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각 저 생각 지혜롭게 뛰어넘어 좋게만 생각하세요

▲ 그림 최주현

그저 의심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을 의심하면 누구를 믿습니까.
못났든 잘났든, 궁하든 부자든 자기가 자기를 믿어야 합니다.
자기 정신계의 참자기를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나라도 돌볼수 있게 됩니다.

환생하신 조상에게 천도재가 의미 있나요
문) 우리가 천도재를 지내는데 이미 다시 환생하신 조상님들에게도 그 천도재가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답) 옛날에 어머니는 노망하시고 그 아들이 죽었더랍니다. 죽어서 그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 주게끔 되어 있어서 제사를 해마다 그렇게 아드님을 위해서 지냈더랍니다. 근데 아들이 어느 정승의 집안으로 다시 태어나서 아주 잘사는데도 그 아들이 해마다 같은 날 꿈을 꾸면은 그 노인네가 그냥 부엌에 들어가서 일을 하시면서 그 밥을 꼭 그렇게 해다가 상에 놓고 그렇게 정성을 들이더랍니다. 그래서 그 길을 쫓아서 그 집엘 갔더랍니다. 그 집엘 가서 그 노인네하고 같이 공양을 하고 나오고 나오고 했더랍니다. 그렇게 인제 지내기를 스무살이 넘도록 그렇게 꿈을 해마다 꾸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꿈을 꾼 대로 본다면 그 길이 아주 참 눈에 선해서 생시에 어느 날 자기가 찾아갔더랍니다. 꿈에 본 대로 고대로 찾아가니까 그날 정말 밥을 하고 계시더랍니다. 그래 밥을 해 놓는데 그 얘기를 그 노친네더러 물었더랍니다. 왜 오늘 꼭 이렇게 밥을 해 놓으시느냐고. 제가 꿈이면 이 날은 꼭 여기 와서 밥을 먹고 간다고 그랬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하는 소리가 내 아들이 고생만 하고 죽었으니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지혜롭게, 좀 지혜로운 집에 태어나서 지혜롭게 살라고 내가 제사마다 잊지 않고 내 죽는 날까지는 꼭 하기 위해서 제사를 모셨노라고 하더랍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아, 우리 어머니가 나를 위해 이렇게 나이가 먹도록 제사를 지내 줘서 내가 지혜로운 집에 태어나서, 정승에 판사집으로 태어나서 내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는 그냥 거기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부인이 인제 밥을 해 놓으신 거를 맛있게 나물에다 비벼서 자시고선 그 길을 걸어가면서 한없이 울었더랍니다. 그래서 그 부인을 나중에는 모셔다가 같이 살았다고, 얼마 살지는 못했으나 그렇게 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사람이 아들이 죽거나 부모가 죽거나 이런다면은 그 원소는 꼭 남습니다. 우리가 채소를 심어서 먹어도 씨앗은 꼭 남듯이. 꼭 그것은, 그 에너지는 남는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 에너지가, 즉 말하자면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면은 그 에너지는 에너지통인데 에너지 주장자로 화한다. 에너지 주장자로 화하기 때문에 예전에 임제 스님 말씀이 이랬답니다. “네 주장자가 있다면, 그 마음공부를 해서 주장자로 화했다면 내가 내 주장자도 너에게 줄 것이로되 네 주장자가 화하지도 않았다면 내 주장자를 너한테 줄 게 아니라 네 주장자를 뺏어 올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죽으면 아주 죽는 게 아니라 껍데기만 이렇게 죽어서 없어지는 거지, 그 원소 자체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소 자체는 끝없이 가는 것이고 나의 영혼 그 자체가 일을 저지르면 모든 게 입력이 돼서 그것이 현실로 나오기 때문에 업이 있다, 업력이 있다, 유전성이 있다, 영계성이 있다 이런 모든 문제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깐 그 영계성을 제거하려면 이렇게 관하시라. 이렇게 한번 관하실 때마다 그건 무너진다. 그 업력은 무너지고 마니까 생각하기에 달렸다. 그 업도 없고 고도 없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달린 거다.

우리 몸뚱이가 사는 것을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가 공생입니다, 그냥. 우리 세포 하나의 생명도 모두 이것이 살아 있는 생명들이 다 같이 더불어 같이 하고 가지 어떻게 따로따로 하고 갑니까. 근데 그걸 같이 하고 가지 않기 때문에 병이 생기면 쌈박질이 나서 땅이, 살이 굳는단 말입니다. 굳어서 이치가 벌어지고 또 에너지가 막혀서 백혈이 되고, 그냥 온통 이 병들이 이렇게 번성하는 겁니다. 유전성이 없어지질 않아서 그렇게 되는 거고, 영계성이 나오고. 이렇게 문제가 아주 그냥 요만한 거 하나 가지고도 이만큼 벌어지고 그러죠.

그러니깐 우리가 그렇게 벌어지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그걸 없애기 위해서도 그렇고, 우리 한생각의 공덕을 그냥 뭉청 쌓아서 이렇게 해 놓으면 그 자식 등네에까지도 그게 미치겠으니까 말입니다, 모두가. 부모가 그렇게 덕을 지어 놓은 것이 자식등네에까지 내려간다. 그게 자식에까지 내려가서 그 자식에서 끊어지느냐.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냥 원소는 항상 남아 있듯이 이 은하계의 별성이 그냥 떨어져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원소는 남고 껍데기만 떨어져서, 떨어지면은 그게 그냥 아주 우리가 보지도 못하게 가루가 돼서 없어지죠. 그러나 그 원소는 남으니까 그것이 다시 옷을 입고 나오는 거나 같습니다. 그래 이 은하계에도 별왕이 있듯이, 별왕이 있어서 그 옷을 입히듯이 그렇게 원소가 있기 때문에 옷을 입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돌아가신 부모라고 해서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고, 또 자식이 죽었다고 그래서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고, 인연에 따라서 어떠한 나쁜 인연이 있다면 나쁜 인연으로 인해서 같이 한식구가 됩니다. 나쁜 식구가 그 인연이 됐으면은 서로 고생을 하죠. 서로 고통을 주고 서로 싸우고 모두 미워하고 문제가 생기니까, 일을 바깥에 나가서 벌여 놓고 이렇게 되니까 그렇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관하는 거를 만날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는 정신계의 자동적인 컴퓨터 같은 그런 역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어저께도 과거고 작년도 과거고 그렇지만 과거에 잘한 거든지 잘못한 거든지 입력이 된단 말입니다, 입력이. 꼭 입력이 됩니다. 한마디를 잘했으면 잘한 대로 입력이 되고 못했으면 못한 대로 입력이 됩니다. 입력이 되면 그 입력이 현실로 나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렇다면은 그 잘한 거는 잘한 것대로 나와서 좋은데요, 못한 거는 못한 것대로 집안에 일이 생긴단 말입니다. 집안에 일이 생기니까 그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관하시라 이런 겁니다. 어떠한 위급한 일이 앞에 나와서 생기겠다 그러면 ‘이거 큰일 났는데. 이거 꿈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문제가 이렇게 생기는데 어쩌나.’ 이렇게 생각이 되면은 그것을 ‘바로 너만이, 주인공 너만이 해결을 할 수가 있어.’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을 형성시켜서 태어나게 했으면, 화해서 태어나게 했으면 반드시 그건 주인공, 주인이 이끌고 다니는 겁니다. 그냥 여러분 몸뚱이가 그냥 이렇게 다니는 게 아니라 여러분 원소 자체가 바로 여러분 몸을 끌고 다닙니다. 정신계의 자기가 물질계의 자기를 끌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깐 잘 끌고 다니게 하려면 생각을 좀 잘하시라. 현재에 사는 걸 봐서 ‘이거 절대로 되지 않을 텐데. 어떻게 거기다가 관한다고 되겠나.’ 이렇게 생각하시지만 그렇게 하지 마시고 될 수 있으면 내 생각을 좋게 하세요. 자꾸 이 생각 저 생각 하시면은 고것이 좁아들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고렇게 일이 그냥 되고 말죠. 그러니까 지혜롭게 그냥 뛰어넘으세요, 그냥. 뛰어넘어서 좋게만 생각하세요. 우리가 흙탕물이 있으면은 그건 먹을 수 없죠. 먹을 수 없으니까 그냥 맑은 물이 돼서 먹겠다 이렇게 그냥 생각을 하시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 없이 생각하는 거고 또 함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그것이 안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몸이 아파서 뭐 암이 걸렸다 이러더라도 그냥 죽는다고만 생각하지, 이거를 모두 이 몸 안에 든 그 병 증세를 병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암이라고 이름을 지어 놨으면 ‘암도 너와 나와 둘이 아니잖아.’ 이렇게 안으면은 그냥 안는 대로 그게 소멸되게 되어 있습니다. 솟아오르게 되면 소멸되게 되어 있는 게 모두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심성과학도 되면서 우리가 심성의학도 됩니다.

그러니깐 여러분께서 편리하게, 좀 편안하게, 자손들도 좀 착하게 이렇게 두시려면 떳떳하게, 조그만 거라도 떳떳하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그런 계기를 가지고 가정에서 해 나가신다면 그 밑의 자손들도 보이지 않게 그 뜻이, 그 아버지가 생각하는 마음과 아들이 생각하는 마음과 같아집니다. 그래서 일은 같지 않지만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같아집니다. 같아져서 지혜롭게 남을 해치지 않고도 내가 이익하게 할 수 있고 또 내가 해를 안 보면서도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생깁니다.

어떤 땐 이럽니다. “이북에서 영 돌아가신지도 모르고 스님 이런데 제사를 지내면 어떡합니까?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죠.” 이러거든요. 살았다 하시더라도 제사를 지내드려라 이럽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배가 고파서 사시더라도 배가 불러서 사실 거다 이겁니다. 여기에 자식의 그 정성으로서 부모가 배고파서 사실 거를 배고프지 않게 사실 수 있다 이겁니다. 그게 정신계와 물질계가 같이 동일하게 돌아가니깐 얘깁니다. 죽어야만 제사를 지내드리는 게 아니라. 그래서 생일도 있고 제사도 있는 것이죠. 그런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의심치 마세요. 항상 의심하면 안 됩니다. 그저 요만한 걸 정성을 들이더라도 의심하시지 마시고, 또 요만한 생각을 해서 자식들한테 생각을 넘겨준다 하더라도 의심치 마시고 주인공에다가 너만이 저 사람도, 저 애도 주인공이 있고 나도 주인공이 있는데, 임제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듯이 너만이 여기 내가 이쪽의 주인공에 가서 그저 환히 밝게 해 달라고, 너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이렇게 관을 하니까 자식한테도 불이 들어오더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저 의심하시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을 의심하시면 누구를 믿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을 믿으셔야죠. 못났든 잘났든 또 궁하든 부자든 자기를 자기가 믿어야 합니다. 자기 정신계의 보이지 않는 참자기를 진짜로 믿으셔야 됩니다. 그거를 믿으셔야지 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다 이게 나라도 돌볼 수 있고 그렇게 됩니다.

가정생활 하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지요
문) 저는 오래 전에 스님이 돼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인연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자식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고 가족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내 모습이 보면 가끔씩 후회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생활에서도 중심 잡고 공부할 수 있을는지요.

답) 나는 예전에 빨치산으로 붙들려서 고문을 당하고 그래도 그 사람을 나무라질 않았어요. 왜냐하면 지금으로 말하면 내 자불이 바로 나를 단련을 시켜 주고 공부시키기 위해서 한 거니깐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외려 감사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다친 거는, 죄 없이 맞은 매는 금방 낫는다, 이게 실감이 나요. 돌아서서 얼마 안 갔는데 나았죠.

거기서 인제 예전에 저이 형사들이 사복을 하고 모두 거기에 있는데, 이렇게 시골집인데 이렇게 나를 방에다가 가뒀는데 한참 있으니까 아무 소리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얘, 문 좀 들어 보자.’ 이래요. 그래서 이렇게 드니까 이렇게 큰 문이 이렇게 그 뭐라고 그러죠? 양쪽에 이렇게. 돌쩌귀? 그거 이렇게 끼웠던 게 한쪽으로 이렇게 젖혀지는 겁니다. 젖혀지길래 나와 보니까 책상을 두 개를 이렇게 해 놓고 양쪽에들 앉아서 그냥 모두 엎드려서 자고 있는 거예요. 자고 있는데 건빵 있죠? 쭉 그냥 봉지째 놔두고 먹다가 그냥 저거 하고, 그런 거 ‘저걸 가지고 나가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곤, 주섬주섬 봉지에다 넣어 가지고 그냥 나갔죠. 나가니까 뭐 그냥…. 그게 부처님 법이에요. 그냥 몽땅 어떻게 그렇게 자요? 그러니깐 자게 해 놓고 나가게 한 거지요. 그래서 나가서 한 이틀 있으니깐 그것이 다 아물고 다 낫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어느 땐가 그 해에 눈이 많이 와서 어디 가 잘 데가 없고 그래서 인제 소나무 위에로 올라갔는데 소나무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넓적하게 이렇게 갈래 진 데 거기를 올라가서 앉았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눈이 좀 녹아야 어떻게 내려가죠. 그래 잠이 들었는데 그냥 잠이 든 채로 아마 글로 떨어진 모양이에요. 떨어져서 이 앞니 두 이빨이 부러진 거죠, 그냥. 그래서 여기가 좀 달라요. 내가 예전에 생긴 거는 하나도 없어지고 다 달라졌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원망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 모습이라는 거는 잘생기게 할 수도 있고 잘못 생기게 할 수도 있고, 못생기게 한 것은 일리가 있어서 그런 거거든요. 잘생겼으면 내가 이렇게 중노릇하고 있나? 여기 전부 못났으니깐 중노릇하고 있지. 하하. 약삭빠르고 똑똑하고 그러면은 이 공부를 못해. 좀 듬직하고 못났으니깐 이 공부를 하는 거예요. 이 공부를 하되 세세생생을 얻는 거죠. 자유권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생활한다고 해서 또 자식을 낳고 이렇게 산다고 해서 그거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오직 그것도 역시 공부다. 모두가, 내 식구가 전부 스승이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 상대적인 스승이 없다면 내가 생활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또 상대적인 저런 나무 한 그루 모든 게 없다면 내가 그걸 보고서 깨칠 수가 없잖아요. 공부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깐 요만한 거 하나도 버릴 게 없고 내 스승이죠, 전부. 천칠백 공안이 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는 없어요. 없는 이유를 댈까요?

내가 항상 말하죠. 봐도 딴 거 봐야 하고 없어지고, 벌써 앞서 본 건 과거로 돌아가고 또 봐야 돼. 듣는 거, 현재에 들으면 또 금방 이거 들으려고 그러면 저게 없어지고,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죠. 한번 만나면 또 딴 사람 만나야 되고. 이렇게 하니 그게 어디 만났다 안 만났다, 봤다 안 봤다, 들었다 안 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 없잖아요. 너무 많이 돌아가니까. 빠르게 돌아가니까. 화해서 돌아가니까. 그러니까 그거를 부처님 법에서는 나툼이라고 그럽니다. 화해서 나툰다, 이렇게. 자꾸 바뀌면서, 바뀌는 거를 화한다고 그러죠. 화해서 나툰다. 건너뛴다, 이게. 그러니 무엇을 했다 안 했다 할 수 있으랴. 그러니 그대로 먹을 뿐이고 그냥 걸을 뿐이고 볼 뿐이고 들을 뿐이고 만났을 뿐이다. 그냥 모두가 공해 버렸다. 그런데 뭘 그렇게 아둥바둥 착을 두고 앨 쓰고 울고불고 그러느냐 이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떡하면 내 몸뚱이 통 안에서 벗어나서, 어떡하면은 대(大) 통 안에서, 이 지구라는 이 통 안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랴. 이 지구 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구를 바깥에서 굴릴 수가 없어요. 내 몸뚱이 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내 몸뚱이를 마음대로 자기가 굴릴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통 안에서, 이 몸통 안에서 벗어나게끔 하려면 모든 거를 거기다가 몰입하고 거기다 놓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당신밖에, 주인공 너만이 네가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하고 ‘있으면 이렇게 해 봐.’ 하고 자문자답도 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나오게 돼 있어요. 석가세존도 자기 스스로 연등불이 바로 수기를 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수기 받은 놈도 없고 준 놈도 없다 이런 소립니다. 자기 자불이 연등불에요.

애를 원하는데 장애아에 대한 두려움이…
문) 결혼해서 얼마 안 되지만 애를 빨리 갖고 싶은 마음도 있는 반면에 요즘은 장애아를 낳는 경우가 많아 두려운 마음도 생깁니다. 도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예를 들어서 한마디로 요약해서 얘기하죠. 공자님 어머니가 공자님을 낳게 된 것은 살면서 늦게 자손을 하나 두기 위해서 기도를 하러 인제 절로 올라갔는데 절의 스님이 관하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아무리 관하고 관해도 애기가 들어서지 않았더랍니다. 그래서 육 년째 하고선 칠 년째는 절에를 안 갔더랍니다. 그랬는데 하루는 꿈에 그 스님이 나타나서 “얘야, 빨리 오너라. 네가 좋은 영가를 달라고 그래서 아무리 좋은 영가를 찾아도 없어서 못 줬는데 인제 하나 들어온 것 같다. 그러니깐 빨리 오너라.”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칠 년 되던 해에 가서 정성을 들이고 인제 그러고 왔는데 그 달부터 애기가 있어서 낳은 분이 공자님이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태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큰 자식을 두느냐 작은 자식을 두느냐, 박약아를 두지 않느냐 두느냐 이거에 달렸습니다. 이런 일이 지금 많아요. 어느 집은 자식이 없는 집인데 이게 정상이 아닌 어린애로 나타나서 이거를 수술을 해야 된다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내가 볼 때는 정상인데 왜 그러느냐 이랬다고요. 정말 정상이 돼서 정상이라고 그런 건 아니죠. 그 말 한마디에 그 사람도 정상인 줄 알고 관했기 때문에 그거는 정상으로 낳은 거예요. 아시겠어요?

이렇게 훌륭한 법을 우리가 독차지하고 이렇게 권리가 있고 모든 게 그 타파할 수 있는 계기가 있는데도, 능력이 있는데도, 자유가 있는데도 못한다면 아니 되죠. 그거를 왜 내가, 내가 그 마음을 그렇게 내 줘서 했단 말을 못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 공해서 찰나찰나 없어지기 때문에,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는데 어떤 발자국 떼어 놨을 때 내가 떼어 놨다고 할 수 있으리까.’ 이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여기 올 때 발자국을 떼어 놓고 왔을 텐데 그 많은 발자국을 떼어 놓으면서 어떤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 내가 떼어 놨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깐 내가 없다는 거예요, 공해서. 나뿐이 아니라 여러분도.

그래서 없는 가운데 ‘참자기’가 과거의 업을 그냥 멸해 주는 거죠. 자기가 한 대로 받는 거니까 어떠한 일을 했을 때 무효로, 즉 말하자면 과거에 입력이 된 걸 지워 주는 거죠. 그 지워 주는 역할도 능력이 있어야 지워지지 능력이 없으면 지워지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 경지에 같이 한마음이 될 수 있다면 아마 여러분도 ‘어허, 내가 했다고 할 게 없고, 또 할 거라고 생각도 못하겠고, 또 해 놨다고 할 수도 없구나.’ 이러면서도 무궁무진하게 자유의 그 용무를 해 나가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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