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건지려면 내면부터 건져야 거죽이 건져진다

▲ 그림 최주현

무슨 일이든 부처가 있다면 할 거고 부처가 없다면 못할 거 아닙니까.
그렇게 편안하게 생활을 살아라 이겁니다.
물에 파도가 치면 파도 치는 대로 잔잔하면 잔잔한 대로
어떠한 용도에 위기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주처에 놓고 갈 수 있다면 그건 최고예요
.


문제가 있든 없든 관할 수 있으려면
문)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간절하게 관하게 되는데 문젯거리가 없을 때는 관하는 것이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문제가 있거나 없거나 평상시에 늘 관하는 게 일상화 될 수 있겠는지요?

답)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공부하라고 그러죠. 와선이나 입선이나 좌선이나 행선이나 둘이 아니라고요. 항상, 하다못해 변소에 똥을 누러가도 참선이라고요. 그건 요만한 거 하나 빼 놓을 수가 없어요. 그건 모든 거를 자기가 하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하고 가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나고 자기가 몸을 움죽거리고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을 항상 하죠. 앉아서, 혹시나 시간이 있어서 앉아서 좌선을 할 때는 15분이고 얼마 동안이고 시간 나는 대로 앉았을 때는 반드시 ‘주인공 너만이 너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오직 그것만 관하는 거예요. 말로 하라는 게 아니라 ‘너만이 증명해 줄 수 있어.’ 하는 거요. 그것이 바로 곧장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같은 거예요.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하고 갈 때에 어떠한 거든지 닥치는 대로 주인공에다 놓고 ‘너만이 길을 정돈해서 잘 가게 할 수 있어.’ 용도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용도니까. 용도가 닥치는 대로 자기 용도에 따라서 적합하게 굴려놓는 거.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은 땅속으로나 물이 사방에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죠. 여러분도 한바다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에요. 모두가 보림을 해야 하니까. 한군데로 보림을 해야 하니까.
그러나 물이 흘러 들어갈 때는 흙물도 스며들어가고 똥물 핏물 고름물 어느 물 하나, 더럽고 깨끗함이 없이 그저 흘러 들어갈 뿐이죠. 흘러 들어가서 바다가 되면은 그 바다에서 수증기로 올라가서 물을 정화시켜서 내려보낼 때는 평등하게 모두 그릇대로 먹을 수가 있죠. 그게 생수예요. 그거를 이름해서 정수라고도 하죠.

그렇듯이 우리 공부하는 것도 지금 그렇게 하고 가는 거예요. 나쁜 거든지 좋은 거든지 더러운 거든지 깨끗한 거든지, 안되는 거든지 되는 거든지 다, 내가 항상 그러죠. 안되는 거는 ‘되게 하는 것도 너야.’ 하고 놓고 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항상 이렇게 거기다가만 모든 거를 다 놓으라고 그랬죠.
모두들 욕심을 끊어라, 번뇌를 끊어라 이렇게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욕심을 끊는 것도 아니고 안 끊는 것도 아니에요. 가는 거 잡지 말고 내 앞에 오는 거 마다하지 말라 이런 소리예요. 그렇다고 해서 도둑질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거는 스스로서 자기가 방지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되겠죠. 인간이기 때문에 나쁘고 좋은 거는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오는 거 거절하지 말고 가는 거 잡지 마라. 이거는 중도를 말하는 거예요. 가는 걸 억지로 쫓아가려면 그거는 욕심이고 오는 거 자꾸 거절을 하는 거는 무능하게 되는 이치죠. 그러니까 오는 거 마다하지도 말고 가는 거 잡지도 마라, 이런 소리죠.

그러니까 나는 그래요. 억지로 이것을 오는 거를 마다하지도 않고 억지로 가는 거를 붙잡아다가 내가 뭐를 할 양으로 그러진 않아요. 하다못해 불사하는데 돈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여러분 앞에 괴롭게 하질 않아요. 단 하나 있다면 ‘너만이 할 수 있어.’ 하는 것뿐이지. 여러분은 말을 하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지만 난 그게 아니죠. ‘네가 있다면 하고 없다면 그만 둬라.’ 하는 거죠. 그렇잖아요? 부처가 있다면 할 거고 부처가 없다면 못할 거 아니에요. 그렇게 편안하게, 그렇게 생활을 살아라 이 소리죠. 물에 파도가 치면 파도치는 대로 잔잔하면 잔잔한 대로 어떠한 용도에 위기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냥 거기다 놓고 갈 수 있다면 그건 최고예요.

거기에는 조금도 거짓이 들어갈 수가 없죠. 그건 왜 그런 줄 아세요?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불성이 있거든요. 생명의 근본이 다 있어요. 저 돌에도 있고 나무에도 있고 꽃에도 있고, 어느 것에도 불성이 없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노골적으로 그렇게 놓고 그렇게 네가 있다면 하고 네가 없다면 못하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진짜 너만이 할 수 있는 거지.’하고 관하세요, 위급할 때도. 그러면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느냐. 거기에서 몸 안에 있는 그 생명들이 다 보살로 화해서 응신으로 화해요. 응신으로 화해서 정히 급하고 아주 문제가 큰 문제라면, 나라의 일이라든가 세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서 뭐 지구가 잘못된다거나 이런 문제가 일어난다면 모든 일체, 저런 나무 하나도 그냥 있지 않고 그 나무의, 즉 말하자면 목신이죠. 목신이, 즉 말하자면 우리의 불성의 영혼이에요. 불성은 가만히 있으면서 영혼은 그냥 몰입해 준단 말이에요. 하다못해 어느, 즉 말하자면 묘지가 많은 데서도 거기서도 전부 한마음으로 모아서 응신이 돼 줘요. 이 소리 거짓말로 들으시겠죠?

얼마나 못났으면, 하다못해 꽃 한 송이 보고도 그냥 내가 이렇게 아파서 죽겠는데 어떡하면 좋으냐고 하니까, 그냥 아주 관하면서 비두발발을 하고 살려달라고 하니까 꿈에 이렇게 보이더래요. 아주 예쁜 선녀가 그냥 꽃으로다가 장식을 했더래요. 그런데 꽃 이파리가 전부 달렸는데 꽃 이파리 하나하나를 떼어 주더라는 거예요. 하나하나의 꽃 이파리를 떼어 주더래요. 떼어서 그냥 붙여 주더랍니다. 그 길로 병이 나았대요. 그럼 그게 꿈일까요?
우리가 전력이 들어올 때는,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보지 못한다고 그게 꿈일까요? 불 들어온 것만 알고, 불 나가는 것만 알고 ‘전력이 와서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은 하지만 정말 진짜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건 보지 못하시죠. 보지 못한다고 해서 아니라고 꿈이라고 그러진 않아요. 실질적이에요. 모두가 그렇게, 그게 바로 여러분이 공부를 해서 능력인 거죠. 그런데 여러분은 때로는 ‘아, 나는 그것까지 공부를 못해서 못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게 돼요. 그게 아니에요. 누구나가 다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길을 띵겨 주는 거예요. 실천을 해보라고 말입니다.

견성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요
문) 어떤 책을 보니 견성하면 큰 환희심이 난다고 하는데 견성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그거야 뭐 자기가 생각하기에 달려 있죠. 금방 그냥 강도가 들어와서 칼을 가지고 들이덤빈대도 자기가 환심이 나면은 그냥 환심이고 그렇죠, 뭐. 어떤 사람이 얘길 하는데 그러더군요. 이 공부를 한 몇 해 해 나갔나 그런데 어느 날 강도가 들어왔더라는 거예요, 변소 문을 타고. 강도가 느닷없이 방문을 쩍 열고 들어오는데 신사복을 아니, 아래 위 아주 똑같은 거 있죠? 그걸 뭐라고 그러죠? 그렇게 입고선 쫙 빼고 들어왔는데 하나 뭣도 줄 것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그 칼로 죽인다 하더라도 줄 것이 없으니 어떡하나.” 그랬더래요. 그러니까 그 시계라도 달라고 그래서 줘서 보냈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여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그 마음은 환희심이에요. 지금 어떠한 문제가 닥쳐도 자기는 여유 있게 환희심을 가졌기 때문에 둘로 보지 않은 거죠. ‘내가 만약에 극한 사정에 어려웠다면 나도 저랬을 거다. 만약에 한 열흘 굶었으면, 내가 굶은 거보다도 자식들이 있어서 자식들이 굶어서 부황이 나서 죽게 됐을 때 나는 저거보다 더했을는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으로써 환희심을 일으킨 거죠. 그래서 부인 반지도 아주 뺏기는 게 아니라 그냥 성의 있게, 그냥 반지고 뭐고 시계고 뭐고 다 빼 줘서 “이것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가지고 가시면 좋겠다.”고 이렇게 했대요. 그랬더니 고개를 꺄우뚱하면서 그걸 들고선 한참 보더니만 주머니에다 넣고 말없이 그냥 가더랍니다. 칼도 버리고. 그러니까 우리가 환심이라는 것이 무슨 잘돼서만이 환심이 아니라 극한 사정이 있어도 환심은 있어요. 그게 지혜로서 물리가 터지면 저절로 그렇게 되죠, 여유 있게.

지금 견성이라는 거 말했죠? 그런데 견성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만남에 의해서 견성이에요. 즉 말하자면 내 이 몸속에 있는 생명체의 의식들이 다 조복을 하고 또 나아가서 거기에서 조복을 하게 되면 자기 주인공과, 즉 자불과 자기 육체와 둘이 아니게끔 만남이 있죠. 그거를 견성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깐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가는 게 견성의 진로를 지금 쥐고 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해 보지 않고는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는 거죠. 내가 만약에 어느 데까지, 부산을 갔다 왔다든가 미국을 갔다 왔다든가, 갔다 와서 거기 갔다 오니까 이렇더라 하고 그 길을 얘기하지, 갔다 오지도 않고 어떻게 그 길을 얘기하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모두 그것을 짐작하고 알고 스스로서 조복이 되고 스스로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거요. 둘 아니게 걷고 있죠.

이게 얘기로 하려면 참 그렇게 어려운데, 우리가 몸 안에도 천차만별의 의식이 들어 있어요. 그럼 이 몸뚱이 하나가 뭐냐 하면은 한 개체죠. 한 개체인데 그 생명들의 집이죠, 그러니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집과 같아요. 즉 말하자면 집합소죠. 그런데 그 집합소에서 사는 생명체들이 전부 이 거죽의 내 몸뚱이로서 그 심부름을 하지 않는다면 거기서도 심부름을 안 해 줘요. 안 그래요? 내가 먹을 거를 주지 않는다면 거기서 작용을 못해 줘요. 여기서 주면은 작용을 해 주고 여기서 안 주면은 그냥 송장 되는 거죠.
그래서 그 생명체들이나 나나 서로 도와주는 형상이죠. 그래 서로 도와주고 서로 해 주다 보니까 인제 그 양면을 다 다스리는 내 선장이 있구나. 우리가 지금 자불이라고 하지마는 그걸 주인공이라고 해도 돼요. 그 ‘주인공이 있구나.’ 하는 걸 알았을 때는 그 양면의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모든 거를 작용을 해 주는 것이 바로 그 선장으로 인해서 된다는 걸 알게 되고, 선장으로 인해서 다스려진다는 걸 알게 되고, 선장으로 인해서 우주 삼천대천세계로 한생각을 돌릴 수도 있고 그런 거예요. 만약에 예를 들어서 ‘색경을 봐. 네 얼굴이나 내 얼굴이나 똑같이 있는데.’ 하고 보이죠? 색경을 보는 놈도 그렇고 비치는 놈도, 즉 말하자면은 환상일 뿐이죠.

그런데 그 관상을 자꾸 점프해 가면서 일으키고 작용시키고 하는 고놈은 바로 색경을 봐도 비치지 않아요. 그냥 당신 마음의 거울이 다 알게 되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거를 들어서 견성이다 성불이다, 그 이름만 들어서 견성하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대신 견성해 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 이름, 꿈, 이런 것에 얽매이지 마시고 없든 있든, 잘하든 못하든,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이끌어 가는 자기 주처만 꼭 믿고 하세요. 그런 걸 보더라도, 그런 걸 듣더라도, 어떠한 경을 보고 놀라더라도 거기다가 놓고 평등하게 공법으로 그냥 가세요.

각종 사고들이 우연은 아니겠지요
문) 현대 사회는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식이 부모를 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기도 하며 각종 사고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지요?

답) 이거는 내가 아무리 그럭하고 싶어도 대신 내가 똥 눠 줄 수도 없고 병 앓는 걸 대신 앓아 줄 수도 없고, 또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 대신 먹어 줄 수도 없고, 대신 잠자 줄 수도 없습니다.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이 도리의 섭류를 자유자재하려면 자기만이 자기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무(無)의 세계에 모든 전파를 하고, 또는 유(有)의 세계는 말로 하고 몸으로 행을 하고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런데 무의 세계의 중용은 한 찰나에 오고 가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네들이 왜 그렇게 됐느냐. 모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마음의 차원이 이 세상에서 그냥 그대로 살아나가요, 차원대로. 그래서 서로, 우연이라는 건 없습니다. 잉태를 해서 애를 낳을 때도 그 어른들 차원에 따라서 잉태가 됩니다. 종자가 있죠, 왜? 대추 종자라든가 무 종자라든가 종자가 있듯이, 감나무에서는 감이 열리고 복숭아나무에서는 복숭아가 열리듯이 그거는 피치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을 지은 대로, 고 차원대로 가서 인연이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소리가 나게 되지요. 깡통끼리 모였으면 깡통끼리 소리가 나요. 그냥 조금만 이렇게 저거 해도 소리가 나죠. 즉 인과를 지었으면, 또 업을 지었으면 서로가 그 업 지은 사람들끼리, 원수들끼리 만나고, 내가 예전에 그런 얘기 한 예가 있죠.

옛날에는 깻벌레 하고 거미들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오줌을 통에다가 담아 가지곤 그것들을 오줌에다가 넣어서 죽였어요. 그것이 이 하루 깡통으로 잡아도 고 이튿날 또 봐도 또 그렇게 있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지. 그냥 이 오줌통에다가 그냥 집게로 담아서는 저거 하면 그냥 오줌통에다 넣고 뚜껑 덮어 놓고 이렇게 죽였어요. 그런데 한 오십 살이 되도록, 아니 사십 몇 살이 되도록, 옛날에는 사십 몇 살이다 하면은 늙은이처럼 보였어요. 그래 그렇게 살다가 보니까 애가 없는 거예요. 애가 없는데 어느 스님이 가시다가 인제 그 애를…. 아니, 내가 얘길 거꾸로 했네요. 애를 인제 낳아서 기르는데 두 형제를 낳아서 길렀단 말입니다. 그렇게 많이 인제 죽이고 살았는데, 형제를 낳았는데 어느 중이 가다가 보시고선, 그 애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쟤가 서당엘 가면은 서당에 갔다 올 때쯤 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나는 깻벌레고 하나는 거미다. 거미가 원수를 갚으려고 나온 거니까 절대로 이거는 그냥 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 철사로 이렇게 망을 해서 둥그렇게 병아리 집 모양으로 해서 놓고는 거기다가 가마떼기를 이렇게 하고 쪼금만 새를 내 놓고 그 안에다간 곁불을 질러서 놓고, 그러고서는 올 때가 되면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당신 스스로 항아리 뚜껑을 덮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대로 인제 하고 나니까 “엄마! 배고파. 엄마! 배고파.” 하고 들어오더니만 그냥 막 악을 쓰고 울고불고 그냥 엄마 아빠를 찾고 막 울고 그러더니 어느 시간이 가니깐, 이 연놈들 어디 갔느냐 이거예요. 이 연놈들, 요 때에 원수 갚을 땐데 어디로 갔느냐고 그냥 펄펄 뛰고 울고 그러더니만, 너무 징그러워서 그 한 시간 동안 나오질 못하고 있다가 나왔는데 보니까 그 양쪽에 두 군데다가 해 놨는데, 하나는 깻벌레고 하나는 거민데 그냥 전부 걸쳐서 거기에 우물우물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스님께서 그거 살려준 거죠. 그러니 그 깻벌레하고 거미하곤 다 그 스님께서 다시 그 옷을 벗기고 천도를 시키고, 그 두 부부는 거기에서 모두 달려들어서 뜯어 먹힐 텐데 고만 뜯어 먹히지 않고 그대로 살아서 부처님 앞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생을 보냈대요.

그런 거와 같이 모든 게 마음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게. 그게 바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 이 몸속에 있는 그 생명의 의식들이 다, 선업도 있고 악업이 있고, 인과도 있고 유전도 있고 모두, 영계성도 있고 모두 거기에 뭉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하면 이것이 다 사라진다 이 소리예요.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하는 것도 고시간에 마침, 또 고렇게 가는 수가 어디 있느냐 이거죠. 그것도 우연히는 아니에요, 모두가. 그냥 가다가 자빠져서 코가 깨져도 그건 우연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건 절대 철칙이에요. 자기가 죄를, 알지 못하게 죄를 지으면 알지 못하고 받게 마련이고, 알고 짓는다면 알게 받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잘못되고 잘되고 모든 거를 그 공한 중심에다가 다 맡겨 놔라. 네가 죄 짓는 게 아니다.

왜? 더불어 같이 살고 있으니까 공생이 아닙니까. 공생ㆍ공심ㆍ공체ㆍ공용ㆍ공식화 하고 그냥 같이 돌아가는데, 더불어 같이 살아나가는데 뭐가 내가 따로 있습니까. 내가 따로 지을 죄가 있나요?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고 해서 마구 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내가 지을 게 없으니깐 그냥 내가 막 해도 죄가 안된다더라.’ 하고 이럭해선 안 되죠, 또.
그러니까 모든 것은 자기 마음으로써 자기를 다스려서 그 불기둥, 즉 말하자면 중심주에다가 모든 거를 놔라 이겁니다. 거기다 맡겨라. 우리가 돌아가는 것이, 돌아가는 수레가 바로, 우리 돌아가는 몸이 다 거기에 꿰여서 돌아가고 있으니까.

가족에게 마음공부 인연 맺어 주고 싶은데
문)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마음도 편해지고 좋아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권해 보지만 인연을 맺어주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인연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답) 인연이 없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자꾸 붙들고 저거 하면 외려 도망을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보이지 않는 데서는 그렇게 ‘둘이 아닌데….’ 하고 결정을 지어 놓고, 그냥 보이는 데서는 씻은 듯 없는 듯 있는 듯 하게 그냥 해 버리면 어느 땐가는 그 사람이 알게 됩니다. 그 마음이 알게 돼서 점점 점점 그 마음먹던 것이 달라지게 되죠. 달라지게 돼서 결국은 같이 친밀하게 돼요.
그게 말을 안 듣는 것도 설득하려니까 그래요. 설득을 해서. 친밀하질 못해서. 그렇게 친밀하지는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인정이 많아서 불쌍한 생각, 안된 생각을 많이 했지 지금 현재 물질적인 그 사람하고는 그렇게 친밀해 보지 못했잖습니까. 그러니까 자꾸 내면의 주인공하고 같이 둘 아니게끔 해야 그 사람이 껍데기가 듣게 되는 거죠. 그래 건지려면 내면부터 건져야 거죽이 건져진다 이런 말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