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중앙박물관 예일대 김연미 교수 초청 강연

-‘요나라 불탑, 불사리 장엄과 우주관’ 주제로

불교중앙박물관은 특별전 ‘열반 궁극의 행복’ 전시를 기념해 예일대 미술사학과 김연미 교수(35)를 초청했다. 예일대 첫 한국인 미술사 교수로 주목받는 그녀의 강연에는 250여 관중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요나라 불탑을 통해 화엄사상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공사상을 이야기하려 했던 요나라의 찬란했던 불교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정리=정혜숙 기자 bwjhs@hyunbul.com

 

거대하고 정교한 요나라 조양북탑

거란족의 찬란한 불교문화 대변

탑 1층 면에 새겨진 탑의 무한 반복

화엄의 세계 담으며 공사상 전해

 

▲ 김연미 교수는 … 서울대에서 동양미술사 석사 학위를 받고 2010년 하버드대에서 ‘요나라 조양북탑(朝陽北塔)과 화엄우주관, 요대 밀교 의례와 일본 진언종 의례의 관련성’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하이오주립대 미술사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예일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유목민 거란족 요나라를 세우다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산맥의 동쪽에서 살던 유목민족이었습니다. 당시 여러 유목민족이 북방에 살고 있었는데 907년경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해 카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스스로를 천황제라 부르며 거란국을 세웠고, 중국 남쪽 여러 나라를 통합하고 요나라를 설립 송나라와 대결구도를 이루었습니다. 1004년에 요는 송나라를 공격해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 매년 송은 요에 은 십만냥과 비단 이십만필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제국이었던 요나라는 제국을 세우고 거란 문자를 제작하는 것은 물론 도시 건축을 통해 다섯 개의 수도 만들었습니다. 또한 황제의 권위를 보여줄 궁전을 만들면서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갔습니다. 샤머니즘을 믿어왔던 거란족들은 발달된 종교를 받아들여야 했는데 이때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받아들이게 됩니다. 특히, 불교는 황실의 대대적 후원을 받아 발전하게 되는데 이 흔적들은 현재 광활한 초원에 남아 있는 거란족의 탑으로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상경의 경주 백탑은 7층 높이의 전탑을 세우고 정교하게 돌을 깎아 장식했습니다. 기단부가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은데 전체 높이가 25층 아파트 높이로 매우 거대하죠.

요나라의 문화는 무척이나 발달했는데 거란족은 스스로의 역사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요사〉라든지 몇몇 기록은 송나라 등 다른 나라 사람들이 짧게 서술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요나라 역사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덜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물로 보는 찬란한 요나라 불교

하지만 1984년~1996년 활발한 고고학 발굴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요나라는 학계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나라의 대표적인 유물이 내몽고에서 발견된 진국 공주와 남편의 무덤인데요, 여기에는 황금가면, 불상, 은으로 그물을 떠서 만든 옷, 호박 목걸이 등이 발견됐습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요나라가 금세공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국 공주의 금관 위쪽에는 도교상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도교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고, 남편의 관에서는 불상이 발견되어 한 집안에서 여러 종교를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 요녕성 조양북탑인데요, 지붕 부분을 겹겹이 쌓아올린 밀첨식 전탑으로 1043년 완성한 42.6m의 거대한 규모의 탑입니다. 인근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되지만 현재는 탑만 남아 있습니다. 12층과 탑 지하에는 사리공이 있는데 이미 지하의 사리공은 도굴을 당했고, 12층의 사리공은 다행히 잘 보존되어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탑의 규모가 워낙 컸기에 여기서 나온 수많은 유물로 박물관이 만들어졌는데 진신사리, 사리장엄구, 판석 비문, 공양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리는 빨간색과 흰색 두 과가 나왔는데 빨간색은 부처님의 피에서 흰색은 뼈에서 나온 것이라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또한, 밀첨식 탑은 요나라 탑의 특징으로 조양북탑에서 시작되어 조양시 인근의 다른 탑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각형 탑은 이후에 팔각형으로 변하면서 요나라의 중요한 탑형식이 됩니다.

 

▲ 요나라가 조성한 조양북탑. 지붕 부분을 겹겹이 쌓아올린 밀첨식 전탑으로 1043년 완성한 42.6m의 거대한 규모다. 12층 사리공에서 상당수의 유물이 출토됐다. 사진제공=김연미 교수

조양북탑 8대 성지 상징 탑장엄 ‘눈길’

조양북탑 1층 면을 장엄하고 있는 부조들은 굉장히 정교한데 이 안에는 두 개의 소탑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 면에 두 개씩 총 네 면에 위치해 있으니 총 8개의 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남벽에서 시계 방향으로 탑돌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탑을 탑으로 장엄했을까요? 이는 부처님 일생과 관련한 탑으로 〈대승본생심지관경〉의 8개 탑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룸비니 보드가야 등 부처님 8대 성지와 들어맞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 팔대 성지는 중국과 한국 스님들이 〈오공 입축기〉의 오공 스님, 〈송고승전〉에 실린 신라의 무루 스님, 〈왕오천축국전〉의 혜초 스님 등은 모두 인도의 8탑을 참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인도로 떠났습니다. 그만큼 8대 성지를 가보는 것은 신앙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탑 안의 탑은 비록 인도에 갈 수는 없지만 탑돌이를 하면서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8대 성지가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으니 이 탑은 불교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는 화엄 우주관이라는 매우 큰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좀 전에 설명 드렸던 탑 1층의 장엄 소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양북탑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조양북탑의 미니어처죠. 또 그 안에는 다시 탑 두 개가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각 사면에 두 개 씩 총 8개의 탑이 있고, 여기에 각각 다시 두 개의 탑이 새겨져 있고 또 그 안에 탑이 새겨지고 또 그 안에 탑이 새겨져 탑이 무한 반복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나라 법장 스님이 거울방을 만들고 촛불을 설치해 제자들에게 한 공간에 무수한 공간이 있고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니 본질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유사한 비유입니다. 즉 화엄 우주관과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양북탑은 이를 조성하신 온규 스님이 화엄연화장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엄우주관 ‘공사상’을 말하다

탑의 다른 유물들도 화엄의 사상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화엄경〉 제목이 쓰여진 명문이 전돌에서 여러 개 발견 되었고 장엄구도 발견 되었습니다. 진주 크리스털을 그물로 꾀어 1.5m 소탑 형태로 조성해 놓은 유물도 있습니다. 이 탑의 모양을 살펴보면 계단이 있고 층층마다 처마가 있는데 매우 특이한 구슬을 엮어 만들었습니다. 화엄우주관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비유입니다. 거대한 우주의 인드라, 거울처럼 비추는 구슬 또 그 구슬 안에 다른 모든 구슬이 투명하게 비쳐지고 비쳐집니다. 이 또한 화엄 우주 안에 모든 것이 연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인드라망을 비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층 사리공 안에는 각 면마다 아주 섬세한 동서남북 면의 성곽을 새겨놓았고 동벽에는 삼신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삼신 중 노사나불은 화엄연화장세계를 주관하는 주존불입니다.

화엄 연화장의 가장 핵심적 가르침은 공사상입니다. 탑 외부에서도 공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탑들은 각 면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데 모두 같은 분이 아니라 다른 분들입니다. 북쪽에는 ‘불공성취불’ 동쪽에는 ‘아촉불’ 서쪽에는 ‘아미타불’ 남쪽에는 ‘보생불’이 있습니다. 중간에는 비로자나불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비어있습니다. 원래부터 비었는지 아니면 없어졌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라의 여타 자료와 비교해 보면 이런 배치는 다른 유물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을 공간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으로 여기에 법신불이 계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조양북탑을 조성한 온규 스님은 공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탑 안에서 발견된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중국어와 범어(중국어로 음사)로 각 한 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또한 공사상에 중점을 두어 조성된 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탑 속에 탑을 그려 넣는 형식은 한국에서도 요나라 이전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리, 무구정광다라니경들이 나옵니다. 이 전통이 요나라로 가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발해 스님에 의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요나라의 불교와 문화가 일본과 한국에 영향을 준 예도 있습니다. 조양북탑 12층 사리공 안에는 밀교 의식단을 사용하고 있는데 북쪽에는 만다라가 있습니다. 사리공 안에 만다라를 새기는 일은 극히 드문 일로 밀교 의례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일본 진원종의 밀교의례법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한국 다완의 해무리굽도 요나라를 다녀온 스님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요나라는 여진족과 송나라가 손을 잡고 공격하면서 서쪽으로 옮겨가 서요를 만들게 됩니다. 〈고려사〉에도 거란족이 고려로 투항한 뒤 귀화했다는 기록이 있고 개성에는 거란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라는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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