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漢岩) 선사의 편지 〈19〉

공부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깨침엔 견고한 신심이 필요해

조창환 선생에게 보낸 답서
 삼가 편지는 받고서 그간 체후(體候)가 만중하시며 집안도 두루 평안함을 알았으니, 우러러 위안이 되고 송축합니다. 또 화두공부도 여일(如一)하게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순혈하기(純血下氣 : 혈기가 가라앉고 안정됨)도 잘 되는 모양이고, 잡념도 많이 제거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옛 선승들께서는 공부가 잘 되어도 기쁘다는 생각을 내지 말고, 아니 되어도 번뇌를 일으키지 말라고 하셨으니, 견고하고 깊은 신념으로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공부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또 화두 참구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화두를 참구할 때에는 마음을 한 결 같이 하여 똥 누고 오줌 눌 때에도 간단(間斷)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조석(朝夕)을 논해 무엇 하겠습니까?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간단(間斷, 끊어짐) 없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요한 곳과 시끄러운 곳, 움직일 때나 가만히 앉아 있을 때나, 그리고 행주좌와와 깊은 산속, 도시를 막론하고 다만 화두를 참구하여 오래토록 익히는 것에 주력하십시오.
또 부처(佛)란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사람마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각성(覺性 : 깨달음의 성품)이 신묘자재(神妙自在)하여 능히 고요하게도 하고 능히 움직이게도 하며, 능히 말하고 능히 침묵하게 하며, 능히 중생이 되기도 하고 성인이 되기도 하며, 미(迷)하게도 하고 깨닫게도 하나니, 그 각성을 깨달으면 성인이고 미혹하면 범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묘(神妙)하다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싱그러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神)이라는 말이 귀신(鬼神)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성(佛性)을 한번 깨달으면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구(不垢), 부정(不淨)이고, 또 옛과 지금에 걸쳐 무량무변해서 본래부터 불사(不死)인 것이니, 귀신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내가 혼백(魂魄)과 귀신이라는 말을 쓴 것은, 중생은 미(迷)하면 선악의 업을 지어 죽은 뒤에는 업을 따라 태어나기 때문에 귀신이라고 말한 것이니, 절대 부처(佛)를 귀신(鬼神)으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 불법이 들어온 이후에 재가자(신도)와 출가자(스님)를 막론하고 참선하여 도(道)를 깨친 사람은 무수히 많습니다. 꼭 부처님 앞에서(사찰에서) 참선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무를 보는 복잡한 가운데에서 득력(得力)하는 것이 적정(寂靜)한 곳에서 득력하는 것보다 10만 억 배나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로지 당사자의 신심이 얼마나 견고한가? 그것이 관건입니다. 이만 줄이옵고, 답서의 예를 갖추지 않습니다.
기축(1949년) 2월 초4일
산승 방중원(方重遠) 올림

이 편지는 강릉 사천초등학교 교장인 조창환에게 답한 편지이다. 화두를 참구할 때에는 마음을 한 결 같이 하여 일체처 일체시에 간단(間斷) 없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佛)란 깨달았다는 뜻으로, 사람마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각성(覺性 : 깨달음의 성품)이 신묘자재(神妙自在)하여 능히 중생이 되기도 하고 성인이 되기도 하며, 미(迷)하게도 하고 깨닫게도 하니, 깨달으면 성인이고 미혹하면 범부이므로, 신묘(神妙)하다고 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신(神)이라는 말이 귀신을 뜻하는 것은 아니므로 절대 불성과 혼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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