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에누리 없이 자기가 한 것만큼 돌아오는 겁니다

▲ 그림 최주현

이 수박을 화두로 삼아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이거를 굴리다 보면은
그 속에 씨가 들었는지,
맛이 어떤지
도저히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거,
그게 뭐가 그리 겁납니까?
오늘 죽은들 어떻고
내일 죽은들 어떻고
모레 죽은들 어떻고
안 죽은들 어떻고,
뭐가 걱정입니까?
그냥 그대로
수박을
용기 있게 깨뜨려서
먹어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또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이제 그 더운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로 접어드는군요. 우리 마음자리는 항상 사철이 따로 없듯이, 공부하는 데도 서로 도반으로서 같이 열심히 해봅시다.
우리는 이 마음이라는 정신계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그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도 없거니와 벗어날 수도 없고, 한 생만 이렇게 곤고하게 사는 게 아니라 세세생생을 끝간 데 없이 그렇게 살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이렇게 공부해야만 되는지 한번 말씀드리죠. 여러분이 극락세계나 지옥세계를 따로따로 보지 마시고, 현 세상에서 잘 보시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광대한 문제들, 그 묘한 문제들, 그 수라장 같은 세상, 우리가 모두 현실에서 보는 겁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미생물에서부터 수없는 생명들이 짝을 짓죠. 그 모든 생명들이, 인간까지 말입니다. 부모가 됐다가 자식이 됐다가,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수억겁 광년을 거쳐서 이렇게 인간세계까지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거 미래 현재가 없이 말입니다. 지금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걸 어떻게 대치를 하나요? 찰나찰나 닥쳐오는 문제들, 찰나찰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모두 그런 거를 어떻게 대치를 해야만 되며, 수없는 광년 겁을 지나오면서 그 누적된 문제들,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착을 버리지 못한 채, 또는 관습에 의해서 끄달리는 습이 그대로 남아서 누적돼서 돌아가는 이 모두를 어떻게 해야만이 대치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모두 부처님 마음과 더불어 같이 아시고 계시다면,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어떻게 보면 광대하고 어떻게 보면 도깨비장난 같고 어떻게 보면은 아수라장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아주 묘한 이치에 다달아서 신비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합류화시켜서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한 번 쳐다보고 웃고 한 번 내려다보고 건질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만약에 우리가 이 공부를 안 한다면은 세세생생에 끝간 데 없이 그렇게 굴러야만 합니다. 우리는 물주머니에서의 삶과 같습니다. 지금 바다 속 생명들이 물 속에서만이 살 수 있도록 돼 있듯이 또 물 속을 벗어나면은 죽듯이, 우리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공기주머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겁니다. 벗어나야 어떻게 해보죠.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그렇게 수없이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는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낳은 부모만 육의 부모가 아니고 수억겁을 돌아오면서, 걸어오면서 우리는 자식이 됐었고 부모가 됐었는데 어떻게 내 부모, 육의 부모 하나만이 내 부모라고 하겠습니까? 둘이 아니라는 도리가 그래서 나온 겁니다. 부모도 둘이 아니요, 자식도 둘이 아니요, 나 자체도 둘이 아니요. 모두가 일체가 다 공(空)했다. 즉 말하자면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공했다. 그대로 여여하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그대로 여여한 줄을 안다면 이렇게 고생도 안 해요. 고생이라고 할 건 없지만 말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듯이 ‘여여하다, 공했다.’ 이런 뜻은 여러분이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만나는 거 먹는 거 이런 것 모두가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대로 공했고 그대로 여여하다 이런 뜻이에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면 이 도리를 납득을 못하겠지마는 참나와 현재 나가 둘 아니게 통신이 된다면 그거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물론 각 사찰에서도 그렇지만 될 수 있으면 모든 조상들이나 자식들이 또 죽은 영혼들이나 우리 산 사람 마음들이 은은히 모두 이 도리를 알아야 되겠기에 말입니다. 또 알아야만 공덕이 되겠죠. 공덕이 안 되는 것은 내 정신계와 물질계가 합류화돼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공덕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합류화돼서 돌아간다면 공덕이 되죠. 즉 말하자면 공생ㆍ공심ㆍ공체ㆍ공용ㆍ공식 그대로, 우리가 그대로 공용을 하고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알고 보면 용무를 그대로 하고 있고, 작용을 하는 겁니다. 한데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자기를 못났으면 못난 대로 못났다고 생각하고,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자기를 아예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무시하는가 하면 잘났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라고 하기 때문에요.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나하나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법당에 여러분이 들어오게 되면 벌써 부처님이 여러 분 모셔져 있으면은 헛갈립니다. 이조 때에 스님네들을 탄압할 때에, 쌀 한 말만 갖다놓으면은 도저히 스님네들이 그걸 가지고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산중에 숨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산신각, 칠성각 또 지장보살 신중당 모두 여러 분들을 해놓고 거기 쌀 한 말씩을 갖다 놔야만이 스님네들 대중이 다 먹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종교 탄압을 안 하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개선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법당에 들어오면 만불(萬佛)이 있다 할지라도, 일불(一佛)로 봐야 됩니다. 또 이것은 부처님 마음의 한생각에 의해서 이름이 주어진 겁니다. 지장 또는 아미타, 아촉 또는 미륵, 관세음 또 지신이나 주해신이나 주림신이나 모든 이름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겁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 마음속에서 탄생한 천백억화신은 모습을 바꾸어가면서 천차만별의 여러분한테 다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신다고요. 그것도 과거가 아니고 미래도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현실에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오신 것이 없기 때문에 가신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영원하고 끊임없이 생과 사가 둘이 아니게 그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불상을 칠성불 모두 해놨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각 사찰에 가보시면은 여러 가지로 놓여 있죠? 여러 부처님들이 말입니다. 그런 데에 사람의 마음이 헛갈려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도 여기 앉아계시면은 천차만별로 모습이 다른 분들이 이렇게 같이 앉았죠? 그러나 모습은 다를지언정 어찌 마음이야 둘이겠느냐. 생명이야 둘이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부처님들이 그렇게 계실지언정 내 마음은 항상 부처님한테 가면은 부처님의 마음과 더불어 공했으니, 거기에다가 일배를 하든지 삼배를 하든지 칠정례(七頂禮)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의 여유가 있는 대로, 급하면 급한 대로 일정례(一頂禮)를 하고 급하지 않으면 칠정례를 하고, 더 급하지 않으면은 삼천 번을 해도 좋습니다. 그건 자유죠. 자유스럽게 그렇게 여유가 있이 해야지, 만약에 마음이 급한데 이거를 꼭 삼천배를 하랬다고 하고 하지 말랬다고 하지 않고, 일배를 하란다고 일배를 하고 쓱 돌아서서 나오고 이러는 게 아니라. 그거는 자기가 한 대로이니깐요. 에누리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한 것만큼 나한테 오는 거니깐요. 그렇다고 또 많이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 마세요. 삼천배가 한생각만은 못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것을 잘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도 한마음이요, 칠성한테 가도 한마음이요, 지장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관세음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산신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해신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주림신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지신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모두가 한마음이니 마음은 체가 없어서 찰나찰나 들고 나는 데에 손색이 없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 아버지가 됐다가 아내가 됐다가 또 형님이 됐다가 동생이 됐다가 사위가 됐다가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모습은 한 모습인데 그렇게 가지각색으로 찰나찰나 나투면서 그대로 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거와 같이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자유자재하시고 그렇게 나투시는 분이니까 겉모습만 보지 마라 이런 겁니다. 스님네들을 보고도 겉모습, 이 고깃덩어리를 보지 말고 내 마음부터 알아야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니까 내 마음부터 아시라 이런 뜻입니다. ‘내 마음부터 알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지 내가 없다면 상대가 없는 거라고 항시 말씀해드리죠. 그렇기 때문에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콩씨를 심어서 콩나무로 화했다면 콩씨를 어디 가 찾습니까? 네? 콩나무로 화했잖아요? 화한 콩나무가 여러분 몸이라고 볼 때에 콩나무에 콩씨가 또 붙었습니다. 그러면 콩나무에서 콩씨를 찾아야지 과거로 돌아가서 찾는다거나 미래로 돌아가서 찾는다거나 어디 두리번거리고 찾는다거나 이런다면은 그거는 정작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입니까? 예를 들어서 수박도 그 콩씨와 다름없는 얘깁니다. 수박도 이 수박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관하고 화두를 삼아서 이거를 굴리다가 보면은 그 속에 씨가 들었는지, 맛이 어떤지 그걸 도무지 알 길이 없어요.

죽고 사는 거, 그게 뭐가 그렇게 겁납니까? 내일 죽은들 어떻고 오늘 죽은들 어떻고 모레 죽은들 어떻고 안 죽은들 어떻고, 뭐가 걱정입니까? 그냥 그대로 수박을 용기 있게 깨뜨려서 먹어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필요합니다. 또 그냥 속성적으로 들어가야지 내가 이 세상에 난 게 화두인데 그 화두에다가 또 화두를 붙여서 찾는다면은 얼마나 그게 미거한 짓입니까? 그래서 화두를 갖는다 하더라도 화두도 거기 놔야 됩니다. 화두 끊어질까봐 애를 쓰고 그런다면 10년 20년 가도 도저히 자기가 자기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도 공했기 때문에 찾을 게 없고 버릴 것도 없고 쥘 것도 없고 쥐지 않을 것도 없는 그런 공한, 바로 더불어 같이 살고 있는, 더불어 같이 먹고 있는, 이 내 육신 속의 생명들과 더불어 같이 살고 있는 이 통 속을 벗어나야 하겠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 모든 부처님을 각 사찰에 모셔놨든 신중당을 모셔놨든, 하다못해 돌을 모셔놨든 상관할 것 없어요. 모두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건 부처다, 부처가 아니다 하는 대로 가는 거니까요. 허허, 알고 보면은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만물만생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고 감사하지 않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이렇게 각자 찾으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은 배를 타려고 뱃사공한테 가면 뱃사공이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뭐를 하나 물건을 사려고 공장에 갔다 한다면 공장 주인이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치과에 엊그저께 갔더니 정말 그 치과의 박사가 으뜸입디다, 네? 하하하. 그러니까 이게,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다 으뜸이에요.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를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하는 그 말씀의 뜻을 모른다면은 백문선이 헛문선이죠. 그러니 내가 부탁할 것은 어느 법당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모두 일불(一佛)의 한생각으로써, 한마음으로써 부처님한테 지극하게 내 한마음과 일체제불의 한마음을 다 한꺼번에 해서 일배를 올린다면 천배 올린 것보다 수확이 좋다 이겁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처님한테 갔을 때에 어떻게 생각이 듭디까? ‘이 부처에도 놔야 하고 저 부처에도 놔야 하고, 요 부처에 놓지 않으면은 자식이 어떻게 될까? 요 부처에 놓지 않으면 영감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또 재수가 좋지 않으면 어쩌나? 또 삼재가 들었으니 언짢으면 어쩌나? 이러한 까닭에 없는 살림에 몇 푼 가지고 가서 요기도 놓고 저기도 놓고 놓으려면, 어떤 때는 모자라서 그냥 나오고, 그러면 마음이 께름칙해서 나온다 이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인데, 한 부처님 앞에 그냥 고스란히 놓고 지극하고 정성스럽게 모두 거기 계신 분들을 한마음으로 모시면서 지극하게 하시고요, 없으면 지극하게 나오시고요. 또 있으면은 있는 대로 그 절에 다 놓더라도 한마음으로써 놓으시고, 또 웬만하면은 그 절의 주지스님을 찾아서 주지스님한테 “모두를 다 써 주십시오.” 하고 이렇게 갖다놓는 겁니다. 왜냐? 그것은 거기 갖다놓으나 산 부처님한테 갖다놓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마음먹기 달린 겁니다.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갔는데 백만 원짜리를 사러 갔다면 백만 원을 꼭 줘야 삽니다. 오십 원짜리 사러 갔으면 오십 원짜리는 꼭 오십 원짜리를 줘야 합니다. 오십 원을 주면은 오십 원짜리밖에 안 줍니다. 그러니 그것은 돈을 스님한테 준 사이도 없고 부처님한테 갖다놓은 사이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또 가져간 사이도 없죠. 부처님이 준 사이도 없고 스님네들이 준 사이도 없죠. 그래서 준 사이도 없고 가져간 사이도 없는 겁니다. 그렇게 정확합니다. 이 뜻을 잘 알아서 행하시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또 두 번째로 우리가 어느 법당에 가보면 인등을 많이 켜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수억겁을 걸어오면서 부모가 됐다 자식이 되고 자식이 됐다 부모가 된 그 사실의 겁을 어떻게 대치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인등을 해놨을 때 마음의 인등을 켠 거는 비바람이 아무리 쳐도 꺼지질 않지만 그냥 등에다 불 켜놓은 거는 비바람이 치면은 꺼져요. 요새는 또 전기 전력으로다가 켜놓는 거니까 전력만 나가면 그냥 꺼지죠. 하하하. 그런데 마음의 등불은 전력이 나갔든 비바람이 치든, 억수 장마가 들든 물에 잠기든, 산 속으로 들어가든 그거는 상관없이 꺼지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의 정성이 있는 것이 그 인등이지 여러분이 돈이나 몇 푼 스님한테 갖다 던져놓고 그것 켜달라고 쪽지나 붙여서 켜놓는 게 인등이 아닙니다. 그건 도깨비등이지 인등이 아니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어느 스님네들은 날 욕을 하겠지만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는 것이 뭐냐 하면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입니까? 정말 이거를 자세히 말을 하려면 길어서 이건 끊어버리고 얘기하겠습니다. 요다음에 또 하죠.
세번째로 이제 지금 위패를 다 붙여놓습니다. 위패를 붙여놓는데 지금 시대에 그게 걸맞습니까? 첫째, 걸맞지 않고 둘째, 또 우리가 고상치도 못한 데다가, 영령들을 조상님들을 모실 때 그것은 모셔서 비뜰어 매놓는 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미국에 부모들을 모셔다가 영어를 못하니까 그냥 방에다 가두어놓고는 그냥그냥 자기네들만 돌아다니는 것과 같이, 조상들을 꼼짝 못하게 위패를 해서 붙여놓고선 그냥 자유스럽게 나고 들지 못하게끔 해놓는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찌 조상을 나의 생명과 같이, 내가 또 조상이 되고 자식이 되고 조상이 되고 하는데 거기다 꽁꽁 뭉쳐놓고선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지낼 때 부모를 모셔다가 대접하고서 그냥 또 자유스럽게 해드릴 수 있게끔 위패를 태워드리는 겁니다. 태워드릴 때도 물을 큰 그릇에다 떠다 놓고 향 피워놓고 초 켜놓고 태워드리는 겁니다. 지금 자식들을 가두어놔도 죽겠느니 살겠느니 하고 삐뚜로 나가고 야단들인데 아, 체가 없다고 조상들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즉 조상이고 조상이 즉 우리들이니깐요. 그렇게 해놓는다면 그 조상들이 빨리빨리, 우리가 개선을 해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진짜로 그거를 잘 생각을 해보셔야 됩니다.
또 천도를 시킬 때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그렇고요. 음식을 잘 차려서 이렇게 해놓는다면 ‘너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이렇게, 쓰고 단 거를 먹어가면서 고생을 해라.’ 하고 묶어 놓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밥 한 그릇 가지고 이 세상 만물만생을 다 먹이고도 밥 한 그릇은 되남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은 어떻게 될까요? 짜고 달고 그런 거, 맛이 없고 있는 거 그런 거를 쭉 차려놓고선, 자꾸 관습에 얽매이고 집착에 얽매이고 그러게끔 만들어서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치가 지금 너무도 많습니다.
선종이 많이 태어나야 될 텐데, 모르는 어리석은 악종이 많이 태어난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며,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우주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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