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 스님의 금강산 이야기
불모이셨던 석정 스님은 지금은 입적하셨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예인’으로 남아 있는 선지식이다. 몇 번 찾아뵈면서 그 분만이 가지고 계신 예와 도가 느껴졌다. 예는 도다. 스님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겸손하고 다정한 분이셨다. 내가 금강산에 마음이 꽂혀 여러 번 뵌 후에 만나 뵈었기 때문에 금강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스님과의 대화가 풍성했다. 스님의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은 스님께서 주석하시던 내실에 걸어놓은 금강산 전경 사진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금강산에 다섯 번 다녀왔는데 갈 때마다 더 좋았습니다. 전생에 인연이었나 봅니다. 보덕암에서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던지 목 놓아 울었답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께선 겸손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러실 겁니다. 금강산은 사람을 품어주는 기운이 있는 곳이죠. 저도 금강산에서 어머니와 살다가 나왔어요,”
금강산 도인으로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효봉 스님의 스승으로 알려진 석두 스님의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세 살 때 금강산 신계사 아랫마을에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네 살 되던 해 겨울,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간파한 어머니가 백로지를 사주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전생의 인연이었다고 보는데, 금강산에 살면서 항상 어머니와 둘이 절에 가서 탱화를 보면 그리 좋았어요. 탱화를 보느라고 하루 종일 들어앉아 있기도 했죠. 애들하고 놀면 한나절이면 싫증이 나는데 스님이나 선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듣거나 탱화를 보는 것은 하루 종일 보아도 질리지 않았으니까요.”
스님은 열네 살에 아버님이신 석두 스님을 은사로 송광사로 출가해서 불화장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스님은 어떻게 해서 금강산을 떠나오시게 되었나요?”
“해방이 되자 이북에서는 우리가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고 배급조차 주지 않더군요, 심지어는 괭이와 호미까지 빼앗아 가려고 했어요. 얼마나 혹독했겠습니까? 양식이 없어 봄에 심을 종자까지 다 먹어버렸죠. 지독스럽게 일을 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촌에서 농사를 짓는 부자 한 사람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해서 그려주고는 종자를 얻었어요. 우리 모자가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어머니가 저보고 내가 농사지어 놓을 테니 남쪽으로 갔다가 가을 지나서 오너라. 하셨어요. 함께 가자고 했더니 어머니께선 당신은 금강산에 들어올 때 다시는 안 나가려고 한 사람이니 네가 들어오너라. 하셔서 가을에 다시 들어가리라 하고 어머니 사진 한 장 안 가지고 나왔는데, 그만 삼팔선이 그어져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어요. 그 후 스물한 살 때 금강산에서 나온 한 보살님한테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얘기만 들었습니다. 제가 눈물이 별로 없는데 어머니와 헤어져 남으로 오던 날은 그렇게 눈물이 났어요. 아마 영영 못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모양이죠.”
감정을 싣지 않고 담담히 말씀하시는 스님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자신의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힘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에 대한 한 때문인지 스님의 어머니에 대한 회고는 오래 이어졌다. 승속과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스님께선 사형인 효봉 스님에 대한 회고도 길게 들려주었다. 스님은 효봉 스님께서 3년 기한을 잡고 공부가 안되면 토굴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정진할 때 곁에 있었다고 했다. 판사직에 있다가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하신 효봉 스님이 그 유명한 오도송을 남긴 금강산 법기암 이야기를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효봉 스님과는 손잡고 원정리도 가고 온천도 하러 가고 했어요. 판사를 그만두고 엿판을 짊어지고 전국으로 엿장사로 다니다가 보운암에 와서 우리 스님한테 출가하셨죠. 스님은 법기암에서 얼마 안 되는데 한 칸 토굴을 짓고 들어가셔서는 작은 창하나만 남겨놓고 마지막에 벽을 발라놓으셨어요. 나는 그때 법기암에서 멀지 않은 봉래암이라는 곳에서 어머니와 둘이 있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가서 보면 가끔 효봉 스님이 창문으로 잠깐 내다보곤 했어요. 뒤를 보면 바깥으로 내놓고 일체 출입을 안 하셨죠. 법기암 스님이 하루에 한 끼씩만 점심을 가져다 드렸죠.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엔 솜을 넣은 보자기에 밥을 싸서 가져다 드리는 걸 보았어요. 우리 스님이 견성은 못하더라도 3년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뜻을 따르신 거겠죠. 효봉 스님에게 우리 스님은 은사뿐만 아니라 법사이셨으니까요.”
1년 8개월 만에 오도송을 짓고 나오신 효봉 스님께서 후학들에게 동구불출, 오후불식 장좌불와, 묵언 네 가지 규칙을 정해 엄격하게 지키셨다고 하는데, 자신만의 처절한 공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스님의 금강산 이야기는 실타래 풀리듯 마치 어제 이야기인 듯 술술 풀려나왔다.
“금강산 정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시겠네요? 조계종에서 신계사를 복원해놓았는데 한번 안 다녀오세요?”
“어려서부터 성장한 곳인데 눈감고도 훤하죠. 그런데 요즘은 거기에 간다고 해도 죄수를 호송하는 것 모양으로 길을 정해놓았다고 하죠? 내가 살던 곳이 신계사에서 5리 거리인데도 마음대로 가보지 못한다고 하니 나는 그런 입장에선 가고 싶지 않다고 그랬지요.”
가봐야 살던 곳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것이 속상해서 그토록 그리운 고향을 찾지 않는다는 스님께서는 금강산을 찾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 그림을 그리는 화원 가운데 오른 손을 싸매고 불화를 그리는 이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오른손으로는 불화만 그린다는 거예요. 그렇게 최선으로 신심을 다한 거죠. 그래서 그는 아이 손처럼 때가 안 묻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도 있는데 내가 문화재로 지정되고 불사를 하는 와중에 금강산에 갔다 못 나오면 불사를 끝내지 못하니까 더욱 갈 수가 없죠. 불사가 없는 시간이 생기면 그때나 가보려고 해요. 신계사를 책임지고 불사하는 스님에게 혹시 가능하면 우리 집터를 한번 찾아봐 달라고 하고 지도를 그려주었어요. 우리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세 개 있었거든요. 오십 년 묵었으니 숲이 되어있을 거예요. 법기암 가는 지도도 그려주었어요. 그랬더니 다녀오는 길에 원정리에 있는 물을 길어와 한통 가져왔더군요.”
연세에 견주어 스님의 음성은 명료하고 침착하셨다. 또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있으셨다. 나는 금강산 신계암에 다녀온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금강산이 고향이신 혜해 스님이 그곳에 계실 때 다녀왔다고 말씀드리자 스님께선 귀를 세우셨다.
스님께서 그린 부처님의 얼굴은 엄숙하면서도 자애롭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하는데, 엄숙함과 자애로움이 공존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32상 80종호 가운데 음성과 혀는 드러나지 않는데, 표현되지 않은 부분까지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고 답하셨다고 한다. 저 천진한 무심이 그 표현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보았다. 어느 경지에 이르러야 음성과 혀까지 드러나도록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도를 이루셨을 스님이, 가끔 금강산이 떠오를 때마다 함께 생각난다.
석정스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면벽달마, 관음보살, 원상을 그린 작품 세 점을 보내주셨다. 스님은 우리가 돌아갈 때면 늘 문밖에까지 배웅해주셨다. 그리고 후에 편지 한 통을 보내셨다.

<불모 석정 스님의 편지>
보살님 무덥고 비나리오는 삼복에 어떻게 지내시는 지요? 나는 요즘 죽은 뒤에 몸을 동대 병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죽은 뒤에 몸을 썩혀 내버리거나 태워버리는 것보다는 피 한 방울 털 한 개라도 쓸 수 있으면 좋고, 몸을 학습용으로 써도 보람 있는 일이고, 이 일이 나의 마지막 작은 효도라 생각했습니다. 보살님에게 알려드리고 싶어서 몇 자 적었습니다. 측근에서 몇 사람이 동참하기로 하고 백중 후에 일부러 내려와서 수속해준답니다. 신묘 여름 석정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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