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보경회향문(普敬廻向文)

헌신하며 보살펴 주는

부모님과 같은 부처님 은혜

스스로 믿고 타인에게 믿음주며

중생 제도하는 것이 ‘보은’

 

넷째, 당수대고(當受代苦).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감당해 나간다.

다섯째, 내 몸뚱이가 튼 고기가 되어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인다. 널리 중생에게 이익을 베푼다 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여섯째에는 우리가 큰 원을 가져 모든 고에 당하고, 중생이 나와 같이 진리를 사랑하고 다 같이 원을 이루어 나가자는 것.

일곱째는 내 몸뚱이가 발심하고 내 자신이 행동하는 것이 바로 법(法)이므로 이 세상 끝 다 하는 데까지 해나간다는 말. 자기의 몸뚱이가 법계(法界)로서, 결코 상대적으로 그가 이러므로 나는 이렇다. 그가 저만큼 하니 나도 이만큼 하는 그런 좁은 생각을 말 것. 발심을 저 진법계허공계(盡法界虛空界), 법계가 다하고 허공이 다하고 , 중생이 다하고, 중생업이 다하더라도 그것은 절대적으로 크게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나와 남이라는 구별이 없고 조금도 다름 없이, 모든 중생의 고는 내가 받고, 모든 중생에게 항상 이익을 주겠다는, 그런 발심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널리 공경하고 회향한다(普敬廻向)는 것은 이것이 너무나 넓고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경제불(禮敬諸佛)부터 수순중생(隨順衆生)까지의 있는 바, 모든 공덕이란 것이 어디에 돌려지느냐 하면 진법계(盡法界), 허공계(虛空界),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돌려야 되고, 중생으로 하여금 항상 안태 안락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행과 원은 또 얼마나 해 나가야 될 것인가? 저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이 다하고 중생 없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더라도 내 행과 원은 다함이 없다. 이와 같이 하여 빈틈없는 의식이 지속하여 무유간단(無有間斷)하다. 조금도 쉴 사이라곤 없이 우리의 몸과 입과 정신생활로서 결코 싫증이 안 나고 환희로서 해나가는 것이다.

참으로 이런 대목은 놀랍다. 만약 모든 보살이며 우리들이 이와 같은 대의(大義)와 커다란 포부를 갖지 않았던들 이렇듯 큰 원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큰 원을 세워 수순(隨順)해서 자꾸 지내 놓고 보면 재미가 절로 나고 그 재미가 거듭하고 익어져서, 일체 중생과 더불어 우리들이 정편(正編), 정도(正道)로 두루 가득히 퍼지고 바른 지경에 들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좋은 일인가. 이것이 그 자체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행이 되고, 또 그 행이 자비의 바다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와 같은, 어질고 현명한 일을 널리 해나가야만 비로소 아미타불에 귀의하고 보은하는 생활, 감사하는 생활이 영위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널리 회향하는 것을 말할진데 예경제불로부터 수순중생에 이르기까지 가진 바 공덕을 낱낱이 다 회향하여 법계와 허공계와 일체 중생의 업이 다하도록 중생으로 하여금 항상 안락을 얻게 하는데 있다. 이와 같이 행과 원을 닦아 나가기를 허공계에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도록 한다. 내 이 행원을 다하여 끝남이 없으며 생각마다 이어 나가 쉴 사이가 없다. 그리하여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서 이렇듯 큰 원을 세워 수행을 닦아 나가는데 오직 기쁨에 넘칠 뿐, 싫증이란 게 없다.

13. 보은게(報恩偈)

自信殺人信 難中轉更難

大悲傳普化 眞成報佛恩

 

은혜를 갚는다.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 자기가 믿고 사람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고 믿게끔 한다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상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믿는 것도 잘 된다고 할 수 없는데, 더욱이 남을 가르쳐 믿도록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렇게 함으로써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널리 중생에게 교화되어 전해지는 것이다. 전해지는 그것이 참말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 된다. 보은을 성취하는 길이다.

 

“내가 부처님을 믿으며

또 사람들이 믿도록 가르친다.

어렵고 어려운 일.

사람들을 가르쳐 믿도록 한다.

대자 대비를 널리

돌아다니며, 교화하여 전한다.

참말이지, 이것은 부처님의

은혜 갚는 일. 은혜 갚는 일을 이룩한다. ”

 

은혜 갚는 이야기가 났지만 부처님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는 것은 큰 문제다. 이는 우리가 부모님을 두고 생각해보면 알 일이다. 첫째는 우리는 다 어떤 사람이고 부모에게서 몸을 받아 나온다. 어머니가 우리를 태중에서 열 달 동안 보호하고 있을 때의 마음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기막힌 고통의 연속이다. 자신께서 하고 싶은 일, 활동도 못하고 몸이 무거워 천근이나 만근이나 되고, 때로는 슬픈 생각도 들었다가, 별의별 생리적 고통이 다 따르게 마련이다. 이것은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이라고 한다. 열 달 동안의 태중에서 이를 수호할 때의 고통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달이 차 만삭이 되어 거의 사경에 도달한 몸이 찢어지는, 이를테면 생사의 고통을 겪고 아이가 태어난다. 나는 것이란 동시에 죽는 것과 꼭 같은 고통이 따른다. 낳은 뒤에는 자식이, 아들이다 딸이다 낳다는 소리를 듣고는, 아이구 인제 나는 엄마가 되었구나, 그래 몸은 튼튼한가, 하고 궁금해 하며 이제까지의 모든 고통은 잊어버린다. 셋째는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이다. 쓴 것은 자신이 삼키고 단것을 내어다 자식을 준다.

또 아이는 누워서 똥 오줌을 싼다. 지저분하다. 진자리에는 부모가 눕고 마른자리에는 자식을 다시 갈아 눕힌다. 그리고 젖을 먹여 키우고, 코고, 오줌이고 싸며는 모두 기저귀며, 옷이며, 더럽혀 놓은 부정한 것들을 깨끗이 씻어 준다. 출입을 하는데도 자식이 배가 고플텐데 하고 곧 쫓아온다. 자식을 위해서는 심지어 나쁜 일까지 한다. 자식이 병이 들었다. 저걸 어떻게 고칠까, 닭을 잡아 곰을 해 준다. 남의 생명을 해치는 이런 일을 좋다 할 수는 없지만 이렇듯 염려하여, 앞으로는 행복하게 살 것인지 끝내 염려하여 눈을 못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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