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 세상을 바꿀 힘- 역사 속 결사 어떻게 진행돼 왔나

中 동진 혜원의 동림사 백련결사가
결사운동 시초… 동북아 불교 영향

통일 신라 이후 결사운동 활성화
염불만일회·화엄 결사 등 나타나
지눌 정혜결사·요세 백련결사부터
불교개혁운동 차원으로 승화돼

경허·구산 스님 등 결사 정신 이어
지금도 자성·쇄신 결사 등 진행 중

▲ 송광사 승보전에 그려진 벽화. 보조 지눌국사가 정혜결사문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결사(結社)는 동북아 불교에 나타나는 중요한 신앙 공동체 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결사의 범위는 신앙 공동체라는 관념적인 개념부터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 운동으로까지 확대된다. 지금도 결사는 변화를 위한 다짐이 담겨 있는 운동의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결사 운동은 어떻게 비롯됐을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중국 동진시대 혜원(慧遠. 334~416)이 여산 동림사에서 맺은 백련결사를 최초의 결사 운동으로 본다.

동진 시기 불교계는 승단의 계율 문란과 정치권력에 아부하는 권승들의 준동 등으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고 승단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고, 이는 결사라는 형태로 이어졌다. 

백련결사는 402년 혜원이 유유민 등 당시 지식인을 포함한 출재가 123명으로 시작한 결사로 이들은 무량수불(無量壽佛)앞에서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염불 수행을 했다. 염불 수행을 근간으로 하지만 그 배경은 참다운 불교정신의 회복에 있었다.

이러한 결사는 중국·한국·일본 등 동북아 대승불교 국가를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됐으며, 새로운 수행공동체로서 정착됐다.

염불만일회로 결사 전통 시작
한국의 결사는 통일 신라기를 전후로 나타난다. 가장 유명한 것이 758년(경덕왕 17년) 발징 화상이 고성 건봉사에서 맺은 염불 만일결사다. 일설에 따르면 발징 화상은 염불 수행 29년만이 786년(원성왕 2년) 31명이 인로왕보살의 인도로 모두 육신등공(肉身騰空)해 왕생했다고 한다. 이 염불 만일결사는 한국 결사운동의 효시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8세기 무렵에는 오대산에서 국가와 관련한 화엄사(華嚴社) 등의 결사가 조직되기도 했다. 9세기 초에는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한 결사가 이뤄졌다. 9세기 말엽에는 〈화엄경〉의 사경과 의상, 지엄 스님 등 화엄 조사를 추모하기 위한 화엄 결사가 유행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무인집권 이전에 교종 계통의 수정사(水精社) 등의 결사가 있었다. 수정사는 1129년(인종 7년)에 법상종의 진억 스님이 주도한 결사로 참법과 아미타 신앙을 표방했다. 고려는 불교국가였던 만큼 수정사는 왕실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개혁적 결사의 시원 정혜·백련결사
12세기 이후의 결사운동은 화엄종 등 여러 종파에서 다양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결사는 개혁적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보조 지눌 국사(知訥, 1158~1210)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천태종 요세 스님(了世, 1163~1245)의 백련결사(白蓮結社)이다. 지눌 국사가 개창한 정혜결사는 뒤에 수선사(修禪寺)로 사액됐다.

두 결사는 기존의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 운동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방 지식층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지방불교적인 성격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는 기존의 중앙 문벌 귀족을 대신해 이들 지방 지식층이 새로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눌 국사는 1188년 지금의 팔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고 불교 쇄신운동에 나섰다.

지눌 국사가 선언한 ‘권수정혜결사문’은 지금도 되새겨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이른바 결사의 ‘기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개경 보제사의 담선법회에서 도반 10여 명과 약속하기를 법회가 끝나면 마땅히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함께 결사하여, 언제나 선정을 닦고 지혜를 가지런히 함에 힘쓰고, 예불하고 경을 읽으며 노동하고 운력하는 데 이르기까지 각기 소임을 나눠 일을 하자.  인연에 따라 심성을 수양해 한 평생을 구속 없이 지내 달사(達士)와 진인(眞人)의 높은 수행을 따른다면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요세 스님의 백련결사는 처음에는 지눌국사와 같이 수선(修禪)을 통해 불교계의 현실지향적 태도를 비판하는 신앙결사에 뜻을 뒀다. 하지만 교화 대상인 중생이 업장이 두텁고 근기가 낮아 수선만으로는 업장을 녹일 수 없다고 보고 정토사상으로의 전향을 결심했다.

요세 스님은 결사의 실천 방법으로 참회행과 미타정토신앙을 강조했고, 농민, 천민 층을 포함한 피지배층의 호응은 매우 높았다. 요세는 날마다 염불했고, 입적할 무렵에는 원효의 징성게(澄性偈)를 쉬지 않고 외웠다고 전해진다. 특히 입적 당시 제자 천인과 나눈 대화는 요세 스님의 정토사상이 가지는 성격을 알 수 있게 한다.

“제자 천인이 ‘세상을 떠날 때 정(定)에 든 마음이 극락정토인테 다시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묻자, 요세는 ‘나는 가지도 않아도 가는 것이고, 저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다. 서로 감응하니 제법의 실상은 마음 밖에 있지 않다’라고 답했다” 〈백련사원묘국사비명 中〉

▲ 2011년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참회의 절을 올리고 있는 당시 조계종 집행부 스님들. 이는 자성과 쇄신결사로 이어졌다.
혼란의 시기, 결사를 주목하다
불교를 숭앙했던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었던 조선 시대에는 한국불교는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결사운동의 동력도 함께 축소됐다. 물론 함허 득통, 석실 명안, 연담 유일 등에 의해 결사가 구성되고 향도, 계 등의 결사적 신앙체도 결성된 바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결사운동은 그 사상성이나 영향력 등의 측면에서 이전 시대의 결사와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다만 이런 결사는 조선시대 불교를 유지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점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조선이 몰락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한번 결사운동에 불이 붙는다. 경허의 결사운동의 경우 지눌의 정혜결사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창조적 변용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경 스님(동국대 선학과 박사과정)은 ‘지눌 정혜결사의 근현대적 계승 고찰’의 논문에서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의 정혜결사 계승의 면모를 살폈다.

이를 통해 보경 스님은 “효봉의 정혜결사는 광복 후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현대 정혜결사의 효시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면서 “효봉의 제자인 구산도 한국불교 정체성과 바른 승풍을 확립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이었다”고 평가했다.

근현대 결사 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봉암사 결사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봉암사에서 50여 명의 승려가 전개한 수행결사를 말한다. 법당과 전각에서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를 뜯어내고 목(木)발우도 부처님 법에 맞지 않다며 부쉈다. 신도들에 대한 천도재도 지내지 않았다.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울력을 시행했으며 포살을 정례화했다. 이렇게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진행됐던 이 결사는 현 조계종단 재건의 밑거름이 됐다. 봉암사 결사 정신은 성철 스님의 법문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가 신심으로 부처님 법을 바로 지키고 부처님 법을 바로 펴서 신도들을 교화하면 이들이 모두 신심을 내 우리 스님들이 잘 안 살래야 잘 안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좋으나 궂으나 할 것 없이 이해를 완전히 떠나서 신심으로 부처님만 바로 믿고 살자 이것입니다.”
〈수다라 10집에 수록된 성철 스님 법어 中〉

최근에 와서는 조계종 종단 차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가 진행되고 있다. 2011년 시작된 자성과 쇄신 결사는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적폐와 부정적 관행, 외부 의존 등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뼈를 깎는 개혁과 쇄신을 통해 60여 년 전 ‘봉암사 결사’ 이후 한국불교사에 남을만한 획기적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조계종은 생명평화 1000일 정진과 ‘붓다로 살자’ 결사 등을 추진 중이다. 최근에는 화쟁코리아 100일 순례를 마치고 진영 논리를 넘어서기 위한 ‘대한민국 야단법석’을 기획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혜원의 백련결사에서 봉암사 결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결사들은 대부분 무엇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이를 공감하는 대중들이 동참·실천하는 데 있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자는 일종의 자정 운동이 역사 안에서 결사가 보여준 의미이다. 이러한 노력과 동력들을 계승해야 하는 것이 후학들이 해야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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