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아카데미·시민행성 조성택 교수(고려대)

▲ 조성택 교수는 … 1957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U.C 버클리에서 인도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9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 비교종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2002년 3월부터 현재까지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계간 〈불교평론〉,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인문학 단장,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철학회 편집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 불이상(학술 부문), 2011년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을 수상했다.
경전은 부처님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집단적 창작물입니다. 그래서 경전만이 부처님 말씀이라 할 수 없습니다. 쓰여진 것만 가지고 불교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교를 제한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 경전 내에 있는 것들을 재해석하고 도출해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전통사회는 한 사회 한 종교를 원칙으로 합니다. 종교를 바탕으로 인간, 사회, 우주가 이해 될 수 있고 또 생노병사, 관혼상제 등 생애에 걸친 삶의 규범도 이에 맞추어 형성이 되죠.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와 다릅니다. 종교는 다원주의이며 과학과 종교는 갈등을 빚습니다. 지금은 과학과 종교가 갈등이 멈춘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종교가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현대 학문은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생물학적인 인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바라보는 이타적인 인간, 배려하는 인간은 사라지고 있으니 종교는 기복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생노병사 관혼상제 생애에 걸친 삶의 규범이 종교였습니다. 서양에서 기독교 동양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삶의 규범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이해를 종교로 풀어낼 수는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종교는 개인의 영역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종교를 개인 한명의 믿음으로 치부해버린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하나의 가치관의 문제라 한다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직업이 전문화 될수록 종교와 삶은 연속성을 잃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증권회사에 일하는 불자가 불교적 가치관을 갖고 업무를 보는 것은 어려울 거라 생각 합니다. 불교는 오늘날 직업의 전문성과 종교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조화될 수는 없는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또한 전통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전 분야에 걸친 가치척도가 종교였습니다. 또 이 시대에는 신부, 목사, 스님은 사회적 엘리트였습니다. 특히, 불교의 경우 외국의 문물을 경험할 수 있는 위치의 신분은 스님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전통사회에서 스님들은 새로운 문명을 전달해주는 전달자적 위치에 있었고 사회의 엘리트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근현대사회 들어 재가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불교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되고 외적인 문제에서 교리해석의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불교는 진리이해의 한 설명 모델임을 인식해야합니다. 불교의 연기법, 무아는 진리에 대한 설명 체계입니다. 불교가 ‘진리’라 생각한다면 소통과 이해의 단절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역사적 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무아가 진리라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서양 철학은 폐기 처분 해야 할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접근했을 때 불교 자체도 역사적 산물이라는 겁니다. 초기불교부터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를 탈역사적으로 후대 사람들이 이해하려 하고 있을 뿐입니다.

불교교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불교는 만병통치이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만학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지과학 혹은 인지심리학에서 나오는 내용을 이미 불교에서 다 얘기한 것이라고 말하는 불자들이 있는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지과학을 통해 불교의 내용이 좀더 확실해지는 것일 뿐이지 불교 안에 그 모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체계성, 논리성, 전문성 등을 갖춘 근대학문 즉 사회학, 심리학, 철학, 자연과학 등을 바탕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열린 태도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좋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 말씀은 옳은 가르침이라는 열린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대승불교가 시작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욕망이라는 전체를 부정해버립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특히 프로이드에서는 욕망은 다양한 층위가 있습니다. 필요, 욕구, 욕망은 심리적 상황인데 식욕 수면욕은 생물학적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필요와 욕구는 대상이 충족이 되고 나면 그 마음이 감해지지만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에 의해서 충족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욕망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욕망의 문제는 대상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근원적인 부분입니다. 불교는 정당한 자기실현의 욕구가 분명히 긍정적으로 이해되도록 유도해 주어야만 21세기 한국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불교의 전문성 부족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종단은 불교 전통에는 없는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 종단은 근대법에 의해 인정받은 법적 위치입니다. 종단은 초세간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 사회의 ‘세간적 정치체계’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故김수환 추기경의 예만 봐도 카톨릭 수장이 외부에 노출이 될 때 어떤 말을 해야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해주는 브레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렇지 못한 거 같습니다.

출가 우의의 한계와 출가집단의 폐쇄성도 문제입니다. 신부는 자신들이 세속에 몸 담고 있는 것을 지극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님들은 세속에 몸 담고 있으면서 초세간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비상식적인 것이 선이 아닙니다. 선불교에 있어 일탈성의 문제 이런 문제들은 조금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되어야지 그 자체로 깨달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는 전기(傳記,Biography)와 성인전(聖人傳, Hagiography)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전기는 사실적 내용이며 역사적 배경 즉 사실과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가 하면 성인전은 신화적, 종교적 전승에 바탕을 둔 메시지를 중심으로 합니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무시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종교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동아시아 선사상의 긍정적인 측면은 도(道)의 일상성과 일상의 진리(道)화입니다. 일상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 일상을 떠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평상심과 일상심을 도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며 성과 속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선종은 앞선 그룹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불교 미술이 탄생했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데 이를 폭력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절실함을 알기 위해서 스승을 찾아갔는데 제자한테 설거지를 시키다든지 차나 한잔 먹고 가라든지 하는 행위는 가르침의 일부라고 하지만 일종의 폭력이라 봅니다. 실제로 무협지 구조를 보면 육조단경 구조랑 똑같습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술을 배우러 스승을 찾아가면 무술은 안 가르쳐주고 물만 길어 오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해주는 게 없는데 가르침은 이루어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어느날 스승은 제자에게 무술을 가르쳐 줍니다. 선종에서도 보면 오조 홍인이 제자 혜능한테 의발을 전하고 도망가는 이야기 등은 설정 자체가 비종교적이며 무협지적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은 지적인 것을 치면서도 굉장히 엘리트적이라 이중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대부분 경건함과 성실함을 종교라고 규정짓는다면 이를 한 방에 무너트리는 것이 선입니다.

불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 부재를 볼까요? 경전에는 모든 시간을 일시, 한때라는 말로 표현을 해놓았습니다. 시간 자체를 설정하지 않는 반면 장소는 굉장히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있죠. 중국인들은 몇월 몇일 몇시 등을 뚜렷이 기록하는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죠. 이는 윤회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이런 경전의 기록들에서는 부처님의 인격적 성장의 변화를 살펴볼 수가 없습니다. 40대의 설법인지 70대의 설법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죠.

불교를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할 때 가장 편한 방식이 사상적 특징을 잡는 것입니다. 오온은 불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 특징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온(五蘊)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분석이 아닌 ‘해체’적 사유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햄버거라고 하면 햄버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빵 야채 고기 이런 구성요소들이 햄버거를 만들고 있습니다.

‘경험’의 해체, 그리고 경험이 곧 ‘존재’임을 자각한 것이 무아입니다. 존재(주체)가 경험을 한다고 하는 일반적, 상식적 이해를 타파한 것입니다. 색은 감각, 기능·작용(seeing, hearing…)을 가리키는 것으로 물질, 혹은 감각 기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수는 지각작용(sensation)으로 ‘느낌’(feeling)의 잘못된 번역이라 했는데 느낌은 식에 해당합니다.

상은 관념작용(perception), 지각된 사물을 ‘받아들이는’(to conceive, conception) 방식입니다. 행은 마음의 작용(mental formation)으로 가장 핵심적 요소가 수행(修行)입니다. 식은 판단 혹은 종합적 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적 산물로 주체적 ‘인식’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근(根, 감각기관)과 경(境, 감각대상)을 합친 것이 연기적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경험으로 무아(無我)의 두 차원을 살펴볼 수 있는데 유신견(有身見)에 대한 정견(正見)으로서 무아(無我)가 팔정도의 시작입니다. 이는 아만(我慢)을 제거한 해탈의 경험으로서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완성이고 정정(正定, 바른 삼매)으로부터 경험하는 바른 지혜(正智慧, 구정도)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의 네가지 양상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 (衆生相), 수자상 (壽者相)이라고 합니다.

존재와 경험을 존재(有)의 두 가지 차원으로 살펴보면 각각 ‘thinker’(존재)와 ‘thinking’(경험)의 이원론으로 나뉠 수 있으며 오온설에서는 ‘thinking’이 곧 ‘think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有業報而無作者(업보는 있지만 지은 자는 없다) [잡아함경 〈파구나경〉T99, 92c]

이는 “행위만 있을 뿐 행위자는 없으며, 경험은 있되 경험을 하는 자는 없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걷는 것이 아니고 걷는 것이 나다. 내가 춤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것이 나다.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나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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