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소견을 자기가 지어서 생각하는 그런분별은 버려야

▲ 그림 최주현

몸 떨어지기 전에 이 마음도리를 알아야 될텐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분별에서 헤어나지 못하신다면
영원히 위로는 묵은 빚도 갚지 못하고 아래로도 주지 못하게 되고
세세생생에 항상 고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인공과 계합하기 위한 실천행은
문)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달아 주인공에 계합이 되려면 어떤 실천행을 해야 되겠습니까.

답) 우리가 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열심히, 어떠한 것도 보지 말고 어떠한 분별을 가져서도 아니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분별을 하면은 통달을 못한다.” 하셨습니다. 벌레 속에 들어가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또 돼지 속에 들어가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삼독이나 역시 일체 번뇌 망상, 이 속에서도 걸림이 없고 분별이 없어야 합니다. 누가 죽인다 하더라도 분별이 나오지 않고, 부처님 한자리에 앉았다 하더라도 쾌활하게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사로이 그냥 이론으로는 알지만 진실히 행동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말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이리 꿰어 맞추고 저리 꿰어 맞춰도 다 아는 것이 바로 이 부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말씀을 가지고 따르려고 하지 말고 그 말씀을 거름 삼아서 행동으로써 실천궁행하는 데 목적을 둬야 하는 거라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심안으로 천지를 다 본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했습니다. “우주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듣는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다섯 가지 오신통, 다 보고 듣고, 가고 옴이 없이 행하고, 남의 속을 알고, 남이 어디서 온 거를 알고. 이것을 타심통이니 숙명통이니 또 천이통이니 신족통이니 천안통이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께서 다섯 가지를 다 알면서도 도가 아니라고 그랬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은 물이 여기 분명코 있는 것을 아시고 봤습니다. 전에도 그렇게 말했듯이, 이것을 내가 목마를 때에 아무 끄달림이 없이 마실 수 있고 줄 수 있어야만이 이것이 실천궁행입니다. 여러분은 그 뜻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보기만 해도 도가 아니니라. 구름을 타고 오고 가고 빛보다 더 빨리 왔다 갔다 한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그랬습니다. 심안으로 전체를 다 봐도 도가 아니고 말입니다. 어디서 온 거를 알고 남의 속을 뻔히 알고 이래도 도가 아니니라 했습니다. 왜 도가 아니라고 했는가.

내가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걸 보고도 맘대로 못하고 보고만 있으면은 소용이 없거든요. 갖다 먹을 줄 모르는데 어떻게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가 아니지. 줄 줄 모르는데 어떻게 도가 됩니까. 가고 온다 하더라도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자유자재하게 행할 줄 알아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그 법을 무심법행으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 가지를 봤다고 해서 그게 다라고 멈춰서는 안 된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그 오신통을 다 들어서, 마음으로부터 누진을 통해서 다 들 수 있다면, 바로 오신통에서도 벗어나야 그걸 들 수 있는 것입니다. 들었다면 굴릴 수 있어야 하고 굴릴 수 있다면 바로 실천궁행이 되는 겁니다. 또 그것을 굴린다고 해서 안이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니고 중간도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께서 모두 아니 된 게 없고 나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 없고 평발 하나로써 모두 디뎠느니라 하는 것을 표현해서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고, 모두 여러분을 내가 현재 이렇게 나와서, 거기 여러 모로 말은 붙지 않았습니다마는 내 생각에 그렇다는 얘깁니다. 이 세상을 다, 여러분을 다 건졌느니라 하는 뜻에서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던 거고, 나오셔서 휘휘 둘러본 것은 여러분, 이 세상에는 고정됨이 없고 공했어요. 그러니 부처님 자리가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가 항상 같이 있느니라. 평등하니라 하고 둘러보신 겁니다. 일곱 발자국을 디딘 것은 그 평등한 실천궁행이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말입니다, 여러분을 다 빼놓고 뭐가 부처님 법이 있겠습니까?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돼서 인간으로 이렇게 나와서 여러분은 좋고 나쁘고, 더럽고 깨끗하고, 평등한 진리도 알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99%가 부처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오시기 전에도 진리는 있었지만, 우리가 먹어 보지 않고 해 보지 않고 보지 못한 것은 생각도 안 나듯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셔서 참 우리의 스승으로서 여러분한테 설하신 그 뜻이 헛되지 않게, 여러분이 뜻을 가지고 행하시는 그 마음이 진실하다면 바로 불제자의 가치가 있지만, 여러분이 하나하나 분별을 하고 벌레 속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벌레의 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 마음으로 분별하지 말고 침착하게 놓고, 모르는 사람을 본다면 내가 과거에 모르는 그 모습으로 보시고 아는 사람을 본다면, 아주 차원이 높은 사람을 본다면 바로 배우기도 하고 바로 내 마음속에, 주인공안에 다 같이 하고 있으니까 내가 그 뜻으로써 바로 알 것이다 하는 생각. 그 주인공에 놓는 감사함.

‘높은 거를 봐도 높게 보지 말고’ 하는 것은, 저 부처님도 내 형상이요 부처님 마음도 내 마음이요, 부처님 생명도 내 생명이니 항상 위로는 모시고 있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리드해 나가니까, 여러분이 살림살이하는 데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 자식을 기르는 거와 같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뜻이.
그러니 모든 분별을 놓아야 합니다. 물론 가정에서도 속상한 일이 있더라도 내가 그 상대의 행동을 보고서 생각하는 거는 누구든지 각자 자기 소견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거, 남편이 나갔다 들어와도 ‘아이, 저이가 뭘 하고 들어왔지?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거 같아.’ 이런 것이 바로 자기 소견이지 남편의 마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남의 소견을 자기가 지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분별은 벗어버려야 되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깐 뒤집어쓰기도 하고 뒤집어씌우기도 하는 이러한 분별은 버려야 하고, 아무리 죽인다 하는 걸 안다 하더라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나를 천번 만번 죽인다 한들 내 마음이야 죽일 수 있겠는가. 천번 만번 노예를 쓴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움죽거릴 수 없느니라.”

여러분의 그 마음이, 체가 없는 마음이, 지붕도 없고 벽도 없고 천지를 탐험해도 손색이 없는 여러분의 마음이 갖춰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북하면 부처님께서 “이 도리를 알면 삼십이상이 구족하고 삼십이응신으로서 천백억화신으로 나투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그 뜻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분별로 인해서 과거로부터 현실로 나오는 이 뭉치 덩어리가 얽히고설켜서, 아주 벽을 두껍게 싸서 그걸 벗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두가 여러분의 슬기로운 마음에 달린 거예요. 내가 마음을, 참나를 깨치지 못하고는 이 도리를 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몸 떨어지기 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분별에서 헤어나지 못하신다면, 영원히 위로 묵은 빚도 갚지 못하고 아래로도 주지 못하는 이러한 분이 된다면 세세생생에 항상 이런 고에서 헤어나질 못할 겁니다. 승진이 됐다 좌천이 되고, 인간도 천차만별로 차원이 다릅니다. 부자도 바라지 말고, 가난도 바라지 말고 잘난 것도 바라지 말고, 못난 것도 바라지 말고 오로지 ‘바로 내 주인공만이 모든 것 다 해결할 수 있다.’ ‘내 주인공만이 감사하구나, 나도 형성시켰으니까.’ 이것 두 가지만 알면 습도 다 뗄 수 있고, 일체를 다 버린다면은 일체를 얻을 수가 있고, 일체를 얻었다 하면 일체 항복 받을 수가 있어요. 그래야만이 둘이 아니게 나툼을 알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오게 되고, 그러면 여러분은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써 영험을 보기도 하는데
문) 정성으로 기도하여 영험을 보신 분들도 많은데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요.

답) 그것은 소소한 위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자기가 자유자재할 수는 없는 겁니다. 묶여 있으니깐. 그래서 창살 없는 창살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옴쭉 못하는 거죠. 이 ‘주여! 아버지시여! 이거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는 거는 하나의 자기의 부다. 그러면 안에 있는 거지 바깥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 집에 전화통부터 놔 놓아야 남의 집에도 전화하고 남의 집에서 내 집으로 전화도 오지 않습니까. 근데 내 집에 전화는 안 해 놓고 남의 집에 전화 해 놓은 데다가 비는 거죠. 아이고, 관세음보살! 주여! 무슨 어쩌고 하고. 안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니깐 개선해야 할 것은 기독교든 가톨릭교든 불교든 다 개선해야 돼요.

이게 전체 삼라만상 우주 천지가 다 가설이 돼 있는 겁니다. 인간의 근본과 천지의 근본, 이 월세계의 근본 또 태양의 근본, 전 혹성이 많지 않습니까. 은하계도 많잖아요. 그 은하계의 별성들도 전부 가설이 돼 있는 거예요, 이 인간의 근본에.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과학이 물질로서의 연구를 자꾸 하잖아요. 요만하게 사람같이 똑같이 만들어서 그 입력을 해 가지고 컴퓨터나 망원경이나 탐지기나 다, 거기 그 시스템을 다 연구를 해 가지고 잠수함을 깨뜨리는 그러한 연구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각 나라에서. 그러면 지금 그러한 연구보다도 이 사람에 가설된 한생각이, 수소폭탄이나 핵폭탄도 전부 죽이는 것만, 모두 태워 죽이는 것만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좌우할 수 있단 얘깁니다. 그렇게 위대합니다. 인간은 이 우주의 주인, 주인이란 얘기예요.

인간은 지구 안에서 살지만 지구의 주인이요, 지구는 집과 같은 겁니다. 또 이 몸속에 들어 있는 생명들은 의식들이 인과로 인해서 악업 선업이 모여 있는데 내 한생각에 의해서 악업 선업이 무너지는 거죠. 팔자 운명도 없어요. 너무 엄청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엄청난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자기가 믿지 않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도 그때에 자기를 깨달아서 너부터 알아야 모든 우주 전체를 감응할 수 있고 직결된 거를 알 수 있다, 이랬는데도 그걸 믿지 않아 줬기 때문에 그 소크라테스가 고만 그 미개하게 그런 사람들한테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도 늠름하게 이 우주의 모든 섭류를, 천문학도 한계가 있는 거고 그러니깐 천안통, 마음의 눈으로 전체 탐험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또 마음으로서 이게 천체 무전통신 할 수 있다. 일체 만물과도 더불어 같이 상응할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래야 뭘 하죠.

그렇기 때문에 또 태양계가 팽창되거나 또는 어떠한 그, 예를 들어서 태양이 220V고 우리 지구가 120V라면 지구를 집어먹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집어먹을 수도 있으니깐 그거를 조절해서 할 수 있는 거는 모두 이 마음에서 조절할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이게 지수화풍이거든요. 이 몸뚱이, 물질이 모두 다 말입니다. 수소폭탄도 지수화풍 아니면 못 만들어요. 이 컵도 지수화풍 아니면 못 만들고. 이거 하나 흙과 물을 한데 배합해 가지고 말렸지 않습니까, 바람에. 그래 가지고 불에 구웠죠? 그랬으니 어떻게 지수화풍 없이 이게 생산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 출현한 거죠, 컵으로. 그러니깐 모든 게 이 내 주처에서부터 그렇게 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그냥 어리석게 바깥으로 ‘아이고, 주여! 뭐가 우리를 나게 했느냐. 뭐 누가 먼저 만들고 태초가 어딨느냐?’ 해야 되겠습니까. 난 내가 난 게 태초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나부터 알아야 모두 알 테니깐. 내가 났으니깐 세상을 알았고 세상이 벌어진 걸 알지 않았습니까, 각자. 또 죽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죽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가을이 돼서 이파리가 떨어졌다고 그래서 나무뿌리가 죽는 게 아니잖아요.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돌아 나와서 그 봄이 오면은 다시 잎이 피고 꽃이 피듯이 인간도 그렇게 돌아 나와요. 그래서 인간은 이 도리를 모르면 50%가 미완성이라는 얘깁니다.

나이에 걸맞는 덕성을 갖추고 싶습니다
문) 나이가 들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세월이 갈수록 분별심만 더 커져서 싫어지는 사람도 갈수록 더 많아집니다. 이제 불혹의 나이가 지났는데 제 나이에 걸맞는 덕성을 갖추고 싶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우리가 산꼭대기, 제일 높은 데를 올라가는데 무엇을 짊어지고 자꾸 갈 바가 뭐 있습니까? 자꾸 놓고 가야지. 사람 하나 몸뚱이 하나 올라가는 것도 무거운데 어떻게 자꾸 생기는 대로 짊어지고 가겠습니까? 그러니 올라갈 때는 다 놓고 올라가야지요. 조금만 뭐가 보이는 게 있고 들리는 게 있고 이러면은, 또 나쁜 게 보이고 좋은 게 보이고, 미운 게 보이고 예쁜 게 보이고, 이걸 일일이 욕심내고 그 아집을 가지고 나라는 조건에서 영 한 발짝도 떼 놓지 못한다면 거기 자기가 갈 수 있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것도 공해서 놓고 터벅터벅 지금 가는 거 없이 가고 있는데 자꾸 짊어질 게 뭐 있느냐는 얘깁니다. 다 놓고 가다 보면 맨 산상봉 꼭대기 올라가서 둘러보니까 비로소 모두 그 위에서 내려다보이더라 이겁니다. 천체를 볼 때하고 조그만 거 한 개별적인 거 볼 때하고는 전혀 다르게 전체가 보이더라 이겁니다. 천체가 보이는 걸 보니까 ‘아이고,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여기로 인해 일어났고, 여기로 인해 여기서 일어났고 이렇게 되니깐, 이쪽을 누르면 이쪽이 눌러지고 이쪽이 이렇게 자꾸 일어나니까 어떤 거를 손을 댈 게 없더라.’ 이렇게 되죠. 그래서 잘못하고 잘하고 그것이 없더라는 얘기죠.

그리고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보니까, 무의 세계 유의 세계를 보니까, 다 합쳐서 보니까 그렇더라는 얘기죠. 또 동서가 둘이 아니요, 남자 여자가 둘이 아니요, 대승 소승이 둘이 아니요, 어려운 사람 부자 사람 이것이 둘이 아니요, 권세 없는 사람과 권세 있는 사람과 둘이 아니요. 항상 뒤바꿔지더라 이겁니다. 돌아가더라. 그래서 거기서 내려올 때는 다 주워 모아서 담아도 담긴 사이가 없더라. 담긴 사이가 없으니 내려와서는 내놔도 내놓은 사이가 없이 내놔지더라.

그래서 그 마음 가짐가짐이 어느 누구든지 깔보지 말고, 하다못해 사람 아닌 벙어리, 생각이 없든지 있든지, 목석이든 목석이 아니든, 돌이든 꽃나무든, 죽어가는 나무든, 병신이든 병신이 아니든, 똑똑하든 똑똑하지 않든, 누구를 막론해 놓고 웃으면서 대해 줄 수 있는 그 아량, 지혜와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져서 ‘내가 못 배웠을 때 내 모습이요, 내가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올 때 저런 모습을 하고 거쳐 왔지 않나. 바로 나인 것이다.’ 이렇게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을 때 바로 그 모든 것에서 몰락 벗어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여러분이 이 마음도리를 배우는 데 열심히 익히고, 스스로서 자기 거를 만들어서 자기가 응용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과 그러한 지혜와 그러한 자비를 가지고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아빠와 애들 사이가 안 좋아요
문) 저는 애들 둘이 있는데 저의 바깥양반이 주사가 좀 심해서 애들과 사이가 너무 안 좋아요.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답)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셔야 될 겁니다. 이 종교라는 게, 떡을 놓고 밥을 놓고 비는 것이 종교가 아니라, 타의에서 타력 신앙이 종교가 아니라 자력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빈손 들고 나와서, 내가 바로 나왔기 때문에 세상이 벌어졌고 상대가 있고 또 내가, 즉 말하자면 나그네 생활로 살다가 나그네로 다시 빈 몸으로 간단 말입니다. 근데 뭐가 중요하냐. 여러분이 그 빈 몸으로 와서 빈 마음으로 살아라 이겁니다. 착, 욕심, 아집, 아상 또는 너, 나 둘로 보지 않고 살면은 이다음에 갈 때도 빈손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릇이 비었기 때문에 항상 담을 수가 있는 거죠. 그릇이 비었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의 그 우주천하도, 사생의 모래알같이 수효가 헤아릴 수가 없는, 무량수의 공덕을 그 그릇에 다 담아도 손색이 없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좁지도 않아요. 내 마음의 집에다가 말입니다, 담은 사이도 없고. 이 세상의 모두를, 일체 만물만생을 다 이 집에 담아도 좁지도 않아요. 그리고 넓지도 않고요. 다 내놔도 또 그것이 줄지도 않고 항상 풍족하죠.

그래서 마음으로서의 그 자비와 그 성스러운 지혜가 있어야 되겠죠. 나라는 조건을 세워서 항상 여러분 가정에 나라는 게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겁니다. 나라는 게 없다면, 간단하게 말해서 내가 이 세상에 난 탓이죠, 뭐. 내가 짊어지고 나온 내 탓이란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내 주인공에 모든 것을, 저렇게 식구가 마음이 풍족하지 못한 것도 바로 우리가 차원이 똑같으니까. 금은 금방에 가고 넝마는 넝마대로 모이듯이, 우리 식구가 똑같이 차원이 그렇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나. 그러니 내가 그저 ‘주인공, 당신밖에 우리 가정 화목하게 만들 수 없어요. 당신밖에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없어요. 당신밖에 우리 우환을 없게 할 수 없어요. 당신밖에 병고를 없앨 수 없어요.’ ‘모든 거를 낫게 해 주시오.’가 아니라 ‘당신밖에 할 수 없어요. 당신밖에 낫게 할 수 없어요.’ 이겁니다.

주인공 찾는 것도 아주 둘로 찾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이 “나는 주인공을 그렇게 찾았는데도 안됩니다.” 이런 소리 하시죠? 그건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벌써 한 다리 건너가니까. 벌써 그것도 미신 짓이에요. 주인공이라고 이름만 해 놨지, ‘주인공, 낫게 해 주시오.’ 이러면 벌써 아니 기복하고 뭣이 다릅니까?
주인공밖에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없고, 또 재차 말합니다. ‘주인공밖에 나의 병고를 낫게 할 수 없고, 주인공밖에 우리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없고, 우리 남편이 회사엘 나가든지 장사를 하든지, 어떠한 사업을 하든지 내 주인공밖에는 해결할 수 없고 잘 이끌어 줄 수 없다.’ 이런 마음을 항상 떠나지 않게 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자기가 자기를 지켜보면서 실험하고 거기서 체험하고, 체험함으로써 믿는 것이 더 단단해지고. 그렇게 되면 그건 뭐 참 불가사의 한 법도 거기에서 다 나오게끔 돼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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