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2항순중생

목숨은 한낱 들숨 날숨에

늘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는 때가

따로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죽을 때 위해 모든 장애를

말끔히 씻어 내리라”

아미타불을 우러러 보고

곧 안태한 극락의 지경에

대목적(大目的)만이 있다.

 

 

‘늘상 보현(普賢)의 광대(廣大)한 수행을 닦아 둥글게 가득찬 무상(無上)의 보리심(菩提心」)으로 끝내는 부처를 이룩하리라’

 

수순은 남의 마음을 맞추어 나간다는 것, 또 앞에서 말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에 순합하는 그것이라고 알았지만 여기서 주의를 환기할 일이 하나있다. 가령 구한말(舊韓末)의 역적배들, 이를테면 이완용 송병준 하는 따위 인물들이 있어 사안(史眼)으로 평한다면 그들은 한 국가의 중신(重臣)으로, 무거운 정치적 책임을 맡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누구의 마음을 맞추어 좋게 했던가? 일본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좋게 해주었다. 아마 일본 사람에게는 거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반역하고 한 없이 슬프게 만들었지만, 그렇다면 이 역적배들은 일본 사람한테는 수순을 했다. 이것이 수순이 되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반역자로 규탄한다. 이를테면 중도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중도의 도리란 커다란 의리, 대의(大義)이기 때문이다. 이 대의에 맞지 않는 일을 그들은 저질렀기 때문이다.

원효대사는 수순을 퍽이나 중대시하여 그 목적은 결국 중도(中道)의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대사회 건설의 원리에 맞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것을 우리는 입명단(立命段)이라고 한다. 최후의 입명, 목숨을 어디에다 바칠 것인가 하는 얘기다. 목숨은 어디에다 바치고, 어디에다 세워져야 하는가?

‘바라건데 항상 내 죽을 때를 위해 모든 장애를 말끔히 씻어 내리라’

임명종시라고 그냥 해 버린다면 그것은 간단하다. 우리의 목숨이 다하여, 늙고, 병들어 자연 생활을 끝마칠 때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목숨이란게 한낱 들숨 날숨에 늘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이 끊어지는 때가 따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70이나 80에 가서 그때야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고 설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장담할 수 없을 바에야 우리는 평소에 이런 각오를 해두어야 한다. 즉 목숨은 늘 왔다 갔다 한다고. 이럴 때 어디에다 바쳐야 한다고. 그 어디에라는 것이 우리는 중도의 도리, 대의(大義)라는 것이라고. 그 때에는 일체의 얽매이고 거리끼는 일들을 말끔히 씻어야 된다. 완전 소탕해 버리고 깨끗해져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는 우리가 대의를 앞에 두고 큰 용단(勇斷)이 있어야겠다. 크게 뼈대가 있고 마디가 억센 것이고 절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충신이 선죽교(善竹橋)에서 피를 흘렸다. 포은(圃隱) 선생은 충절(忠節)을 가지셨다. 계례의 장래에 커다란 포부를 가졌던 분이 그렇게 돌아가셨다. 충무공(忠武公)이 진충보국(盡忠報國)했다. 그의 충성스런 의절(儀節). 그의 죽음. 이를테면 이런 것이 원아임욕명종시(願我臨欲命終時). 언제든지 자기 목숨이 끊어질 때를 각오한다. 그렇게 행동했다. 포은 선생의 최후에서는 그것이 역력히 보인다. 우리도 늘 일상생활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누가 날 받아놓고 죽는 사람은 없다. 법화경(法華經)에 이르듯 우리는 상재영축산(常在靈鷲山)이다. 전쟁하는 사람처럼 항시 전투가 벌어지는 싸움터에 있다. 이 생각을, 대의를 한시도 떠나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의무가 무엇이냐? 의무감, 사명감(使命感)에 눈 떠 있어야 한다. 이런 때, 자기를 붙들어 매는 온갖 장애물을 용단으로써 탁 끊어 팽개치고 깨끗이 잊어버린다. 일대 결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저기 아미타불을 우러러 보고

곧 안태한 극락의 지경으로 들어간다.

바로 이 대 목적(大目的)밖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흔히 절간에서 보는 일인데 불제자(佛弟子)란 사람들이 수순중생(隨順衆生)한다는 뜻이겠지만 남의 마음 맞추느라고 이상스럽게 속화(俗化)하여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헌챙이 만챙이에다 곤챙이가 되어 무골충 노릇하는 것인데 이런 것은 퍽이나 딱한 형상이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거룩할 리가 없지 않은가? 수순을 잘못 생각하여 중생과 더불어 속화하고, 그들의 부패에 영합하는 것은 장한 일이라 할 수 있을까? 구한말의 역적배들을 아무리 시대가 발달하였다 한들 우리가 어떻게 의사(義士)라고 부를 수 있으며 또 여러 남자를 거쳐 온 바람둥이의 창녀(娼女)들,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선들 정절(貞節)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의 대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같은 것이며 설혹 일시적인 사조가 윤리의 도착을 빚어내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설(逆說)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러한 역설이 성행하는 것은 사회와 시대가 병들었다는 것을 얘기할 따름인 것이다. 인간의 역사적인 행동은 반드시 자타의 비판을 받게 되며, 이렇듯 비판의 대상이 되므로서 우리는 이를 사회성(社會性)을 띤다는 말로 일컫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입명단(立命段)에 있다. 입명단은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들의 진실한 행동, 그러니까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 할 수 있다. 일편담심이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것이다. 순전히 하나인 것이고 여기 잡된 것이 섞이어서는 안 된다. 잡년이라든지 또는 잡놈이라든지 하는 잡(雜)이 섞이어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원동력이라야 우리의 공동 목표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달성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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