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니

바라는 바도, 받을 것도 없다

 

십중대은(十重大恩) 갚음은

불은(佛恩)을 갚는 동시에

중생 은혜를 갚는 것이다.

 

13. 보은게(報恩偈)

끝까지 불쌍히 여겨 주는 이런 은혜다. 언뜻 부모들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런 때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조목 조목을 들어 보면 마침 부처님 은혜도 꼭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우리들 자신의 뱃 속에다 넣고 얼마나 수호하시는가. 우리를 이걸 하나 키워서 발양하려고 얼마나 부처님의 제자 만들기에 고생을 하시느냐. 또 마침내 부처님 제자가 되었을 때는 얼마나 기뻐하실 건가. 부처님 제자 되기 위해서 염불은 어떻게 해야 되고 신앙은 어째야 되는가. 앞에서 온갖 설명이란 것이 회탐수호(懷耽守護), 임산수고(臨産受苦), 생자망우(生子忘憂), 유포양육(乳哺養育), 인고토감(咽苦吐甘), 회건취습(廻乾就濕), 세관부정(洗灌不淨), 원행억념(遠行憶念), 위조악업(爲造惡業)에 든다고 옛부터 내려는 말이다. 부처님, 불보살(佛菩薩)이 왕생회향(往生廻向)하시었다가 환상회향(還相廻向)하셨다는 것을 들어 위조악업이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저 중생이 단 하나라도 있는 동안에는 그 행(行)과 원(願)이 어디까지 계속되리라는 것은 구경연민(究意憐愍)이다.

진정으로 은혜 갚는다는 것을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이라 한다. 부모 이야기라면 제일 잘 알아들으니까 하는 말이 아니라, 열 가지 무거운 은혜, 십중대은(十重大恩)을 갚는다는 것은 실지로 결국은 불은(佛恩)을 갚는 것이 된다. 불은을 갚는다는 것은 동시에 중생의 은혜를 갚는 것이 된다. 중생과 부처님 사이에는 조금도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은혜 갚는 것은 곧 중생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중생의 은혜 갚을 때는 대비전보화(大非傳普化)해야 한다는 것도 이래서 그런 것이다. 우리의 대자 대비가 널리 퍼져야 되고, 퍼지는 그것이 곧 중생 은혜 갚는 길이며 또 이것이 동시에 참으로 부처님 은혜 갚는 것이다 하는 계송이다.

은혜 갚는 이야기에서 이를 받고 갚는 편에서는 이것이 은혜지만 베푸는 편에서는 자비요, 사랑이다. 다른 종교, 이를테면 기독교에서는 이를 박애(博愛)라고 한다. 기독교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전지전능하시고 만인간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을 그에게서 사랑을 받고 또 그에게 사랑을 갚는다. 이런 얘기다. 사랑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심판에 의한 것이다. 심판이란 저울대에 달아 착한 것이 많은가 나쁜 것이 많은가 측정하고 이에 따라 우리 인간은 구원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한다. 이것이 선악(善惡)의 상대적인 인과(因果)로서 다루어지는 심판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 보인다. 불교의 사랑인 대자대비는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부부간의 애정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상대적인 사랑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어머니와 자식 간의 사랑이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무조건으로 사랑을 베푼다.

또 자식은 어릴 때에는 어머니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도 없다. 바라는 것도 없고, 갚아야겠다는 생각도 없다. 바라는 것도 없고 갚아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도 없다. 부채 갚듯이 기어이 보상해 드려야겠다는 생각도 없다.

그리고 부모 된 분의 생각으로는 자식이 열이건 스물이건 다 한결 같이 소중한 것이다. 속담에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것 없다고, 어느 자식에 대해서나 꼭 같은 애정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들렁거리고 마음대로 안 되는 불량한 아들을 부모는 더 걱정하고, 불쌍히 여기고, 어여쁘게 생각하는 것이다. 못생겼거나, 병신이거나, 여하튼 정신적으로 행동으로 육체적으로 불건실한 자식에게는 부모가 더 걱정하고 자비와 사랑을 베풀게 된다.

부처님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중생이 죄가 많고 번뇌 망상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가득하여 업장(業障)에 결박되어 있을 때 이 불쌍한 것들을 대자대비의 힘으로 건져야 되고, 안 건지고는, 제도 안 하고는 못배기는 비원이 있다. 이는 영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하여 무연대비(無緣大悲)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사랑과 대자대비가 있을 뿐이지, 여기에 무슨 조건이라든지, 너는 그렇게 하는구나, 그럼 나는 이렇게 해야겠다 하는 투의 그런 의무감이나, 인(因)에 대해서 과(果)를 기어이 보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무조건의 사랑 절대적인 사랑을 시무애(施無畏)라고 한다. 베푸는데 아무런 어려운 생각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무엇이건 있는 대로 다 대자 대비를 베풀지 않고는 못배기는 심정을 시무애의 사랑이라고 한다.

흔히 우리는 나무대자대비관세음보살(南無大慈大悲觀世音菩薩)이라고 부른다. 우리 인간이 살아 있는 이상 우리에게는 역시 부처님도 살아 있는 부처님이 좋다.

이것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다. 대자대비관세음보살 하고 명호를 부르면 우리의 소원대로 이루어진다.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귀의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간에 다 성취시켜준다. 이렇듯 베풀어 주는 대자대비를 무애시의 대자대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랑 베푸는 이의 심정을 헤아려 죄 많고 모든 번뇌 망상에 얽메어 업장이 무거운 우리로서는 부처님께 구제를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한 능히 사랑을 주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것이 우리가 은혜를 받고 갚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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