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a in Comic & Ani - ⑭ 최규석의 ‘송곳’

내가 살기위해 타인의 희생이
강요되는 현대 사회상 비판해

“나만 아니면 돼” 비겁의 共業
우리 사는 세상은 병들어 간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의 사자성어다. 〈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왜 일까. 만화가 최규석의 작품 〈송곳〉을 보며 연상되는 사자성어가 ‘낭중지추’였다. 뛰어난 재주를 지난 사람이 아닌 사회라는 주머니에서 툭 삐져나온 ‘송곳’이 생각나서다.

단편집 〈아기공룡 둘리의 슬픈 오마쥬〉, 경향신문 연재물인 〈습지생태보고서〉, 자신의 가족사를 보여준 〈대한민국 원주민〉까지 사회의 부조리를 특유의 위트로 주제 있게 풀어낸 최규석의 신작인 〈송곳〉은 포털 사이트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 중이다. 출판만화가 아닌 웹툰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탄탄한 작화 실력과 무게 있는 주제 의식은 여전히 명불허전이다.

▲ 만화가 최규석의 첫 웹툰 〈송곳〉의 한 장면들. 노동 문제를 통해 대표적 대한민국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아니오’라고 말할 용기
〈송곳〉은 대형 마트 이수인 과장이 자칭 ‘이 동네 똥’이라고 불리우는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을 만나 노동조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주요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이수인 과장은 성품이 대쪽같아 쉬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송곳’이다.

학창시절에는 폭력을 행사하는 돈 많고 뒷배 있는 일진에게 옳은 소리를 한 유일한 학생이었고,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에는 3성 장군이 보는 앞에서 선거 개입에 대한 비판을 해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10년의 군생활을 하며 송곳의 끝은 무뎌지고 전역 후 대형마트에서 근무하면서 불합리에 익숙해진다.

주인공은 대형마트 과장까지 진급하고 별 다른바 없던 일상을 지내오던 중 외국인 지점장에게 함께 일하던 아채 청과 판매직원들을 모두 퇴직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고민하던 이수인 과장은 명령을 거부하게 되고 지점장은 그를 회사의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단 한번의 ‘아니오’가 그를 조직의 룰을 어기는 걸림돌로 전락시킨 것이다. 여기서부터 걸림돌의 투쟁은 시작된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근로 원칙을 이야기하고 부당한 사측의 요구에 사사건건 문제를 삼는다.

1초 개그와 스크롤 액션이 주류인 웹툰 시장에서 〈송곳〉의 이야기는 매우 불편하다. 그렇지만 알아야 할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수인 과장의 주변인들은 모두 우리들이다. 조직과 자본이 주는 얼마의 녹봉을 위해 부조리에 순응해야 하는 보통의 서민들이다. ‘아니오’보다는 ‘네’를 말해야 하는 백성들이다.

철을 때리면 그 성질이 변하듯이 규제를 계속적으로 받다보면 익숙해지고 편해진다. 기실 우리들은 불편한 진실은 멀리하고 부조리가 가져다주는 안락함에서 안심을 얻는다. 그래서 만화가 아닌 실상에서 이수인 과장 같은 인물을 조직 화합을 저해하는 걸림돌정도로 생각한다.

부조리에 눈을 감는 당신에게
흔히들 사회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조직에 적응하기 위한 유연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같은 유연성은 사회와 조직의 부조리에 눈 감을 수 있는 용기를 포함한다. 눈을 감아야 하는 이유는 명증하다. 내가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서다. 타인의 희생이 예상되지만 나는 희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비정규직 문제가 그렇다. 건설 부문 대기업 노동자 중 71%가, 은행권에서는 80%가 비정규직 노동자다. 이들의 정규직 전환은 하늘의 별따기다. IMF이후 ‘노동 유연화’를 외치며 진행해온 ‘비정규직’이라는 폭주 기관차는 이제 위험한 수준에 와 있지만 정작 정부는 기업 눈치를 보며 눈을 감고 있다.

부조리에 길들여진 사회가 무서운 이유는 대학 강사인 오찬호가 지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에서 다양한 사례로 잘 나타난다. 한 대학 강사가 학생들에게 “지방대에 대한 취업 차별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고 묻자 즉답한 대학생의 답변이 이렇다.

“지방대는 저희 학교보다 대학서열이 낮아도 한참 낮은 곳인데, 제가 그쪽 학교의 학생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을 받는 건 말이 안 되죠.”

현재 20대는 자기 극복만을 이야기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대신 ‘스펙 구분’이라는 새로운 차별 양상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학내 카스트’현상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부조리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는 사회가 현재 20대들을 ‘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괴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차별’이 무서운 이유는 〈송곳〉에서 최규석이 이야기하듯 약하다는 사실 자체가 강자들에게 혐오감을 자극하고 혐오 대상에게는 사람은 진심으로 잔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부조리에 순응한 우리의 공업이다. 

학덕이 높은 고승들의 좋은 말씀이나 행동들을 모은 〈선림보훈(禪林寶訓)〉에는 이 같은 구절이 있다.
“일상 속에서 옳은 것은 힘써 실천하고 옳지 못한 것은 반드시 그만두어야 한다. 일의 쉽고 어려움에 따라 신념을 바꾸어서는 안된다. 당장 어렵다고 돌아보지 않으면 뒷날 지금보다 더 어려울지 어떻게 알겠는가.”

지금의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부조리함을 인정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답할 용기가 있는가. 〈송곳〉은 이 같은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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