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2 상수불학(常隨佛學)

불학은 사회와 우주의

광범위한 진리를 터득해

그 법대로 살아가는 것

대중과 함께 불법을

실천해 안락에 이르는

생활을 해나가자

 

수행은 신(信)이 근본이며 이 속에 모든 과정이 다 들어있다. 신을 떠나서 주(住)도 행(行)도 회향(廻向), 지(地)도 있을 수 없다. 믿음을 알뜰한 것, 신리실유(信理實有)고 노력하면 얻어지는 것, 노력을 하여 얻어진 경우엔 무궁한 공덕이 있다는 이것은 바로 묘각(妙覺)의 지경이다. 그러므로 신(信)에서 신실(信實)한 지경에서 모든 것을 다 본다. 이는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바와 같이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다. 신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모다. 모든 일을 성취시키는 근원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지경에서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다. 신, 믿음이란 아미타불을 믿는다는 것이며, 우리는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에 나무(의지)한다. 귀의한다. 나무아미타불 하면 그만이다. 교학상으로는 이를 타력의존(他力依存)이라고 하는데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할 뿐이다. 아미타불을 객관적으로 볼 때 타(他)이다. 내가 타인 아미타불에 의지하므로 우리는 타에 의지해서 살아 나간다.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은 거기 의지한다. 거기로 돌아간다는 것, 그러니까 우주의 대생명(大生命)에 대생명을 깨친 이에게, 그리고 이를 성취한 이에게 돌아간다. 의지한다는 것이다. 우주의 전 인류를 대자대비로서 사랑하시는 대사회(大社會)를 건설하시는 그에게 이를 깨치고 성취한 이에게 우리는 의지할 뿐이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이것이다.

이런 뜻으로 타력을 절대적으로 인정한다. 절대타력(絶代他力)의 본원력에 의지한다.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순피본원고(順彼本願故)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본원력에 순종하는 연고로 해서 우리는 이에 의지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인간이라고 뽐내지만 실상은 지지리 못났다. 인간이란 육체만으로 봐서는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죄악의 뭉치고, 번뇌 망상과 온갖 어리석은 생각을 빼놓지 않고 잘도 갖추었다. 우리는 이렇듯 가련한 중생이다. 불쌍하다. 불쌍한 중생이 잘난 체 해 보아야 소용없고 차라리 제가 못생기고 지지리 못났다고 생각함만 갖지 못하다. 이렇듯 못생긴 것들만이 이 우주에 가득 차 이것들이 인간이다. 이생이다. 중생이다, 하고 꾸물거리고들 있다. 대자 대비한 부처님은 이런 우주에 가득 찬 못생긴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나시었다.

제가 잘 났다는 사람 저 혼자 아무렇게 라도 살아나갈 사람은 대자 대비한 부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현대인은 먼저 이러한 아집(我執)을 버리기 전에는 신(信)에 들어갈 수가 없다. 번뇌 망상과 죄악의 뭉치인 중생을 아미타불은 한 사람이라도 다 빠짐없이 건져 주고 난 다음에라야 스스로 성불하겠다는 무연대비(無緣大悲)를 성취하시었다. 우리는 이래서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의지한다. 또한 이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시방 삼세의 여래(如來)들이 다들 서설증(舒舌證)으로써 증명하였다.

원효대사는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라는 저서에서 정토로써 본 원을 세움은 오로지 범부를 위한 정토본의 전위범부(淨土本意 專爲凡夫)이라, 하시었다. 유심안락도란 안락한 도에 마음을 노닐게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버리셨으므로 오로지 가진 것이라곤 대자 대비밖엔 없었으며 이것이 전 재산이었다. 대자 대비란 중생 건지기이다. 그러므로 중생 건지기가 부처님의 재산 목록이다.

부처님의 전 재산이 중생 건지기라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뇌는 정토문(淨土門)이 열리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원효대사가, 정토의 본뜻은 오로지 죄악 투성이인 범부를 위한 것이고 겸하여 이승(二乘)과 보살을 위하였다고 하시었다. 이승과 보살은 여기서는 애초의 목적이 아니고 훈수로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약점을 가진 우리 같은 범부로서는 다만 나무아미타불을 뇌이고 아미타불에 의지할 뿐이다.

상수불학(常隨佛學)을 앞에서 항상 부처의 학문을 따라서 배운다고 풀이하였다. 그렇다면 부처의 학문이란 어떤 것일까?

부처라는 것이 원래 자기가 스스로 깨치고, 그 다음은 남을 깨치도록 하고, 기르고 나서는 그들이 모여 그 깨친 바를 행동으로써 실천한다. 그리하여 실천하는 행동을 성취한다. 그런 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처의 학문, 불학(佛學)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요즘 과학이라는 것, 학문을 하고 실천하고 이를 실현하는 그런 것이 모두 광범위한 불학이다. 그런데 종교의 한 분야로서 불교의 학문, 불교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전문적인 특정한 것을 가지고 이를 직업의식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전문적인 교학도 필요는 하지만 부처님의 뜻으로 보아 사회와 우주의 광범위한 진리를 알고 터득하고 이 진리에 입각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불학일 터이므로 불학이라고 하여 특정한 것을 내세울 것은 없다.

상수불학이라는 이 말은 첫째 내 자신이 공부를 하고 자리행이 된다. 내 자신에게 새로운 행동이 된다. 남에게 덕을 베푸는 것은 나중일하고 우선 그 공덕이 자기를 중신하여 이루어진다. 먼저 혜택을 입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잘 생각해 본다면 자기 방성도 채 안 된 사람이 남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항상 부처의 학문을 따라서 배운다. 옳은 것을 따라서 배운다. 지성스러운 것을 따라서 배우고 이를 성취케 하는 일을 우리는 우러러보고 칭찬한다.

상수불학은 이렇듯 중요한 대목이었다. 우리는 상수불학으로써 모든 중생과 더불어 저 안태한 극락의 지경에 이르러 거시서 생활을 영위해 나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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