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漢岩) 선사의 편지 〈14〉

제자의 문장에 감탄, 극찬
탄허와 사제 인연 예견

제자 탄허에게 보낸 답서
보내온 글을 거듭 읽어보니 참으로 좋은 일단의 문장이요 필법이네. 구학문(舊學問, 漢學)이 파괴되어 가는 이 때에 그대의 문장을 보니 기지(機智)와 표현, 그리고 의미가 대단하네. 어쩌면 이리도 불승(佛僧, 한암)을 매혹시키는가. 먼저 보내온 편지(1차 서간)와 함께 여기 남겨두어 산중의 보배로 삼고자 하네.
공(公, 탄허)의 재주와 덕은 비록 옛 성현이 나오더라도 반드시 찬미하여 마지않을 것이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있어도 없는 듯이 하고, 가득 차 있어도 비어있는 듯이 하니, 어느 누군들 그 고매한 모습을 경앙(景仰)하지 않겠는가.
나는 평소에 시(詩)는 잘 읊지 못하지만 이미 마음달이 서로 비추었으니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기에 거친 글을 지어 보내니, 받아보고 한 번 웃으시게.
한 암

이 편지는 제자 탄허 스님에게 보낸 두 번째 답서이다.
내용은 탄허 스님의 문장을 극찬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문장만 극찬하는 것이 아니고, 기지(機智)와 표현, 그리고 의미도 대단하다는 말씀이다.
“어쩌면 이리도 불승(佛僧, 한암)을 매혹시키는가. 먼저 보내온 편지(1차 서간)와 함께 여기 남겨두어 산중의 보배로 삼고자 하네.”라는 말에서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도 더욱 겸손하니 그대의 학문과 인격은 모든 사람들이 추앙할 만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한암선사는 제자 탄허 스님이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시쳇말로 ‘뽕’하셨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마음달이 서로 비추었으니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기에 거친 글을 지어 보낸다”는 대목은 지음자가 되었음을 뜻하고 있다. 장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맺어지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이 편지 역시 원본도 복사본도 없고 보낸 날짜도 없다.
탄허 스님이 입산(1934년)하기 이전이므로 1932년~1934년 사이에 보낸 서간이다. 탄허 스님이 외우고 있다가 제자들이 받아 적은 것이다.

남전 스님 다비식 불참 양해 부탁
“〈법망경〉 토달기 너무 어려워”

서울 칠보사 석주(昔珠)스님에게 보낸 답서
오늘 보낸 편지에서 은사 화상님(南泉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더없이 놀랍고 비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직접 가서 조문하지 못하니, 실로 평소에 서로 경애(敬愛)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 또한 오랫동안 병으로 칩거하고 있어서 뜻대로 가지 못하는 형편이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경전(범망경)에 토(吐)를 달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오늘 겨우 마쳐서 보냈습니다. 상권의 글 뜻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참으로 글을 읽기가 어려워 억지로 붓을 대어 토를 달았습니다. 혹시라도 성현(聖賢)의 뜻에 맞지 않는 곳도 있을 수도 있으니, 깊이 연구하고 또 생각하여 다른 고명한 선지식에게 묻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만 줄이옵고 답서를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병자(1936년) 5월 5일
도우(道友) 한암은 절하고 답서를 올립니다.

이 편지는 서울 칠보사 석주(昔珠) 스님에게 보낸 답서로, 1936년에 보낸 편지이다. 내용은 석주스님의 은사(恩師)인 남전(南泉, 1868~1936)스님 입적하셨는데도 다비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매우 미안하다는 것이다.
남전스님과는 평소 교류를 갖고 있었고, 그 제자 석주 스님과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석주 스님이 토를 달아달라고 부탁한 경전은 <범망경>인데, 범망경 상권의 내용이 매우 어려워서 토를 다는데 힘이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솔직하신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전 스님은 한암선사보다 여섯 살 위이다. 선배이기도 하지만 남전 스님은 대단한 선승이었다.
선학원 창건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특히 남전 스님의 묵(墨, 글씨)은 근대 고승가운데는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남전 스님의 글씨는 보기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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