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止’와‘觀’의 공상조성은 수행신심 초석
‘止’와‘觀’의 공상조성은 수행신심 초석
  • 최범술 스님
  • 승인 2014.08.08 2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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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4보개 회향

관을 닦아 선근을 일으켜

악에 애착하는 버릇 버리고

좋은 일하면 힘차게 나가야

이치에 순합하는 지와 관

한 쌍의 수레바퀴 이루어

한가지로 수행해 나가자

다섯째는 지관문(止觀門)이다. 앞에서 지(止)와 관(觀)을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먼저 이 지를 닦아 나가는 방법으로 기시론(起信論) 같은 데서는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고요한 곳에 한가롭게 있어야 된다. 둘째는 지계(持戒)가 청정해야 되다. 셋째는 의식이 구족해야 된다. 입을 것, 먹을 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런데 정신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어 그칠래야 그쳐지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좋은 스승님, 선지식(善知識)을 얻어야 한다.

다섯째는 모든 속무(俗務)를 쉬이 버려야 된다. 인연 되는 사무, 그러니까 모든 신상 사무를 걷어치워야 고요해 질 수가 있다. 일가·친척·아내·부모·자식, 이런 것이 번거롭게 따르다 보면 고요하기 다 틀렸다. 그러므로 신상은 아주 단순해져야 한다.

그런데 이 지(止)에서 특히 주의를 환기할 것은 요즘 선(禪)을 한다. 즉 지문(止門)을 닦는다는 이가 많은데 여기엔 반성할 점이 많다. 인간 생활의 형식을 외면하든가, 일부러 이를 외면하는 것 같은 이즈러진 태도를 보이려고 한다. 그들은 청정을 닦고 출가한 사람으로서 불제자의 수행을 하는 데만 주안을 두었으며 그것도 지에, 선정(禪定)에만 한정해 버렸다. 오로지 성정만을 한다. 고요한 지경만 닦고 있으면 자연히 그 정적(靜寂)한 곳에서 그만 마음이 침잠해져 맥이 풀리고 가라앉는 병이 든다. 명산의 공기 좋은 아름다운 풍경이 자지러져 모든 것을 다 망각하고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데 이것을 벽하병(碧霞病)이라고 한다. 혼자 드높은 유현한 철학이라도 더듬는 양 자처하는 것이지만 실상인즉 망상을 달리거나 부질없는 몽상을 일삼는 멍청한 부류다. 그밖에도 아주 게을러 빠져서 남이 농사지은 것, 옷 해 주는 것, 다 갖다 쓰고 도사리고 앉아서 손끝 하나 까딱 하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은 시간을 아껴 일하지 않고, 놀고먹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거나, 뭇 선(善)을 달갑잖게 여긴다. 이것은, 그러니까 에고이즘이다. 입으로만 중생을 뇌까리고, 뭣을 위한다 하지만 실천 궁행과는 거리가 멀고 보니 이건 아주 개인주의, 그것도 다분히 이기주의적인 자신에게 꽉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대자 대비와는 멀리 동떨어진 자리에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병통을 부수고 깨트리기 위해 우리는 또 관(觀)을 닦는다.

관, 이를테면 위빠사나를 닦아야 하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세간(世間)의 선이란 것은 제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법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오래가면 폐단을 일으킨다. 법구생폐(法久生幣)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란 순간순간으로 자꾸 변천되어 나간다. 천변만화하는 그 양상을 부단히 깊이 관찰하고 분석 비판하고, 판단하고, 그러므로서 사물을 심각하게 이해한다. 이 관, 위빠사나를 하는 방법으로 네 가지가 있다. 법상관(法相觀)·대비관(大悲觀)·서원관(誓願觀)·정진관(精進觀)이 그것이다.

위에서 지(Samasatta)와 관(Bipasana)을 말하였는데 이 두 가지는 한데 합해져야 한다. 따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순(隨順)이 따라야 되며 그러면 서로 순종하고 떠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지관문(止觀門)이라고 하는 것이며, 행동에서 머무는 데나 멎거나 일어나거나 간에 항결같이 지관(止觀)이 수행하여 움직여져야 된다. 비록 모든 진리라는 것이 그 자체에는 그러한 상(相)이 없다손 치더라도 마음의 생각에 응하여 일어난 인연(因緣)의 집합(集合)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악(善惡)을 깨치게 되고 선악에 따라 고락(苦樂)도 깨닫게 된다. 고락뿐만 아니라 우리는 괴로운 일을 당하더라도 그 속에서 역시 커다란 즐거움을 향유할 수도 있다. 그런 과보(果報)를 우리는 실지로 받고 있다. 과보라는 것은 그 자체에 그런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구해질 수 없지만 인연을 따라 선악의 업보가 일어나는 것임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선이라고 한마디로 말하지만 어디까지가 선이며 어디서부터 악인 것일까? 고락이란 또한 어떤 것을 일컬음인지, 그 자체는 도무지 얻어 볼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다시금 깊이 알게 된다. 세간(世間)에 너무 애착하는 어리석은 범부들로 하여금 치(癡)를 다스리기 위해 지의 문을 닦도록 한다.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이승(二乘)과 소승(小乘)들을 위해, 그들이 나 하나면 그만이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비겁한 생각을 버리도록 지의 문을 닦게 한다. 그리고 관(觀)을 닦으면 이승들의 대자 대비를 일으킬 줄 모르는 용렬하고 막혀 버린 마음의 과실·허물·착오를 물리쳐 발심(發心)하게 된다. 또 보통 우리 범부들은 관을 닦아 선근(善根)을 일으켜 좋은 일을 힘차게 해 나가게 되고 악(惡)에 애착하는 나쁜 버릇을 여의게 한다. 그리하여 이를 순리고행(順理苦行)의 지관(止觀)이라고 한다. 이치에 순합하는 지와 관을 한가지로 수행해 나간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를 물리치기 위하여 지관을 한가지로 닦는다. 지와 관이 한데 합치어 한 쌍의 수레바퀴를 이루어 함께 움직여 나가야 되는 것이다. 이렇듯 둘 다 구비하지 않으면 우리는 보리(菩提)의 불토(佛土)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는 이치에 순합하여 편파함이 없이 반드시 이 두개는 다 갖추어져 병행해야 되고 둘째는 이장(二障)의 하나, 번뇌장(煩惱障)을,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욕망에 끄달려 얽매어서 큰 탈을 내는 것을, 또는 소지장(所知障)이라는 아는 지식의 그릇된 작용을 다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지관을 닦아 이로써 그 폐단을 없애야 된다. 이 둘은 서로 돕고 받들므로서 이루어진다. 즉 공상조성(共相助成)이다. 지와 관은 둘 다 합친 행동이라야 새의 두 날개로 공중을 날고, 수레의 두 바퀴로 굴러간다. 바퀴 하나가 없으면 그 수레에 어떠한 물건도 일을 수 없다. 이렇듯이 수행신심(修行信心)이란 어려운 것이다. 이상으로 회향(廻向)은 대강 다 애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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