묘지 가서 우리가 보거든. 보기는 봐. 우리가 느끼지 못할지언정, 그렇다면은 참말로 나는 말이지 이 가죽주머니를 끌고 다니는 이것이 낸데, 이 자리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버리면은 그때 비로소 말이죠 지금 말한 삼마지 이것이 말이죠 그대로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건 내다 그래서, 이건 내다 생각할 때 이건 그릇된 생각이거든요. 내가 아닌 걸 내라 하니까 이건 그릇된 생각 아니라요? 내다 이래 가지고서 내가 공부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릇된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면은 그 공부가 설혹 됐다 할지라도 그건 그릇된 거밖에 안 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올바른 자리에 앉아서 올바른 견해를 굴려야 되지. 내가 올바른 자리에 앉아도 그릇된 자리에 앉아서 바른 공부를 했다 할지라도 말이지 벌써 그 공부 자체가 올바로 되지 못해. 그런 법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쓰면은 그 법이 삿되고 또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쓰더라도 그 삿된 법이 발라진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내가 견해를 올바로 가져서 올바로 닦아나가야 되지, 그 머리털만치라도 하나 말이지 그릇된, 다시 말하자면 요새 말로 철학적으로도 그렇고 종교적으로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아는 걸 갖다 자기가 합리화 시켜. 아 요거는 요러니 요래야 되겠다. 합리화시켜서 그래서 그걸 갖다가 어떻게 좋게 해서 자기 안심을 하려고 이러한 재주를 부리는 것은 그 재주밖에 안됩니다. 참말로 도깨비도 옳은 도깨비가 못되는 겁니다. 차라리 모르면 모른 대로 한 것이 나아. 어떤 기회에 가서 어떤 무엇이 될지언정 그리 해야지, 사견을 세워서 지견을 세워서 아 요러하니 요렇다 또 요러니 요러게 합리화 시켜서 이래해야 되겠다. 이런 사고방식은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 필요도 없지만은 우리가 육신분으로 봐서는 서둘러야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법신분에 앉을 줄 알면은 우리가 서둘 필요가 없어요. 어떻든지 올바른 방편을 그대로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다행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 자리는 벌써 이미 시공간이 끊어진 자리거든요. 그러하니 참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어렵긴 어렵지만은 말이죠 이 올바른 그 방편 윤곽, 이까지 가는 것이 좀 힘이 듭니다. 힘이 드는데 힘이 들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공부하다 어려우니 그만 치우는 사람도 있고 그 다 인연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그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참말로 이 상승설법은 말이죠. 만 명 갖다 놓으면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천 명 안 됩니다. 잘하면 한 백 명 이백 명 남고 그렇습니다. 잘 하면. 왜 그러냐. 그건 업관계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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