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사찰 건축 15. 일산 여래사, 서울 구룡사, 법련사

3사찰 모두 문화포교 위해 지어져
극장ㆍ미술관ㆍ서점ㆍ방송국 갖춰
일산 여래사는 건축기간 5년
설계부터 완공까지 꼼꼼하게

건축은 그 시대의 생활상이 반영되는 삶의 배경이다. 그것도 직접적인 배경이다. 그곳에서 삶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신행활동 역시 삶의 일부이고 문화의 일부이다. 사찰 역시 시대적 흐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깊은 산을 나와 도심에 지어진 현대의 사찰들은 특히 시대적 요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서 시대적 흐름을 선도해야 한다. 최근에 지어진 현대건축 양식의 신 사찰 중에는 문화적 공간을 전진 배치한 도량이 늘어나고 있다. 일산의 여래사와 서울 구룡사, 법련사다.

부처님 모시는 곳…최대한 정성담아야
서울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은 건축 용어에 능숙했다. 시멘트, 래미콘 타설, 전벽돌 등의 단어가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공간의 너비 대비 높이 비율을 논하는가 하면 3.3m의 건물 1층 평균 높이를 정확히 짚어내기도 했다. 일산 여래사 불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스님은 여래사 설계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전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건축가와 상의해 외관도 디자인하고 내부 구조와 형태, 재료선택은 물론 구입까지 도맡았다. 공사기간에는 매일 서울에서 일산까지 출퇴근 하다시피 했다. 3년 동안 자동차 운행거리가 12만km를 기록했다.

부처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자 최대한의 정성을 다한 불사, 일산 여래사다.

▲ 일산 여래사는 연면적 3천평에 지하 4층, 지상 5층 규모로 지어졌다. 신도시 포교를 위해 사찰 안에는 방송국, 서점, 찻집, 극장, 회관이 자리했다.

2000년 완공된 여래사는 서울 강남에 위치한 구룡사와 이란성 쌍둥이 격이다. 1985년 구룡사 주지로 부임한 정우 스님은 천막법당에서 시작한 구룡사가 현재 외관을 갖추기까지 건축과정을 진두지휘했다. 거기서 얻은 노하우를 축적해 여래사를 세웠다. 주변 주택과 이질감이 없도록 콘크리트 구조에 화강암을 덧대었고 울긋불긋한 단청은 자제했다. 사찰이라는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윗부분은 전통사찰지붕 모양을 가져왔다.
불법을 설하는 곳이란 의미를 담아 곳곳에 불교적 상징들을 배치했다. 지하에서부터 5층까지 이르는 계단은 108개다. 구룡사 내부계단은 6개와 9개가 번갈아 반복된다. 6바라밀과 구룡사의 9를 차용한 것이다.

▲ 1988년 지어진 서울 구룡사. 외관은 당시 주지였던 정우 스님의 아이디어였다.

연면적 3천평에 달하는 여래사는 지하 4층에 지상 5층 건물이다. 시공에만 3년이 걸렸다. 비슷한 크기의 다른 건축물 보다는 1년 정도 더 걸린 셈이다. 기간이 길어진 데는 정우 스님의 꼼꼼함이 작용했다.

“정직하게 잘 만들어야 한다”. 정우 스님의 말이었다. 부처님을 모시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정성스레 벽돌을 쌓았고 전깃줄역시 눈에 띄지 않도록 건물 안과 지하에 매설했다. 외관 기둥은 형태미를 고려해 직사각 기둥에서 시공비가 7배나 더 소요되는 원형기둥으로 바꿨다. 주차장 높이도 다른 곳보다 1m이상 높여 어두침침한 공간에 개방감을 줬으며 인등전에는 참선하는 불자들을 위해 온돌을 깔았다.

게다가 공사 과정 중에 유리창 하나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끼웠던 유리를 죄다 꺼내 가운데 필름을 부착하고 다시 넣는 수고까지 감수했다. 후일 큰 사고에 대비하고자 무디게 깨질 수 있도록 먼저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철근을 손수 사고 레미콘도 직접 발주했다. 콘크리트에 들어가는 모래까지 발품을 팔아 구했다. 시멘트 회사 회장까지 만나가며 부식에 취약한 바닷모래대신 임진강 유역의 모래를 구해다 썼다. 각각의 건설업자 선정도 불자들 중에서 관련 종사자를 찾아 직접 선임했다. 여래사 건축 현장소장이자 설계시공 총 책임자는 정우 스님이었던 셈이다.

문화포교위한 공간
여래사는 통도사 포교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도시 포교를 위해 세워진 곳이다. 포교 기능을 우선으로 공간을 배치했다.

기존 사찰이 오롯이 수행과 예배를 위해 지어진 곳이라면 주택가 옆 혹은 시내 번잡한 곳에 자리를 잡은 도심 사찰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배려한 곳이 되어야 했다. 현대 사찰은 기능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포교를 중심에 둘 수 밖에 없었다.

‘일산 신도시의 포교전진기지’로 지어진 여래사 또한 같은 고민에서 출발했다. 사찰의 성격을 버리지 않되 불자아닌 일반인들까지 아우르는 공간이 되기위해 서점, 찻집은 물론 인터넷 방송국, 다목적 회관, 소극장까지 자리잡았다. 문화포교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필요를 충족시키며 지역 중심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였다.

익히 알려진대로 여래사의 뮤지컬 전용극장 ‘신시씨어터’는 ‘시카고’, ‘맘마미아’ 등으로 유명한 신시뮤지컬컴퍼니(前 극단 신시)가 2001년 자리를 튼 것이다. 지하 1층에 자리한 220석 규모의 소극장은 높이 7.5m 너비11m로 왠만한 중극장 수준이다. 건물 설계 당시부터 소극작용으로 설계된 공간이었다. 신행 공간이 아닌 지역사회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해 보겠다는 당찬 시도였다. 원류는 역시나 구룡사였다. 1987년 극단 ‘신시’가 구룡사에서 창단된 것이다.

여래사가 문화포교에 대한 아이디어로 극장을 내세웠다면 이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서울 법련사 역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996년 법련사에는 서울 도심 사찰 경내에 처음으로 상설미술관인 불일미술관이 들어섰다. 개관 이래 불교미술 등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다채로운 전시회를 열어오고 있는 이곳은 당시 회주 스님인 현호 스님이 문화와 더불어 숨쉬는 도심속 수행 및 포교도량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생각에서 개관했다.

▲ 서울 법련사의 서점. 1984년부터 운영됐다.

현재 여래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공간을 꼽는다면 1층에 자리한 회관이다. 260석의 좌석을 확보한 1층 회관에서는 결혼식도 열린다. 지금은 지역민들이 요청할때마다 모임장소로 활용되곤 한다. 세미나, 소규모 축제, 각종 모임 등이 불교와 상관없이 열리며 그 외에는 여래사 불교교양대학 강의와 법회공간으로도 쓰이고 있다. 빔프로젝트와 스크린, 음향설비 등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왠만한 발표회나 회의, 축제 등 행사 진행이 무리없이 이루어진다.
▲ 여래사 1층에 위치한 회관. 법회, 지역 소모임 등이 이뤄진다.

이외에도 전문방송장비가 가득한 방송실에서는 여래사에서의 법회를 녹화해 붓다tv라는 인터넷 방송국에서 법음을 상시 전하고 있다.

정우(頂宇) 스님은 법명에 집(宇)이 들어간다. 월하 스님이 지어주셨다. 당호인 아산(芽山)역시 싹(芽)으로 산을 만들라는 뜻이다. 스님은 집을 많이 지어 불자들을 많이 키우라는 말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래사 지붕 용마루에는 법륜과 사슴 조형물이 있다.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한 녹야원을 형상화한 것이다. 불법이 널리 퍼져 일체 중생이 고를 멸하고 진리를 얻어 해탈되는 전당이 되라는 서원에서 세워진 곳이 여래사다. 

▲ 여래사 지붕에는 초전법륜의 성지 녹야원을 뜻하는 사슴과 법륜 모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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