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7〉 여수 영취산 흥국사 대웅전

내부 장엄 ‘지심귀명례’의 숭고함 우러나와
네 모서리 용 문양… 개암사, 숭림사 공포 장엄 연상
꽃꽂이 벽화, 사찰천정으로는 흥국사가 유일
팔엽연화문은 연기법 깃든 우주 실상 조형 방편

위 화병 꽃꽂이 사진은 향좌측의 빗반자 벽화이고, 아래 모란 꽃꽂이는 향우측의 빗반자 벽화이다.
전라좌수영 의승수군의 본거지

한국불교는 호국위민의 호국불교다. 정권안보를 위한 호국불교가 아니라,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위민의 불교였다. 조선 성리학 정치체제에서 불교는 제도적으로 억압 당했고, 수모에 가까운 천대를 받았다. 승과제도는 폐지되었고, 사찰의 경제기반이던 전답은 강탈 당했으며, 사찰과 스님은 노역과 공납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정작 정치권력은 백성을 버리고 제 몸의 안위를 보존했다. 그 때 숭유억불의 나라에서 온갖 군역에 시달리며 천대받던 스님들은 오히려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면서까지 위민의 기치를 내걸며 창과 칼을 들었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5천여명의 승군이 조직 되었다. 그 중 여수 흥국사에는 300~400여명의 승병이 집결하여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의 수군, 곧 의승수군(義僧水軍)이 되었다. 여수 흥국사는 20여개의 소속암자와 함께 전라좌수영 의승수군의 본거지이자, 사령부가 된 것이다.

승병들은 목숨을 바쳐 백성의 생명을 지키고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권력은 그 스님들에게 포상은 커녕 또 다시 천대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30년이 채 되지 않아 인조1년(1623년) 정치권력은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시켰다. 도성출입은 향후 근 300년간 금지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승려의 도성출입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완화되었다.

대웅전 빗반자에 베푼 대표문양. 후불벽 뒤 천정에는 구름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내부벽화에 시주자 이름 밝혀

여수 영취산 흥국사(興國寺)는 이름 그대로 호국사찰이다. 고려 명종 25년(1195년)에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창건하였다 전하고, 지금의 대웅전은 인조2년(1624년) 계특대사가 복원불사한 것을, 1690년 통일스님이 확대 중창한 건물로 전해진다. 전란이후 인적, 물적토대가 와해된 시대에서 이같은 대웅전 중창은 순전히 불교내부의 힘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남한산성 복구부터 시작해서 조선의 사회체제는 거의 유일한 토목건축 역량이었던 스님들의 노동력을 동원했다. 흥국사 대웅전 중창 역시 흥국사 소속 300여명의 스님들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졌는데,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중창불사를 위한 스님들의 발원과 3년간의 간절한 기도가 함께 어우러진 결과였다.

대웅전 내부에는 그 간절한 중창불사의 흔적이 희유의 벽화로 남아있다. 대웅전 내부 공포와 공포 사이 41곳에 여래벽화를 그리고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 또는 흰 글씨로 ‘시주 상학비구(施主 尙學比丘)’ 식으로 시주자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시주자는 두 곳을 빼고는 모두 비구스님이다. 여기서 ‘시주’는 금전뿐만이 아니라 노동력과 예술창작력을 포함한다. 시주자의 이름에서 승인공장(僧人工匠)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귀한 벽화기록이다.

포벽에 장엄한 여래벽화와 시주자 이름, 포벽의 용 얼굴, 그리고 범자 넣은 팔엽연화문
조선중기 승장들 목공예기술의 정수

대웅전 내부장엄은 그 승인공장의 손으로 이루어져 ‘지심귀명례’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우러나온다. 후불탱화, 수월관음벽화, 건축, 조형, 계단, 창호, 닫집, 천정장엄 등 반야용선의 불국토 조영에 혼신이 투영되었다. 조영의 거시에서 미시의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장엄하며 섬세하여 조선중기 승장들이 지닌 목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듯 하다. 어느 한 곳 허술한 곳이 없다.

문화재청 안전점검서 최하 등급

하지만 작금의 대웅전은, 아니 여수 흥국사 전체는 위기다. 최근 문화재청 안전점검에서 당장 해체수리가 요하는 최하 F등급을 받았고, 근래에는 지붕측면의 기와가 왕창 흘러내렸다. 한 두달 후엔 대웅전은 해체수리 될 예정이다. 문제는 여수산단의 정유공장에서 퍼져나오는 산업먼지다.

흥국사 사하촌은 이미 철거되고 정비되었다. 흥국사는 고립무원의 지경이다. 산업먼지와 공해로 찾아오는 신도도 급감했다. 호국사찰의 성지가 존페의 위기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형국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보존대책을 마련함이 당연하다.

생명력 넘치는 카리스마 발산

흥국사 대웅전은 3×3칸 정방형 건물로, 내출목 수는 3출목이다. 내3출목의 마지막 출목부재의 끝은 봉황으로 장엄했고, 네 모서리 귀공포의 내출목은 용으로 장엄했다. 그런 점은 부안 개암사 대웅전이나 익산 숭림사 보광전의 공포장엄을 연상케 한다.

외진주 영역의 천정은 물매가 작은 빗반자를 가설했다. 빗반자는 세로로 긴 장방형의 우물반자다. 빗반자에 경영된 장방형의 우물칸 수는 140여 칸인데, 시문된 문양은 여섯 가지로 다채로운 변화를 주어 건축구조의 대칭성이 주는 단조로움과 경직성을 피했다. 앞 뒤 측면 140여 빗반자 칸칸에 봉황, 금니 넝쿨연화문, 모란, 관념적 연화문, 구름 별자리문 등을 베풀어 천정은 숭고함과 생명력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생명력 넘치는 문양패턴의 반복에 고색의 묵직한 색조가 더해져 저절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하는 공간의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희유의 만병 꽃꽂이 벽화

특히 좌우 측면의 빗반자에 그린 벽화는 희소성의 소재에서 주목된다. 좌우로 각각 14칸씩 청색 만병에 모란꽃과 관념화 된 연꽃을 베풀었는데, 마치 화병에 미학적으로 장식한 꽃꽂이를 보는 듯 하다. 이러한 꽃꽂이 벽화는 희유의 사례로서 흥국사 대웅전 천정장엄의 고유성이자, 독창적인 표현이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에도 도자 화반(花盤)에 장식된 고려시대 꽃꽂이 벽화가 나타나지만, 아쉽게도 모사본만 현존한다. 벽화가 아닌 다른 형식으로는 이미 고구려 벽화고분 쌍영총에도 나타나고, 강화도 정수사의 꽃살문에, 그리고 나주 다보사와 강화 전등사의 불단조형에서도 나타나지만 사찰천정 벽화로는 흥국사 대웅전과 나한전에서만 극히 이례적으로 나타난다.

관상학적인 미, 액센트 있는 율동미

화병의 꽃꽂이 벽화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좌우대칭의 구도이고, 구현된 꽃꽂이의 화형은 주지(主枝)가 한가운데에 있는 직립형이다. 색상은 청색, 빨강, 노랑의 삼색조화와 보색조화를 적절히 배합했다. 향우측의 꽃은 몽글몽글한데, 향좌측의 꽃은 뽀족뾰족하다. 균형과 조화로움으로 오브제의 관상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또한 비중에 따른 크기와 색을 달리해서 꽃꽂이에 분명한 액센트를 주어 변화의 율동미도 갖추고 있다. 공포 사이에 시주자 이름을 낱낱이 밝힌 사실을 비춰볼 때 이 꽃꽂이 벽화는 부처님의 공덕에 올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 마르지 않는 육법공양의 헌화임에 분명하다.

내진주 영역의 팔엽연화문과 닫집
19세기 모란병풍도 민화의 원형질

그런데 더욱 주목되는 점은 한국미술사에서 사찰벽화와 18, 19세기 조선민화의 미술사적 관계다. 향우측의 빗반자에 경영된 모란꽃 벽화는 그 자체가 조선민화의 모란병풍도라 하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민화의 원류는 천전리 각석이나 반구대암각화에 이르겠지만, 17, 18세기 사찰장엄의 민중화, 혹은 낭만주의적 경향이 민화의 해학과 익살에 물길을 열었음도 분명한 사실일 듯 하다. 민화적 화풍의 잠재적 가능성을 저 꽃꽂이 벽화에서 짐작하는 것이다. 일지매(一支梅)의 꽃을 보고 봄을 읽는 이치로되, 무릇 자성(自性)은 연(緣)을 만나 제 갈길을 열기 마련이다.

8엽에 새긴 범자 낱낱은 ‘종자(種字)’

내진주 영역의 천정은 평반자에 소란반자를 두른 우물천정이다. 우물천정의 칸 수는 13×9칸의 117칸이겠지만, 불단 위 천정엔 정교한 닫집이 경영되고 있어 외관적으로는 96칸만 관찰된다. 시문된 문양은 8엽연화문이다. 두 세 곳에서 8엽마다 범자를 새겨 팔엽연화문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8엽에 새긴 범자 낱낱은 한 글자 한 글자가 곧 부처이고 보살인 ‘종자(種字)’다.

종자라는 것은 밀교에서 여러 불보살의 고유한 상징인 실담범자 낱낱의 한 자(字)들이다. 따라서 사찰천정에 장엄된 범자 팔엽연화문은 〈대일경(大日經)〉의 경전을 형상화한 태장계만다라의 ‘중대팔엽원(中臺八葉院)’에서 불보살의 존상이 결좌를 맺고 있는 여덟 자리에 고유한 범자(梵字)를 대신 표현한, 한국의 〈종자만다라(種子曼茶羅)〉라 하겠다. 고도로 압축된 팔엽연화문은 연기법의 법계에 깃든 우주만유의 실상을 조형의 방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수 흥국사 대웅전 전경. 한두달 후면 해체수리될 예정이다.
실담문자 대표 ‘범자’… 한글창제 활용

실담문자로 대표되는 범자는 〈용재총화〉나 〈지봉유설〉에서 한글창제과정에서 원형으로 활용되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한글의 원류가 산스크리트어라는 것이다. 사실 실담문자와 한글은 음운체계와 발성기관에 따른 아음, 순음, 치음 등의 분류에서 놀랄 정도로 닮았다. 〈실담장해의 총론〉에서 다음의 구절은 우리나라 사찰 전정장엄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범자 팔엽연화문의 본질을 관(觀)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실담문자는 범천께서 지은 것이다. 범자 한 자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여러 부처님의 만행만덕, 백천삼매, 팔만바라밀의 무량묘의가 모두 하나의 범자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

무릇 범자 한 자(字)의 뜻이 그러할진되, 저토록 천정 가득 펼쳐놓은 팔엽연화문은 그 무엇의 도구로 깊이를 재겠는가? 불가사의의 불가설이니 유마힐의 침묵을 빌려 오직 침묵으로 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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