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에 끄달리면 절대로 苦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그림 최주현

마음 한 번 잘못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남을 이익하게 하는 일은 하시고,
악한 마음이 나올 때는 근본에다 놓고 한번 굴려서
다시 좋은 마음으로 나오게끔
다스리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과 더불어 광명선원 신축 건물 착공식을 한마음으로 한 몸으로 이렇게 같이 행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나서 이렇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 흙을 파내도 흙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물도 말없이 흐르고, 봄이 오면 말없이 잎이 푸르르게 나오고 꽃이 피는가 하면 가을이 되어 저절로 낙엽이 져서 떨어지곤 하지요. 이 무상의 도리를 여러분이 알아야만 이 세상을 살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무상의 도리다’ 한다면 무심의 도리도 알아야 합니다. 무심의 도리, 즉 말하자면 원천의 도리를 인천으로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모든 것이 찰나에 이렇게 돌아간다는 이 점을 여러분이 캐치해야만이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나서 정신세계로 들 수 있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물질과학으로 첨단을 달린다고 하지만 정신세계로 첨단을 이루는 과학이 돼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과학이니만큼 의학이나 모든 분야가 정신과학으로 첨단을 이룰 수 있어야만 되죠. 그러려면 우리 조그마한 인간의 씨가 우주를 싸고도 남음이 있고 우주를 굴리고도 남음이 있고 우주를 딛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그렇게 광대무변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승려들이 여러분이 가져오는 쌀이나 물건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머리 깎고 염불이나 하고 중노릇을 하는 게 아닙니다. 머리 깎고 입산할 때는, 사문이 될 때는 이 세상에서 부모 형제 다 버리고 그 마음 하나의 씨 없는 씨를 발견하기 위해서죠. 그럼으로써 등불을 켜서 여러분의 길잡이가 되어 컴컴한 사람을 이끌어 가고 밝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생활이 정신과학이며 의학도 정신의학이고, 일체가 정신으로부터 비롯되기에 한마음에 들지 않고는 첨단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어려운, 자기 몸을 불사하는, 자기를 헌 신처럼 버리는 그러한 사문이 된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놀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니 되지만 여러분의 생각으로만 그냥 생각하지 마시고 잘 지켜봐 주시기 바라면서 같이 한마음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나는 응달에 앉았으면서 여러분은 이렇게 뜨거운 데 앉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여러분한테 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겁니다. 부모로부터 살을 빌리고 뼈를 빌려서 정자 난자와 같이 혼합이 돼서 수많은 헤아릴 수 없는 그 생명들, 모습들이 생깁니다. 거기에서 하나가 남습니다. 이긴 거죠. 그 많은 생명들 중에서 하나가 이겼습니다. 근데 몸은 받았으나 그 영혼이 거기 결부가 돼야만이 삼신을 받아서 임신이 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거를 몰라서 내가 얘기해 드리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거기에 또 묘한 것은요, 자기의 영혼이 거기에 혼합이 되는 동시에 자기가 인과로 받은 업식들이 말입니다, 악업 선업이 다, 자기 영혼이 들어가는 데 같이 포함돼서 들어간다 이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몸 하나 받아서 자라는데 그 내부에, 세포에, 오장 육부에 인과로 인해서 받은 모든 업식들이 한데 합쳐져서 길러집니다. 어린애가 자라면 자라는 대로 같이 자라죠. 그러니까 지금 수많은 생명과 모습과 의식들이 여러분 몸속에서 다 움죽거리고 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해 주어야 비로소 여러분도 또 움죽거리게 되고 생활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생활을 안 해 주면 이 큰 덩어리 하나가 움죽거려지지 않습니다. ‘움죽거리지 않는다면’ 하는 소리는, 우리 생명과 근본이 움죽거리지 않는다면 마음이 나질 않아서 이 지구도 움죽거릴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겠지요.

그러니 우리 이 몸속에 악업 선업이 한데 합쳐 있으면서 여러분을 웃게도 하고 즐겁게도 하고 아주 참 감사하게 하기도 하고, 반면에 남을 죽이기도 하고 죽이게 하기도 하고 싸움을 하게 하기도 하고 밉게 하기도 하고 증오하게 하기도 하고 화도 나게 합니다. 인과로써 거기에서 자꾸자꾸 수많은 의식들이 나옵니다. 선업을 지은 건 선업을 지은 대로 자기 마음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오게 하고, 악업은 또 지은 대로 자기 마음을 통해서 악으로 나오니 그것을 어떻게 여러분이 다 커버하고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쁘다 좋다 하는 마음 자체가 바로 다스리고 갈 수 있는 그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두 개 세 개는 아니지만 다스릴 수 있는 마음, 좋고 나쁜 걸 아는 마음, 이게 바로 인간의 마음이죠. 그리고 이 속에 들어 있는 그 모습들, 그 의식들에서 나오는 마음은 여러분이 다스리는 대로 따라갑니다. 좋고 나쁜 걸 아는 마음에서 생각하는 대로, 즉 인솔해 주면 인솔해 주는 대로 따라가는 그런 의식들입니다. 이런 걸 해서 나쁜지 이런 걸 해서 좋은지도 모르고 따라가죠.

그러니 여러분이 각자 좋고 나쁜 걸 아는 분들이니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좋고 나쁜 걸 아는 그 마음이 다스리면서 좋은 결과가 즐겁게 나오걸랑 감사하게 거기 맡겨 놓고, 또 악으로 인해서 남을 이익 되지 않게 하는 마음이 나오걸랑 침착하게 거기에 놓고 굴려서 ‘아, 이렇게 나쁘게 나오는 것도 거기에서 인과로 인해서 나오는 것이로구나!’ 하고 다시 놓는다면, 좋은 마음을 내서 거기 이익이 되게 놓는다면 유전성도 무너지고 영계성도 무너지고 세균성도 무너지고 모두가, 오간지옥이 다 무너진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생각나는 대로, 그냥 막 솟구쳐 오르면 솟구쳐 오르는 대로 얼굴도 변하고 행과 말도 그냥 악의적으로 쏜살같이 나가게 합니다. 남에게 누가 되게 하고 남에게 듣기 싫게 하고 남이 안되게 마음을 내서 말을 함부로 하고 이런다면 그게 악이지 다른 게 악이 아닙니다. 꼭 사람을 죽여서만 악이 아닙니다. 마음 한 번 잘못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남을 이익하게 하는 일은 하시고, 악한 마음이 나올 때는 거기다 놓고 한번 굴려서 다시 좋은 마음으로 나오게끔 다스리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한마음의 도리로 모든 것을 커버해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한마음이 되어야 공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음이 되지 못한다면, 둘로 보고 증오하고 원망하고 탓하고 말 함부로 하고 부드럽지 않게 행을 한다면 모두 악이 돼서 공덕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남한테 시주를 많이 하고 남한테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생각한다면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자식한테도 ‘한 게 없다’고 하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희는 이렇게 하고 있으니….’ 하고서 착을 갖고 원망을 하고 그런다면 그게 공덕이 되지 않는 겁니다. 한마음으로 되질 않거든요.

부처님께서는 진드기의 발 하나도 발이 아니라고 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메뚜기의 발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저렇게 땅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심어져 있는 것 하나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평발이라고 했던 겁니다. “내 발 아님이 없고 내 도량 아님이 없어서 평발로, 한발로 디뎠느니라.” 그래서 평발이거든요. 벌레, 곤충의 발 하나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생각하면 그분만이 평발이 아니라 일체의 발이 어느 것 하나 빠짐 없이 그대로 여여하고 그대로 부처님 발과 둘이 아닌 까닭에 한발이요 평발이라, 그 평발로 디뎠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행하는 법이 독불장군이 없이 같이 행하기 때문에 사장은 직원으로 인해서 직원은 사장으로 인해서, 회장은 사장으로 인해서 직원들로 인해서 이렇게 같이같이 주고받으며 먹고 사는 조화된 세상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한데 합쳐서 세상이라고 한 것이고 이 우주와 더불어 같이 말할 때는 대천세계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삼천대천세계는 어떤 것인가. 과거에도 그대로 대천이요 현실에도 대천이요 미래에도 대천이니 그 대천은 삼천대천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책에 있는 거와 똑같이는 얘기 안 하지마는 뜻은 똑같습니다.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거든요. 푸르른 청산이 있는가 하면 저 물은 끊임없이 흘러 돌고 있고, 끊임없이 봄이 오면 꽃이 피고 끊임없이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면서 사계절이 돌고 돕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마음속에 있는 여러분의 그 마음이 수없이 나오는 거를 수없이 다스려서 거기 놓는다면,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되는 것은 ‘거기에서만이 걸리지 않고 돌아가게 할 수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물러서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그대로 생활과학이요, 바로 참선이요 좌선입니다. 우리 공부는 끊임없는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요 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한번 둘러보십시다. 우리가 지금 남의 나라처럼 기술이 요요합니까? 남의 나라처럼 마음이 그렇게 깨어서 삽니까? 정신세계로 진출해서 갑니까? 물질을 좇는 데만 여념이 없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기 분수에 맞춰서 살 줄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세계는 언제 돌아다보겠습니까. 미래의 세계에서 본다면 우리 지금 현실세계가 과거가 되고, 과거의 세계에서 본다면 정신세계가 미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세계와 정신세계가 둘이 아니요 또는 과거와 현실이 둘이 아닌 까닭에 우린 마음으로써 항상 그렇게 다스려 가면서 모든 거를 놓는다면, 크면 큰 대로 다스리고 작으면 작은 대로 다스려서 놓는다면 화목이 오지 않을 수 없고 조화를 이루어서 끝간 데 없이 세계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정신과학으로 이탈 없이 가려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정신세계, 무심 도리의 도를 알 수 있게 해야 하죠. 무심 도리를 배워야만 물질세계에 바로 내놓을 수 있는 영력(靈力)이 생겨서 과학적인 문제를 첨단으로, 정신세계로 올려놓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남들과 같이 눈 달리고 귀 달리고 코 달리고 입 달리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보다도 더 부지런하고 머리가 영리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따라가지 못하느냐 하면 보고 들은 게 없기 때문입니다. 왜 보고 들은 게 없느냐? 예를 들어서 남들이 자장면을 만들었다 합시다. 그런데 우리는 자장면을 만드는 것도 못 봤고 먹어 보지도 못했고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네들은 먼저 자장면을 연구해서 만들었고 먹어 봤습니다. 내가 미국 등지로 다니면서 들어 보면 그 박사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의 미국인 박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당신이 말씀하듯 내 생산처가 여기 있습니다.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쥘 수도 없지만 내 생산처가 무궁무진하게 내 깊은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나는 증명하고 갑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그 핵심을 이렇게 여러 사람들한테 불어넣어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남들은 그걸 믿지 않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 그러한 첨단의 무심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물론 말, 언어는 다르지마는 그 뜻은 다 똑같았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들은 기독교나 가톨릭교에 나가지 않는답니다. 지금 가톨릭교나 기독교의 성당이나 교회가 많이 비었습니다. 난 그걸 눈으로 보고 다녔으니까요. 거기 가서 사는 한국 사람들하고 흑인들이 많이 나가요. 그런데 그걸로써 유지가 되지 않으니까 텅텅 비어 있는 성당이나 교회가 많아요. 그건 왜 그렇게 됐을까요? 내 집에 주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나가면 만날, 즉 말하자면 빈집 단속하라고 하는 거밖에는 없으니까 안 나가죠. 빈집, 내 마음의 빈집! 여러분도 비었다면, 주인이 없다면 ‘네 마음이 그렇게 한마음으로 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면 내가 한마음으로 너의 마음속에 같이 밝게 할 수가 없다. 한마음이 될 수가 없다.’ 하는 거죠. 임제 스님이 “네가 주장자가 없다면 내 주장자를 주지 못할 것이고 네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를 줄 것이니라.”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네가 주장자가 없다면 빈집이 돼서 털구멍을 통하고 콧구멍을 통하고 눈구멍을 통해서 바로 세균성, 영계성, 귀신들, 도깨비 모두가 들랑날랑거려서 녹이 슬고 거미줄이 생기고 곰팡이가 슬고 그래서 그 집은 그냥 순간 망가질 수 있느니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가르쳐 드릴 때 여러분이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주인이 나한테 있다는 것을, 생산처가 나한테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빈집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신이 바깥에 있는 줄 알고, 잘되게 해 달라고 바깥으로 관세음보살 찾고 문수보살 찾고 보현보살 찾고, 칠성부처 찾고 지장보살 찾고 약사보살 찾고 아무리 해 봐도 그건 허탕이에요. 공덕이 될 수가 없어요. 한마음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공덕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생산처인 줄 알고 일체가 평등공법임을 아시고 칠보활궁공법을 아시고 수레공법을 아신다면, 사무 사유(四無四有) 팔수레공법을 아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스스로 한마음이 돼서 저 나무 이파리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버리지 않고, 또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삼십이응신으로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법신으로서 모두가 화해서 응해 주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꽃 한 송이가 원을 해도 응해 주시고 곤충 하나가 원을 해도 응해 주신다 이거예요. 응해 주신다는 뜻은 한마음이 되어 주신다 이거지요. 찰나에 한마음으로 들어 주시고 찰나에 한마음이 너 나로 분리돼서 또 한 찰나에 나시고, 이게 달라 하면 이게 달라는 대로 저게 달라 하면 저게 달라는 대로 응해 주시는 그분이, 바로 부처라고 이름할 게 없는 것이 바로 부처니라. 내가 어떤 것이 되어서 한마음이 돼 줄 때에 나라고 하고 내가 해 주었다고 하며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처라는 것은 이름 없는 것이 부처이고 그 이름 없이 행하는 것이 바로 법성신이니라.

그러니 여러분도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수억겁을 거쳐서 쫓고 쫓기면서 진화돼서 인간까지 올라온 것이니까 이 몸속에 있는, 내 인과에 따라서 만난 인연들, 중생들을 내 한마음으로 뭉쳐서 모두 인간으로 화하게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만약에 독사의 모습이라면 그 독사의 모습을 면치 못하고 끝간 데 없이 악독한 그 모습을 가지고서 행해야 되고, 그 모습을 벗을 길이 없어서 오백 생을 지내야만이 또 한 번 인도환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곤충이나 짐승들의 모습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야만 하겠습니까? 인간으로 살았으면 인간의 습이 있을 거고 곤충으로 살았으면 곤충의 습이 있을 거고 독사로 살았으면 독사의 습이 있을 거고 소로 살았다면 소의 습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 모든 습을, 모든 걸 놔라 이겁니다. 습에 끄달린다면, 관습에 끄달린다면 절대로 그 고덩어리 속에서는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벌써 그건 내 몸으로부터 우리 가정, 우리 사회, 국가, 세계,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 손해입니다.

젊은 분들은 임신을 했더라도 한생각으로 그렇게 마음을 갖는다면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받아서 그 아기도 잘 자랄 것이고, 그저 싸움이나 하고 악의적으로 남을 원망이나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아기도 따라서 그런 의식을 가질 겁니다. 그러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죠. 어머니의 교양이 얼마나 참, 태아의 이미지로 부착되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하물며 여러분 속에 그 많은 생명의 의식들이 여러분의 마음 따라서 움죽거리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러니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것은, 만약에 이게 팥죽 솥이라면 주걱으로 익으라고 젓는 놈은 바로 여러분이 다스릴 수 있는, 좋고 나쁜 걸 아는 고 마음, 고놈입니다. 그런데 팥죽 솥에서 불끈 불끈 불끈 그냥 수없이 일어나는 그 팥죽 방울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자동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그냥 아주 좋아하고, 또 ‘너 죽일 년이래.’ ‘죽일 놈이래.’ 이러고 회사에서도 ‘너는 벌써 이렇다더라. 윗분들이 이렇게 말을 하더라.’ 이러면 그냥 화가 불쑥 나고 기가 이만큼 올라서 죽일 것 같은 그런 심정이 되거든요. 고렇게 만든다고요. 듣는 대로 만들고 보는 대로 만들고 행하는 대로 만들고 이러니까, 그 마음이 팥죽 솥에서 팥죽 방울 일어나듯 불룽불룽 일어납니다. 여기서 일어나지 않으면 저기서 일어나고 저기서 일어나지 않으면 여기서 일어나고, 지나가면 또 일어나고 지나가면 또 일어나면서 기쁜 마음은 그저 잠시잠깐이고 삶의 보람 있는 고 순간은 바람결같이 스쳐 갈 뿐이죠. 그러니 24시간 동안에 즐거운 마음이 몇 초나 들까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1년 7월 14일 국내지원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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